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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설교원고

예수님은 누구신가? 마 8장 1-17절

by 최수근 2015. 5. 13.

2015년 5월 10일 주일설교문

[ 예수님은 누구신가? 마 8장 1-17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복음서를 보면 같은 내용들이 각각의 복음서에서 중복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서로 다른 믿음의 공동체가 예수님에 대한 다각적인 접근과 믿음의 고백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여러 각도에서 예수님을 조명해보면서도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이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4 복음서를 통해 그것을 발견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8장과 9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다양한 이적기사들이 나옵니다. 5-7장까지의 산상수훈 이후에 마태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께서 다양한 병자들을 치유하신 이야기들을 한 곳에 집중적으로 모아놓았을까요? 4복음서의 저자들은 저마다 신학적인 의도를 갖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당시 예수님의 지지자들이나 적대자들에게 예수님은 치유자로 기억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적대한 자들에게서 예수님의 치유는 그 당시 수많은 마술사들과 치료사들처럼 마술을 사용하거나 마귀와 결탁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 점에서 마태는 그 당시 마술사들이나 치료사들에 필적할만한 또 하나의 신적인간으로서의 예수님께서 다양한 이적을 행했음을 확고히 하려고 그 사건들을 나열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마태는 이것을 통해 예수님의 이적활동이 지닌 의미가 무엇인지를 독자들에게 명확히 밝히고자 하는데 있었습니다. 대단한 기적을 행했다가 아니라 그 사건 하나하나가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서 어떤 의미인지를 섬세하게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그와 함께 예수님의 이적들을 이야기함으로써 최종적인 마태의 목표는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행하신 세 개의 기적적인 치유가 나옵니다. 사람들은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수훈의 말씀을 듣고 어느 누구도 갖고 있지 않은 말씀의 권위를 예수님에게서 느꼈습니다. 서기관들과는 다른 권위를 느낀 무리들은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위가 예수님의 말씀에서뿐만 아니라 그 행위에서도 분명하게 보게 될 것을 기대하면서 따랐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무엇을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대단한 기적만 본다면 대부분 놀라움으로 그치고 말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바라볼 수 있고, 분명하게 깨닫는 자는 예수님의 뒤를 진정으로 따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초점은 이처럼 제자도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진정 보게 된다면 그 분을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유대인 문둥병 환자를 치유하심

마태복음 81-4절에서 예수님은 나병에 걸린 유대인 남자를 치유하셨습니다. 이 나병이 일반적인 의미의 피부병이 아닌 엄격한 의미에서의 나병을 이야기한 것이라면,

그런 나병환자를 마태복음 8-9장에서 첫 번째 치유의 대상으로 삼은 사실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그 당시 나병은 하나님의 저주의 결과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니 이 병을 치료하는 것은 죽은 자를 살려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나병환자들은 산송장처럼 취급되어 사람들을 부정하게 하는 자들로 여겼기에 이들은 회당 예배와 공동체로부터 철저하게 격리되었습니다. 레위기 1346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그 점에서 나병을 죄로 얼룩진 우리들의 모습과 연결시켜 볼 수 있습니다. 죄는 우리를 사람들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끔찍한 질병일 뿐만 아니라  급속도로 퍼져 나가, 우리로 하여금 파멸에 이르게 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나병만큼 타락한 인간의 영적상태를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 점에서 나병을 치유하신 일은 나병처럼 소망 없고, 죄로 인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인간에게 다가오신 예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당시 어느 누구도 나병환자에게 나아가 따뜻하게 그를 대하고 치료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도 정결법에 따라 부정해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버려진 수많은 나병환자들은 몸에 감각이 무디어지고, 피부가 녹아져 내리고, 손가락, , 코등이 떨어져나가며 처참한 삶을 살다가 외롭게 죽어갔습니다. 이것은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비참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나병환자가 그와 같은 격리의 원칙을 어기고 사람들 틈에 들어왔습니다. 그로 인해 사람들에게서 돌팔매질을 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그는 예수님께 나와 간청을 하였던 것입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이 말에서 예수님이야말로 분명 자신의 병을 고치실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치료의 은혜를 자신이 입을 수 있을지 예수님께 겸손하게 여쭌 것뿐입니다.

