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17일 주일설교문
[예수님의 제자로 산다는 의미 : 마8장 18-27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부화뇌동(附和雷同)”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뚜렷한 소신 없이 그저 남이 하는 대로 따라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그 길을 가야하는지? 왜 그렇게 행동해야 하는지?왜 그것을 꼭 사야하는지? 왜 그 영화를 봐야하는지? 남들이 다하고 다보고 다사니까 그냥 같이 덩달아 따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사람들의 신앙생활도 그와 같은 면을 갖고 있습니다. 가난함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교황이 한번 왔다 가니 사람들이 우르르 성당으로 몰려갑니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결코 카톨릭 교회는 역사적으로 가난해본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냥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이 좋아 보이면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 같습니다. 왜 그 길을 가야하는지, 그 길에서 무엇을 얻으려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 주님은 그 길을 보라는 것입니다. 무작정 자기감정에 이끌려 뛰어들었다가 쉽게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여정이 난항을 거듭하는 것은 출발점에서 자신의 기대와 믿음의 길에서 맞닥뜨리는 것에 큰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그 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볼 수 없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 점에서 마태복음은 참다운 제자도를 위해 우리의 흐트러진 초점을 예수님께 올바르게 맞출 수 있도록 도움을 줍니다.
잘못된 반응
마태복음 8장 1-17절을 통해서 드러난 예수님의 능력과 권위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께로 몰려들게 만들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이야 말로 그들 자신이 대망해왔던 메시야가 아닌가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열정적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의 반응을 예수님은 달가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 8장 18절을 보면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기를 에워싸자 갈릴리호수 저편으로 가기를 제자들에게 명하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피하셨을까요? 단지 사역에 피곤하셔서 그랬을까요? 예수님을 좇고자 하는 무리들의 관심이 제자도에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강력한 왕, 메시야가 나서서 로마 제국에 억압받고 있는 자신들을 해방시켜주기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셨지, 이 땅의 나라를 선포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군중의 환호성은 예수님의 진위를 파악하게 되면 언제고 식어버릴 반응이었습니다. 실제로 군중은 그들의 기대가 무너졌을 때 예수님에게서 차갑게 돌아섰습니다. 요 6:66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이것은 우둔한 이스라엘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청하는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 두 사람과 예수님을 좇아 배에 탔던 제자들을 통해 우리의 영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디든 따르리이다
마태복음 8장 19절 말씀을 보면 사람들을 떠나 부리나케 갈릴리 건너편으로 가려고 하시는 예수님께 한 서기관이 다가와 말합니다.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이것은 결코 쉬운 요청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과히 혁명적으로 율법의 틀을 깨고 계시는 예수님의 반대편에 선 자들입니다. 물론 이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는 서기관은 아니었지만, 비록 갈릴리라는 변방의 서기관이라고 해도 그는 소위 기득권을 갖고 있는 자였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여러 기적을 목격하고, 놀라운 말씀을 들으면서 그 권세에 탄복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결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점에서 이 사람은 환영받아야 할 인물입니다.
헌데 이렇게 제자가 되겠다고 자원하는 서기관을 예수님은 흔쾌히 받으시기보다는 예수님 자신이 지금 어떤 상황 가운데 있는지를 매우 부정적으로 말씀해주셨습니다. 20절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이것은 한껏 기대하면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결단하는 이의 마음을 짓밟아 놓는 말씀이었습니다. “네가 지금 어떤 일에 뛰어들고자 하는지 정말 아느냐? 이건 단순히 신나는 승리의 행진이 아니다. 따라 오면 죽을 고생하는 거야!” 그런 의미의 말씀입니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처럼 무소유에 자족하는 삶을 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이 생각처럼 그렇게 쉬운 길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름은 불확실한 길에 들어서는, 예수님과 운명을 함께하는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다른 랍비들을 따를 때처럼 그곳에서 배우고 사는 동안, 무언가 안락한 삶과 보상이 있을 것을 기대하는 마음에 대하여 자신의 뒤를 따르는 제자의 삶이란 그런 기대를 가질 수도 없는 삶이고,힘든 훈련의 여정이라는 사실을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어떤 기대를 갖고 따르고 있습니까? 참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제자의 삶을 살아가려고 결단하면 많은 영역에서 불편한 일이 벌어지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과는 반대편에 서 있기에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가려고 하면 모든 영역에서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그리스도를 좇음으로써 많은 것들을 대가로 치룰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려면 무엇보다도 우리의 가치관이 달라져야 합니다. 여전히 세상을 바라보고, 맘몬의 지배를 받고 산다면 결코 주님의 뒤를 따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치르는 대가도 물론 크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산다는 의미와 가치는 더욱 크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이 길을 갈 수도 있고, 갈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보시겠습니까?
