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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5장8절

by 최수근 2014. 7. 27.

2014년7월27일 주일설교문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 마5장8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어제 저녁 전에 알던 성도님 한 분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요즘 교회생활에 회의가 든다는 것입니다. 이유인즉슨 신앙의 본을 보여주어야 할 위치에 있는 성도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행동하고 말하고 결국 그로 인해 시험에 들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이분들이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고, 봉사도 하고, 말씀공부도 하고, 기도도 열심히 합니다. 하지만 왜 전화를 거신 성도님의 눈에는 그 분들의 믿음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보였을까요? 우리들이 처한 많은 믿음의 문제들을 볼 때 실은 외적인 문제보다는 마음의 문제인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교회 안에서 사람들을 객관적으로 관찰해볼 수 있는 것이 겉으로 보여 지는 지표들이다보니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외부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면서 내적인 것에는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외적인 것들에 집착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처럼 무엇을 만졌는가, 무엇을 먹었는가, 무엇을 말했는가, 어떻게 예배를 드렸는가와 같은 외적인 것들을 중요하게 여기고 또 그것들에 따라 다른 사람들을 판단합니다. 그래서 이런 점검 사항들을 잘 지켰다고 생각하면 스스로를 꽤 신앙적으로 괜찮은 사람으로 여겨 그것을 인정받고자하고, 다른 이들을 볼 때도 그 기준에 따라 사람들을 판단하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외적인 경건함을 추구하다보면 매우 실제적인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종교적 형식주의의 지배를 받게 될 때, 신앙생활에서 외적인 것들은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상대적으로 마음의 생각들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은 자기 마음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해서입니다. 그러다보면 여전히 마음속에는 분노와 냉소가 자리 잡고 있을 것인데, 그것들을 얄팍한 종교행위라는 보자기로 살짝 덮어 놓은 꼴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언제고 마음의 문제는 우리들의 발목을 잡고 말 것입니다. 사람의 문제의 핵심은 바로 마음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의 위험성을 매우 분명하게 바라보셨고, 사람들이 외적인 것들에만 초점을 맞추거나 그들의 믿음이 피상적인 수준에만 머물러 있을 때 그들에게 반복적으로 도전을 하셨습니다.

마음이란

헬라어로 마음은 카르디아’, 히브리어로는 레브라는 말을 씁니다. 마음은 사람의 존재와 인격의 중심으로서 지성과 의지와 감정의 근본원천입니다. 사람의 전인적인 사고와 행동을 주관하는 곳입니다. 또 한편에서 마음은 항상 우리의 모든 문제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15:19). 이렇게 마음은 양면성을 갖고 있습니다. 마음을 어떻게 지켜 가느냐에 따라 살기도 하고 죽을 수도 있기에 잠언423절에서 모든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말씀한 것입니다. 마음의 중요성으로 인해 예수님은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과정에서 특별히 마음을 매우 강조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이 무너지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생활도 함께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

예수님께서 여섯 번째 복으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라는 말은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 걸까요? 하나는 위선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 것도 숨겨진 것 없이 진실 되고 신실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두 마음을 품지 않은 것이죠. 그러기에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그의 진실 됨으로 인해 공적인 것이건 사적인 것이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투명합니다. 그러니 그들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기만하거나 속내를 숨긴다거나 비열할 수가 없습니다. 겉과 속이 같습니다. 여기에서 늘 문제가 되는 것은 나누어진 마음입니다. 마음의 한쪽 편에서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고자 하나 또 다른 쪽에서는 세상의 것들을 원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이 마음을 감추기 위해 위선이 나오고, 속임수가 나오고, 간교함이 배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또 마음이 청결하다는 말은 정화된’, ‘흠이 없는이란 뜻으로 깨끗함이라는 개념에 초점을 맞출 수 있습니다. 내적인 순결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청결하다고 해서 그 안에 죄가 전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당대의 의인이라고 한 노아는 술 취해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아내를 팔고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했습니다. 온유한 사람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며 자기 의를 드러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 욥은 고통 중에 그의 태어난 날을 저주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종 엘리야는 하나님의 권능을 보고서도 자기를 죽이고자 하는 이세벨이 무서워 도망하여 죽기를 간청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목숨을 연명코자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바울도 로마서 7장에서 고백하기를 그가 선을 행하기를 원할 때 악이 그와 함께 하였고(21), 그의 지체 속에서 한 법이 그의 마음의 법과 싸워 그를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아가려 한다고 했습니다(23). 그는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겼습니다(25). 그러나 그 약함 속에서도 저들은 끊임없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갈망하며 살았습니다. 이런 믿음의 조상들을 보면 우리 하나님은 결코 완벽한 자를 원하시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의 마음속에 있는 불순함을 깨닫고 괴로워하며,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고자 정결한 마음을 창조해 달라고 매어달리는 우리들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와 함께 우리의 마음이 나누이지 않고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는 마음을 기대하십니다.

왜 마음의 청결을 요청하실까?

