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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동영상

지배와 섬김: 마 20장 17-28절

by 최수근 2023. 10. 20.

2023년 9월 24일 주일예배

[지배와 섬김: 마 20장 17-28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사람들의 보편적인 욕구 가운데 하나로 지배욕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지배욕이란 계층에서 올라가려는 심리, 지지 않으려는 경쟁 심리, 자존심 세우는 욕구 등을 말합니다. 이것으로 인해 세상에 바람 잘 날이 없습니다. 실은 피지배자를 선호할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설령 피지배자라고 해도 어쩔 수 없어 그런 상황에 있는 것이지 그 자리를 벗어나 작든 크든 그룹을 지배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누군가를 지배하고 싶은 마음이 자리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렇듯 세상의 방식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지배적이고 더 강력하고 더 위협적이며 더 요구함으로써 앞선 자가 되는 데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이 보여준 타자를 향한 그리스도인, 곧 제자의 자세는 높아짐이 아닌 낮아짐에 있습니다. 그 어떤 전제도 없는 낮아짐에서 나오는 섬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섬김을 섬김 그대로 보지 않고 섬김을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바로 보상이라는 목적을 이루려는 방편으로 섬김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런 기대를 하도록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목적과 결말을 분명하게 알려주셨습니다. 그 말씀에 대해 귀를 닫은 것뿐입니다. 소위 확증 편향이라고 할 수 있어요. 자기 좋은 것은 취하고 상반되는 생각은 무시한 무의식적인 사고의 결과입니다. 이런 확증 편향의 사고를 깨기 위해 예수님은 그들에게 도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포도원 주인의 비유를 통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는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를 들려주셨고, 그 직후에 세 번째로 수난과 부활의 예고를 하셨던 것도 확증 편향된 제자들의 생각을 돌이키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017절에서 보면 예수님이 열두 제자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계획을 말씀하면서 그 길 끝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말씀하셨습니다.

20:1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19:19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 일에 살아나리라.”

누군가 권력을 잡으면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부단히도 애를 씁니다. 부여잡고 있는 권력을 어떻게 쉽게 누군가에게 넘겨줄 수 있겠어요. 더군다나 타자를 위해 죽거나 고난받는 일은 그들에게 없습니다. 작은 자기 권력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애쓰며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할 뿐입니다. 어떨 때는 권력자가 다른 이들을 잘 돌아보려고 해도 옆에 있는 자들이 그 권력의 부스러기를 누리기 위해 권력자의 눈과 귀를 막고 왜곡시켜버려 잘못된 길로 가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다고 선포하고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기 시작할 때도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이유는 새로운 권력의 출현으로 보았고 그런 힘 있는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은 그런 생각이 추호도 없으셨습니다. 처음부터 말씀이 분명했습니다. 예수님이 관심을 가졌던 이들도 대부분 약자였습니다. 전혀 기득권 세력들과 그 길을 같이 하지 않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길 끝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사람들을 위해 수난받고 죽을 것이고, 그 절망적인 죽음에서 부활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면 그곳은 정녕 숙연해져야 할 자리입니다. 인간의 본성이 비집고 나올 순간이 아니어야 했습니다.

세 번째 수난 예고 앞에서도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보상에 대한 기대를 하고 있었던 제자들의 계획을 무너뜨리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거듭되는 말씀을 통해 제자들은 예수님의 진의를 제대로 파악해야 했습니다. 참으로 주님이 원하시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말입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에서 영적 무지를 볼 수 있고, 이 문제는 곧 우리의 문제로 귀결되기도 합니다. 확증 편향과 영적 무지로 생성된 잘못된 기대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해왔던 매우 중요한 시점에서 제자들은 주님에 대한 진정한 고백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와 함께 십자가 고난 길에 동참하고자 하는 헌신들이 싹이 터야 하는 시점에서 여전히 제자들 속에는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만이 자리하고 있음을 봅니다. 변화와 깨달음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절실히 느끼게 하는 대목입니다. 한 사건을 통해서 마태는 우리에게 그와 같은 제자들의 상황을 확인하여 줍니다. 그것은 제자들 사이에서 매우 당혹스럽고 제자 공동체에 균열을 가져올 만한 일이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두 아들과 함께 예수님께 와서 절하며 청탁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실현하실 왕국에서 두 아들을 예수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달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한 것입니다. 왕을 제외하면 남는 최고의 두 자리를 선점하고자 한 시도입니다. 어머니 살로메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인척 관계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사촌지간인 야고보와 요한이 특별한 처우를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이것은 마태복음 1927절에서 베드로가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에서 드러난 것처럼 개국공신으로써 평가와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인간 안에서 성취, 공로는 자기를 주장하게 만드는 매우 제거하기 어려운 뿌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끊임없이 자기 몫을 요구하는 소리들이 넘쳐납니다.