너는 나를 따르라
이번에는 제자 중 한 사람이 건너편으로 가려는 주님을 잠시 떠나 개인적인 일을 마무리하고 돌아오고자 주님께 요청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는 일이었습니다. 21절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그 당시 유대 사회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아들은 장례를 치러야 하는 의무가 있는데, 그 의무는 너무도 막중해서 다른 어떤 일보다도 우선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흔쾌히 허락하실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복음서를 통틀어 가장 충격적인 말씀 중 하나였습니다. 2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이 명령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막되어 먹은 후레자식으로 만들 것입니다. 동방예의지국 대한민국에서 기독교는 불효막심한 종교로 전락되고 마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결코 가족 장례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부친의 장사를 먼저 치루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겠다는 제자에게 땅 위의 그 어떤 일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없음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주님을 따르기보다는 먼저 가서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허락해주실 것을 요구하는 제자에게 그의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깨닫도록 하신 것입니다. 장례는 다른 사람들이 대신 치룰 수 있는 것이지만, 제자로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우선순위에 밀리기 시작하면 그 다음 번에 따른다는 보장도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제자의 아버지가 실제로 돌아가셨는지 그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단지 노쇠하거나 어쩌면 병세가 악화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사람은 미래에 행할 의무를 이용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어느 정도, 아마도 몇 년 정도, 미루려 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제자가 되는 일을 뒤로 미루기 위하여 핑계 거리를 찾는 제자에게 예수님은 죽음의 일보다 생명의 일이 더 먼저 임을 생각하고 우선순위를 정하라고 엄중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른 계획이 무엇이건 제자도가 가장 우선시되어야 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모든 인간적인 충성들은 그 다음이어야 합니다. 충성을 요구하는 다른 것들이 우리의 주의를 끌려고 다툴지라도, 우리는 예수님을 좇겠다는 결단을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길만이 우리의 살 길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길은 전도서에서 말씀했듯이 헛되고 헛된 것입니다. 우리를 무의미함으로 이끌어갈 뿐입니다.
제자도의 위험성
그러나 분명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제자의 길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이지만 이 길을 간다고 해서 세상의 명예와 부가 약속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은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이곳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최고의 상급을 바라볼 것을 요구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주님께서 이곳에서의 삶을 방관하시지는 않습니다. 제자의 삶을 지켜주시는 예수님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8장 2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갈릴리호수 저편으로 가시기 위해 배에 오르시자 제자들이 따랐습니다. 구별된 소수의 제자들만이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곧 바로 문제가 발생합니다. 여기에서 마태는 풍랑을 만난 제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제자로서 예수님을 따름이 바로 고난과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24절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갈릴리 호수의 파도가 거세지면서 제자들은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편히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이 상황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난리통에도 곤히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을 제자들이 황급히 깨우며 외쳤습니다. 25절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모든 인간적 불안의 바탕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일렁이는 파도 속으로 뱃머리가 잠기며 찬 바닷물이 온 몸에 부딪쳐 올 때 그들의 심장도 멎는 듯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 중엔 어부출신들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뱃사람답게 풍랑을 이겨보려고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단지 모두 두려워하며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우리의 경력, 우리의 경험이 인생의 거센 풍랑을 이기도록 하는 힘은 결코 아닙니다. 제자들이 무슨 생각에서 예수님을 깨웠는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예수님께서 뭔가를 해주시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예수님은 잠에서 깨어나시자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26절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보통 정상적인 순서라면 먼저 급한 풍랑을 해결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풍랑은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출렁이는 파도 속에서 제자들의 부족한 믿음을 먼저 질책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단지 불안해했기에 혼난 것은 아닙니다. 