그런 그의 간청에서 예수님은 살아있는 믿음을 보셨고, 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어 불결한 그의 몸에 손을 대셨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에볼라 바이러스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의사들도 환자들을 치료하다가 바이러스에 노출되어 감염되기도 하지만 여전히 많은 의사들이 아프리카로 달려가서 저들을 치료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그곳에서 봉사하고 귀국한 의사들이 있습니다. 어느 인터뷰에서 아프리카로 또 가실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을 받은 의사 한 분이 의사이기에 가야한다면 또 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들으면서 참 의사가 무엇인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진정한 의사라면 어떤 환자든, 어떤 질병이든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생명이 경각에 달린 환자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야하는 것이 의사 아니겠습니까?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께 반역한 죄로 인해 사망에 이른 인간들을 복음으로 살리시고, 강퍅할 데로 강퍅해진 마음을 치료하시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회복시키기 위해 우리에게 오신 참 의사이십니다그러기에 예수님은 나병환자의 몸에 손을 대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환자에게 손을 대는 순간 나병환자는 물론 제자들과 사람들이 얼마나 놀라워했겠습니까? 예수님이 정결법을 어기는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결하지 못한 나병이 예수님으로 인해 깨끗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오늘도 예수님은 십자가 대속의 피로 인해 우리의 더러운 죄가 깨끗하게 씻김받기를 원하십니다.  

나병처럼 깊은 영적인 질병에 걸려 신음하는 우리들을 치유하실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이렇게 나병환자를 치유하시는 이야기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마태의 의도는 단지 사람들의 신앙을 일깨우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온전한 신앙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분명하게 인지하느냐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진정 어떤 분이신지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없었을 때 정상적인 인간관계와 회당 예배에서 소외당한 이 부정한 나병환자는 예수님의 신적권위를 보았고, 그것을 인정함으로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그는 치료 불가능한 나병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이방인 백부장의 하인을 치유하심

두 번째로 마태복음 85-13절에서는 중풍병을 앓고 있던 이방인 백부장의 하인을 치유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을 때 백부장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 간구하였습니다.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하인도 물론 이방인이었을 것입니다

이에 본문은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은 마태복음 15장에서 이방인인 수로보니게 여인이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간청했을 때 예수님은 매몰차게 거절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실제로 예수님은 사역기간 동안 이스라엘에 집중하셨습니다. 이방인의 치유는 예외적인 경우였습니다. 그런 연유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는 말씀을 다르게 해석을 할 수도 있습니다. “고쳐 주리라는 헬라어 단어 데라퓨소를 미래서술문이 아닌 의문문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는 말씀은 내가 가서 고쳐주어야 하느냐?”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문장을 본다면 순간 예수님께서 백부장을 수로보니게 여인 때처럼 시험했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이에 백부장은 당장 오셔서 하인을 고쳐달라고 간청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다른 어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하늘의 능력과 권세를 행하시는 분으로 고백을 합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예상치 못했던 대답이었습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말씀으로 명령하여도 중풍병이 나으리라는 확신! 그 당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특별한 믿음입니다. 말로서 원격치료를 한다, 참 대단하지 않습니까?

이와 같은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우리가 오늘 예수님께로부터 받는 은혜는 우리가 소유한 믿음의 크기 만큼입니다. 더 큰 은혜, 더 큰 사랑, 놀라운 치유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고 싶습니까? 여러분의 믿음을 키우십시오

예수님께서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하시자 중풍병을 앓던 하인이 그 즉시 회복이 되었습니다. 이방인 백부장의 태도는 예수님께 나아가는 적절한 방법이 무엇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백부장은 하나님을 대행해서 명령을 발할 수 있는 특별한 권위가 예수님께 있음 고백하였습니다. 그것은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새 창조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은 놀라운 믿음의 통찰력을 보여준 백부장을 극찬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왜 그렇게 극찬하셨을까요? 그의 믿음은 단지 치유자로서의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담대한 믿음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고백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예고합니다. 말씀으로 치유하시는 분이야말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마태의 의도입니다.