이렇게 주님을 따랐으면 반드시 얻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것을 끊어내지 못하는 한 우리의 길은 끊임없이 왜곡된 길로 가고 말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그 길 끝에서 우리는 주님을 결코 뵐 수 없습니다. 그건 우리가 뒤따라야 할 주님의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살로메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에게 물었습니다. 20:22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예수님은 두 사람이 앉고 싶어 하는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알지 못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 자리는 그들이 기대하는 것과 같이 영광의 자리, 통치의 자리, 높아짐의 자리가 아니어서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위대한 자리가 아닌 데, 잘못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잘못된 기대에 빠진 그들의 무지함을 꾸짖으신 겁니다. 예수님의 기대와 제자들의 기대가 그렇게 다른 목표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신 목적과 그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다. 참 신앙의 길은 그것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걸음씩 나갈 때, 하나님의 기대가 나의 기대가 되고 그분 앞에 그렇게 설 때 우리는 진정 기쁨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반면에 나의 기대로 나아가다 보면 그 기대가 채워지지 않을 때마다 불평과 불만이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은 그렇게 쌓여간 불평과 분노는 폭발할 것이고 그 결과는 하나님과의 단절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에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두 제자는 아무런 고민없이 즉각적으로 할 수 있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물론 하나님 나라 영광의 자리, 최고의 자리에 앉을 수 있다면 그 어떤 잔이라도 마실 각오가 되어 있겠지요. 권력을 얻을 수만 있다면 인간은 그 어떤 것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예수님이 말씀하는 잔과 제자들이 생각하는 잔은 분명 다릅니다. 예수님의 잔은 고난과 멸시와 죽음의 잔이었지만 제자들은 축복과 번영과 영광의 잔으로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공로와 보상에 있어서 예수님은 세상의 가치와는 다른 가치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 201-16절에서 포도원 일꾼에 대한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신 것입니다. 일한 품삯을 정하고 그것을 주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내가 조금 더 일했으니 늦게 온 사람보다 더 많이 받을 수 있겠다는 것은 우리 생각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이 너무도 많은 영역에서 피곤한 것 아닙니까? 잘못된 기대를 하고 살아가니 그 일이 틀어질 때마다 얼마나 마음이 상하겠어요.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23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오순절 성령세례를 받고 참 제자가 된 이후에 야고보와 요한도 그 고난의 잔을 마셨습니다. 야고보는 헤롯왕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요한도 말년에 유배를 가 갖은 고초를 다 겪었습니다. 그럼 당연히 예수님 좌우편에 앉을 권리가 주어지는 건가요?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좌우편, 영광의 자리에 앉는 것을 허락할 권리는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제자들에게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런 권리를 은연중에 주장할 때가 많습니다. 자리를 구하는 야고보와 요한을 통해 우리 자신의 뿌리 깊은 이기심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특권을 요구하는 두 사람을 지켜보던 다른 제자들의 반응은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엔 오직 시기 질투 분노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24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제자들을 화나게 했던 것은 단순히 다른 제자들은 안중에 없이 예수님의 좌우편을 독식하려고 했던 두 제자의 정치적 야심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것은 약아빠진 두 사람에게 뒤통수를 맞았다는 생각과 기회를 낚아챈 두 사람에 대한 시기와 질투로 인한 분노였던 겁니다.

