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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일으키사 하늘에 앉히시니: 엡 2장 4-7절

by 최수근 2020. 9. 27.

2020년 9월 27일 주일예배설교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일으키사 하늘에 앉히시니: 엡 2장 4-7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바울은 세 가지 무서운 능력인 ’, ‘사망’, ‘진노에 매여 있는 인간에 대한 정확한 묘사로 에베소서 2장의 단락을 시작했습니다. 겉으로 보면 그건 바로 절망이었습니다. 그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어떤 해결책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지점에서 절망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긍휼히 풍성하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2:1-3절의 타락한 인류의 절망적인 상황은 4절에서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으로 인하여 반전을 이루기 시작합니다.

2: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헬라어 원문에서는 4절 첫머리에 그러나라는 말이 들어가 있습니다. 전환을 나타내는 역접 접속사를 δε를 사용하여 절망에서 소망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제부터는 불순종한 인간들을 긍휼의 마음으로 불쌍히 여겨주시고, 큰 사랑으로 용서하여주시고, 무한하신 은혜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울은 언급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강조한 그러나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를 사용함으로써 모든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바울은 선포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지나 공로는 구원 사건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성경은 그 점에서 단호합니다. 인간의 가능성을 절대로 열어놓지 않습니다. 4: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인간은 죄로 인하여 죽어 있는 존재이기에 그 어떤 행동도 영향을 미칠 수 없어서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시고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바로 이러한 모습이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잘 나타내줍니다. 그것은 무조건적 사랑이요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풍성하고도 다함이 없는 호의입니다. 

이렇게 허물과 죄로 인하여 죽었고, 세상 풍조와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르며, 진노의 자식이었던 우리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은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바울은 큰 사랑이라고 명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 순간 이렇게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그러나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의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여전히 내가라고 외친다면 우리는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내가라고 외치고 있다면 복음의 혜택을 입을 수 없어서입니다. 거기에는 그 어떤 은혜도 자리잡을 틈이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인간의 반응과는 무관하게 그 큰 사랑으로 인하여 처음부터 갖고 계셨던 계획을 실행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의 선하신 경륜에 의하여 미리 계획된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깨달아 알고 거기에 감사하고 큰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 드려야 합니다. “너희가 은혜를 인하여 구원을 얻은 것이라라는 선포에 귀 기울일 때 은혜에 감격할 수 있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나의 나 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놀라운 은혜임을 알기에 하나님을 향한, 그리스도를 향한, 성령님을 향한 헌신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의 발로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긍휼하심으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의 은혜로 죄를 사하시며 그의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그러나의 하나님을 만납시다. 그 분을 찬양하고 감사합시다. 

5-6절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보면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는 3개의 동사가 나옵니다. 살리셨고, 일으키셨고, 앉히셨고, 3개의 동사는 예수님의 구원 사역에서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세 개의 역사적 사건인 부활, 승천, 착석을 가리킵니다. 

5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였습니다. 그런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거듭난 것입니다. 그리스도 생명의 씨가 우리 속에 들어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 대해선 산 자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구원은 제2의 창조인 것입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후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 전혀 새로운 자세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에 반응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6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일으키사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우리가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앉는다면 어디에 앉겠습니까? 바로 보좌 위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우리를 높여주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하나님의 존전에 서 있으며 그 앞에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가장 거룩한 곳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곳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예수님께서 열어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쉐키나의 영광의 자리로 말입니다. 

이로 인해 이제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 앞에 서 있고, 그분의 말씀하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전에 그는 전적으로 이 세상에 속해 있었습니다. 모든 방면에서, 마음과 사고 방식과 이해와 즐거움과 소망과 소원에 있어서 이 세상에 매여 있었습니다. 사단의 권세 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그렇지 않습니다. 비그리스도인은 세상에 굴복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 세상 풍속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지배받지 않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벗어났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동행하는 거룩한 삶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매일 하나님과 교제를 누리고 있습니까? 그분에게 가까이 갈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하늘에 속한 자이기에 여기에서 하늘 삶을 누리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가 완성되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완성된 역사 속에서 안식해야 합니다. 

게다가 그리스도의 부활과 높이우심에서 그리스도와 결속되어 있다는 말은 그저 무의미한 기독교적 신비주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산 체험을 증거합니다. 그것은 우리 삶 속에 놀라운 능력입니다. 그리스도가 한편으로는 새로운 생명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승리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죽었으나 영적으로 살리심을 받고 깨어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종이었으나 보좌에 앉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행동은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이루어진 아름다운 일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살리셨고, 승천하게 하시고, 자신의 하늘 보좌 우편에 앉히셨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리스도에게만 일어날 일이 아니라 성도된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도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살리고 일으키고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이것은 연대적인 의미에서, 그리고 언약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기독교에 기초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이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 구성원들이 지닌 독특성은 그저 그들이 예수님을 찬미하고 심지어 경배한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들이 교회의 교리들에 동의한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심지어 그들이 특정한 도덕적 기준에 따라 산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오직 그리스도인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있는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와 새로이 결속되어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그들은 실제로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과 착석에 참여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해서 연합되지 않았고, “그 안에있지 않는 한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의 출발점은 우리의 능력과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선포하고 바울은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으로 이 일을 행하셨는지 이야기합니다.

7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이 단락 전체에서 주된 강조점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행동하신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것, 다시 말해 어떤 공로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어떤 것, 즉 아무 공로 없이 주시는 그분의 긍휼, 사랑, 은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으로 시작된 구원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셨습니다.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에베소서 119-20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고 높이시면서 하나님은 그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와 함께 우리를 다시 살리시고 높이시면서 하나님은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구원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풍성한 은혜를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의 산 증거입니다. 허물과 죄로 인하여 죽었던 자들인데 하나님의 큰 사랑을 인하여 살아났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우리 자신을 넘어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온전하게 서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저들이 그러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일으키시고, 하늘 보좌에 앉히시는 은혜를 입고, 새로운 하나님의 영광의 메신저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메시지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이 곤고하고 불행하고 혼돈되고 좌절하고 있는 현대 세계를 향해서 해야 할 일입니다. 이것이 쉬임없이 일어나 우리를 통해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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