일렁이는 거대한 풍랑을 볼 때의 종교적인 반응은 경외감과 공포, 혹은 바다의 신에게 드리는 두려움에 찬 기도일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제자라면 우리가 위기의 상황에서 가져야 할 참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거세게 몰아치고 있는 풍랑이 아니라 평온함 가운데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야말로 폭풍우조차도 명하심으로 잠잠케 할 수 있는 권위를 갖고 있는 주권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반응은 바로 이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은 세상 모든 불안을 이기게 하는 힘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런 믿음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그들 곁에 예수님께서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일렁이는 파도 앞에서 예수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와 같은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예수님은 책망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마태복음을 통해서 마태가 우리에게 조금씩 알려 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게 됩니다. 마태는 가버나움의 백부장처럼 바깥의 다른 사람들이 정확하고도 놀라운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에,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그분이 하시는 모든 일을 보고도 아직 그 믿는 자의 범주에 들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책망하시고 예수님은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습니다. 그러자 거친 바다가 아주 잔잔하게 되었습니다. 두려워 떨고 있던 제자들은 파도를 잠잠케 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놀라워했습니다. 27절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이제 사람들은 질문을 던지기 시작합니다. 이 사건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그들도 예수님을 치료자로, 랍비로, 또는 주님으로 여기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제자들이 예상한 정도를 크게 벗어났습니다. 예수님의 권위가 질병만이 아니라 자연계까지도 미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의 현 단계에서는 그 누구도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지만 모두가 그에게 깊이 이끌리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여기에서 마태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뒤로 미룬 채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그림을 조금 더 채워나갑니다. 마태복음 10장까지 이어지는 기적들을 통해 제자들이 점차 더 온전하게 예수님을 이해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마태는 오늘 우리도 “예수님은 대체 누구신가?”라는 질문을 지속적으로 던지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알고 예수님이 우리 인생의 주인으로 자리하실 때만이 예수님을 따라 제자로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서기관은 이상만을 추구하여 지나치게 열정적이고 적극적이었습니다. 어디든지 따라가겠다고 했지만 도처에 깔려 있는 어려움은 보지 못했습니다.반면에 장례를 먼저 치룰 수 있도록 요청한 제자는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영적인 일에 미온적이고 소극적으로 임하였습니다. 하지만 참 제자로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한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가장 우선되어야 하며, 세상적인 기대를 충족하는 길이 아니라, 고난과 자기 부인의 길이라는 사실을 먼저 인지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따름은 위험한 길입니다.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돈, 건강, 구원이 온다는 엉터리 가르침과 기독교는 전혀 관계없습니다.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세상적인 축복을 누리기 위해 주님의 뒤를 따르려한다면 결코 그 목적을 어느 누구도 달성할 수 없습니다. 또한 세상적인 일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버리지 않은 채 주님의 뒤를 따르려는 자 역시 예수님께 합당치 않은 자로 외면당하게 될 것입니다. 마 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이것들이 요구될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지금도 구원, 은혜, 축복을 말할 때는 좋아하다가도 세례, 헌신, 십자가, 자기부인, 고난, 제자도를 이야기하면 부담스러워하고 떠나버리곤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성도라면 예수님의 뒤를 따르기 위해 치러야 하는 고난과 희생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망설이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결단과 용기를 지녀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많은 고난과 희생을 감수하면 할수록,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감히 그것과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엄청난 상급과 축복을 누린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와 함께 오늘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 아들로, 그리스도로 믿고 제자로서 살아갈 때 우리를 위협하는 모든 폭풍 앞에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 된 우리를 든든하게 지켜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산성이시고, 요새가 되어주시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그가 무엇을 이루실지에 대한 완전한 지식이 있을 때, 우리는 예수님을 온전하게 신뢰하고 그 분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위험과 대가를 치르게 될지라도 주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에 조건 없는 신뢰와 충성으로 따르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를 향해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즉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됩시다. 폭풍 가운데서도 우리를 든든하게 지켜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우리와 늘 함께 할 것입니다.
'주일예배설교원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귀신을 쫓아내시는 분은 누구신가? 마 8장 28절-34절 (0) | 2015.05.31 |
---|---|
복음이 주는 자유와 세우심 : 행 26장 14-18절 (0) | 2015.05.24 |
예수님은 누구신가? 마 8장 1-17절 (0) | 2015.05.13 |
부활신앙으로 살아가라 : 고전 15장 50-58절 (0) | 2015.04.19 |
누구를 따라 살고 있습니까? 엡 5장 1-2절 (0) | 2015.03.1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