그런 점에서 열 제자의 반응 역시 두 제자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를 모르는 영적 무지에서 비롯된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세속적 가치관으로 지금의 상황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제자를 함께 불러 이 주제에 대한 더 깊은 가르침을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25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세상 나라의 통치자들은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저들에게서 한 생명의 소중함이 존중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리비아와 모로코의 재해 현장에서, 수없이 쿠데타가 일어나는 세계 여러 나라들 속에서 또 여러 독재국가에서 볼 수 있는 권력자들을 통해 사랑과 겸손, 섬김이 기본이 되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 원리와는 너무도 멀리 있는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힘들어하는 것을 매일 같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이 이런 세속적인 통치 원리에 입각한 지배욕을 갖고자 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이런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집권자들을 예로 들으셨던 것이고, 진정 우리가 지향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바른 질서를 26-27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사람들이 이 말씀을 종종 오해합니다. 크고자 하면 섬겨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면 종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예수님 말씀의 초점은 앞에 있지 않고 뒤에 있습니다. “섬겨야 한다. 종이 되어야 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다음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내가 섬겼으니까, 내가 종이 되었으니까라는 생각에서 하늘을 쳐다봅니다. 무엇을 얻기 위한 섬김이 아닌 우리의 삶 자체가 섬김이어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섬김이 무엇을 획득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만일 그 목적이 달성되었다면 섬김이 지속될 수 있겠습니까? 멈추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매번 선거에서 그런 이기적인 모습들을 수없이 보았잖습니까? 평생 섬길 것처럼 허리 숙이고 무릎 꿇다가도 당선되면 지배 권력의 모습을 드러내는 위선자들을 말입니다.

교회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도 수많은 권력이 있습니다. 중세교회가 그랬습니다. 현대교회라고 해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과거 예루살렘의 종교 권력이 예수님을 못 받았던 것처럼, 지금도 예수님을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닙니다. 지배는 제자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예수님 사역의 핵심은 십자가를 통한 섬김에 있습니다.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심을 통해 섬기는 것입니다. 그 섬김을 통해 많은 사람이 새로운 생명을 얻었고 자녀로서 회복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영광과 존귀를 마땅히 받으셔야 하지만 우리 인간의 필요를 먼저 생각하셨습니다. 세상이 죄의 어둠 속에서 갈 길을 잃었기에 자기에게 속한 모든 것들을 포기하시고 우리를 위한 종으로 자기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렇게 단번에 드려진 대속의 섬김에서 예수님이 죄의 대속물로서 자신을 드리셨을 때, 인간의 모든 필요가 충족되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온전한 섬김을 보여주신 것은 그 길을 따라오도록 하신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진정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 뒤를 따르고자 한다면 분명 이 섬김의 길을 따라야 합니다. 그분의 영광을 누리기 이전에 자기를 내어주는 그의 사랑과 섬김, 그리고 고난을 먼저 질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세상 관점으로 보면 세베대의 아들들의 요청은 자연스럽고 용인될 수 있는 일입니다. 물론 이것은 자아 만족, 즉 영예, 지위, 영광, 명성을 최고의 선으로 보는 타락한 인간의 왜곡된 시각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이것이 오늘의 세상을 지배하는 시각이기도 합니다. 반면에 하나님 나라는 위대함을 완전히 정반대의 방법으로 정의합니다. 이 방법은 이 세상과 인간의 본성에 있어 매우 낯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님의 방법이고 따라서 제자들의 방법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제자들에게는 종말의 보상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현재에 받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제자들은 그 보상을 최우선으로 염두에 두지 말아야 합니다. 보상이 결코 우리를 이끌어가는 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참 제자들은 주님이 보여주신 섬김과 순종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위대함과 으뜸은 바로 예수님이 보여주신 섬김에 있습니다. 다스림이거나 지배가 아닙니다. 섬김의 삶은 감정적이고 관계적인 자기중심주의의 사악한 전쟁을 끝낼 수 있습니다. 다른 이들의 삶에 하나님의 복을 가져올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그들 속에 내어줌으로써 말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십자가를 짊어지신 예수님의 섬김이 교만과 자기 중심주의의 죄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우리 자신을 섬기려는 동기가 깨어지고, 다른 이들을 섬기는데, 초점을 맞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하나님 나라의 질서 가운데 우리 예수님이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우리 함께 주님께서 친히 삶으로 보여주신 섬김의 삶을 본받아 하나님 나라의 백성, 그리스도의 제자다움을 세워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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