그와 함께 백부장의 이야기는 예수님을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삶 속에서 그 분의 능력을 체험한 이방인 신자들에게 엄청난 격려가 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나 뵙지 않고도 그 능력의 혜택을 입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가졌다면 거리, 시간이라는 환경의 장애는 없어지고, 그들의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 혜택은 그때도 유효했고, 오늘도 유효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선포되는 곳이라면 그 어디에서나 능력이 나타나고, 치유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도 이 세상을 그리스도가 왕으로서 통치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왕으로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우리의 질병까지도 감당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베푸는 생명의 잔치에 들어가는 열쇠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들의 믿음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열쇠인 것입니다.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하심 

세 번째로 마태복음 814-15절에서는 열병에 걸린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셨습니다.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예수님은 심한 열병에 걸려 있는 베드로의 장모를 보시고, 그녀의 손을 만져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고, 단지 그녀의 손을 만지시기만 했는데도 열병이 나았습니다.

여기에는 그 어떤 요구도, 믿음에 대한 언급도, 예수님 자신의 말씀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예수님이 주도권을 쥐고 행하시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바로 이것이 우리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복음의 사건은 값없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아무런 공로도 없지만, 솔직히 자격조차 없지만 죽어가는 우리들을 향해 먼저 손을 뻗으신 놀라운 구원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열병이 나은 여인은 그 즉시 일어나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습니다. 구원받은 자의 할 일은 예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도식입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보는 순간 그 분의 뒤를 따르고 섬기게 됩니다. 이것이 없으면 아직 예수님을 못 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치유를 통해 마태복음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어서 마태는 16-17절을 통해 예수님의 사역을 정리 하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구약의 말씀을 통해 증거합니다. 16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오직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셨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이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예언자들의 예언을 성취하시는 메시아임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17절에서 증언 합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를 이사야 534절의 성취로 본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7장에 나타나고 있는 계시의 산에서 내려와 질병과 귀신의 세력들이 지배하는 땅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누구로 들어오셨습니까? 바로 메시야, 우리의 구원자로 이곳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죄로 인해 야기된 사망의 질서에 얽매여 있던 우리들을 구원하시고 육체의 연약함으로부터 우리를 치유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가 치유하는 이유는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아프고 고통당하는 이 땅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 치유의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서는 끊임없이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 규칙적으로 그리고 실패 없이 일어났던 치유는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하고 하나님께 치료해달라고 호소할 때 가끔 그리고 많은 실패와 더불어 일어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이 언제 치유하시고 언제 치유하지 않으실 지에 관해서 단언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우리 세계를 뚫고 들어왔지만 여전히 우리는 이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은혜와 치유의 기적들이 내게서 일어날 수 있겠어 냉소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우리의 눈을 들어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분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향해 문둥병자가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고백했던 것처럼 백부장이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고백했던 것처럼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고통과 실패를 맛볼 수도 있겠지만 예수님이 그렇게 감동적으로 보여주셨던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단순한 신뢰를 우리도 보여드리고, 유지할 수 있다면 이 능력과 영광을 분명 맛보게 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메시야이시고, 우리의 질병을 치료하여주시는 치유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연약한 우리 가운데 다가오십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향해 믿음을 고백하십시오. 당신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나의 연약함을 치유하여 주십시오.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치유하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관계를 회복시켜주시고, 우리의 강퍅한 마음을 만져주시고 우리의 신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시켜주실 것입니다.

그와 함께 이방인 백부장이 그 믿음으로 자신의 종을 살릴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믿음으로 인해 또 다른 한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생명의 부양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의 정결함과 치유를 얻기 위해서 기도할 때 더욱 더 대담해야만 합니다. 나병환자의 갈급함으로, 백부장의 확신으로, 베드로 장모의 섬김으로 예수님께 담대하게 나아가 간청하십시오. 그 어떤 결과도 예상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기십시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오늘 우리가 의지하고 바라보는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의 왕이십니다. 그 분의 통치하심 가운데 무릎 꿇으십시오. 순종하십시오. 예수님을 향하여 믿음을 고백하십시오.

오늘 여러분의 인생에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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