왜 예수님은 이와 같은 마음의 청결을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요청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내적인 청결을 강조하신 까닭은 그 당시 바리새인들의 형식주의 때문일 것입니다. 경건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의 진실함을 원하신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외적인 거룩함에 만족함으로 종교의 외형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들은 너무나 쉽게 내적인 순결함을 무시하고 대신에 외적인 행위들과 과정들을 중심으로 믿음을 만들어가고자 했습니다. 결례법에 따라 겉은 열심히 닦았는데 속사람은 옛사람 그대론 것입니다. 겉만 보면 그들은 나무랄 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더욱 중요시 여기고 있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그들은 외면했고, 그 과정에서 그들의 마음을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열심히 종교생활을 하고도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지 못한 겁니다. 그것은 결코 외적인 청결을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전히 가슴 한 쪽에 답답함이 남아 있었기에 세례 요한에게도 와보고, 예수님에게도 기웃거려보는 겁니다. 그런 저들을 예수님은 통렬하게 꾸짖으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 도다.”

겉과 속이 한결같은 삶을 사는 이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상황에 따라 다른 가면을 쓰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이것이 바리새인들에게서 나타난 위선의 진수입니다. 그들 속에 진정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가 없었기에 예수님은 그들을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하신 것입니다. 저들이 인간의 내면을 무시한 결과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마음이 타락과 죄의 결과로 악하고 부패해졌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179절에서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의 문젯거리는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마음을 강조하시고, 또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날 우리들의 신앙이 궁극적으로 교리의 이해와 지성의 문제만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어떻게 가져가느냐에 달려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동시에 교리와 지적 이해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에 대하여 지적인 동의에서만 끝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신앙적으로 위험한 일인지 모릅니다. 신앙은 물론 들음에서 나지만 그것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와 삶의 열매로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계명을 마음, ‘레브에 새기라 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강퍅한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정결케 됨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그게 말씀의 능력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외형과 행위보다 마음을 더 강조하신 까닭은 바리새인들이 항상 생활과 의에 문제를 단지 행위와 윤리와 품행의 문제로 격하시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신앙은 행위와 외적 품행의 문제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우리 마음의 상태가 어떠한가라는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그것은 아무리 겉으로 화려하게 드러나 보여도 부정하고 불결하거나 더러운 죄로 물든 마음을 가지고서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편24:3-5에서 다윗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기준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우리가 빠짐없이 교회에 나가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성경을 암송하여도 우리의 마음이 여전히 죄로 물들어 청결하지 못하다면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고 그 분 앞에 설 수 없습니다.

마음의 청결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물론 인간의 마음은 본래 전적으로 만물보다 부패하고 타락하고 거짓되어 심히 사악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시편515절에서 시인도 고백하기를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하였습니다. 그런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청결하게 할 수 있습니까? 사도행전 159절에서 우리의 마음이 믿음으로 깨끗하게 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누구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마음을 흠 없고 순결하고 온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깨끗하게 씻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청결하길 원한다면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제사를 자기 자신을 위한 것으로 여기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주께서 이루신 모든 것을 자기의 것으로 믿고 받아들이면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믿음입니다. 그와 함께 지속적으로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옛사람의 존재를 부정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 수 있도록 성화의 과정 속에서 우리 마음의 청결함을 이루어주십니다. 이처럼 하나님만이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죄악 된 마음 때문에 언제나 애통하며,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요한일서19절에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육만으로는 선한 사람을 만들 수 없습니다. 사람은 최고의 교육을 받고서도 철저하게 악인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중심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지적 훈련만으로는 사람을 바로 잡을 수 없고, 또 환경을 개선하려는 여러 수고만으로도 개선될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큰 비극입니다. 지금 세상에 수많은 이들의 문제도 이와 같은 단순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길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마음에 있고, 마음은 절망할 정도로 악하고 부패하였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을 잡지 못하는 한 다람쥐 쳇바퀴 돌듯 같은 자리를 피곤하게 맴돌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매일 마음을 청결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해야 할 영적 의무입니다. 이를 위해 가난한 심령으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죄를 진심으로 고백하며 애통해하고, 의의 길을 걷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내적 청결을 위한 일상의 행동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반복적인 청소를 하듯 마음의 청결을 위해서도 반복적으로 영적인 청소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고 강퍅해진 마음은 우리를 가로막아 설 것입니다.

그들이 복이 있나니

예수님은 이처럼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음이 죄로 가리어진 상태에선 결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단지 교회 안에서 보는 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체 하는 거예요. 마음이 청결한 자만이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죄악 된 인간으로 하나님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장애물을 뛰어넘어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렇다면 어찌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것을 우리가 시각적인 의미에서만 초점을 맞추다보면 전체적인 의미를 놓칠 수 있습니다. ‘보다라는 말은 총체적인 경험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 하나님과 아는 사이가 되는 것,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점에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대상은 볼 수 없습니다. 본래 죄악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지만 우리의 전인격이 다시금 회복됨으로써 하나님과 친밀하게 영적으로 교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처음 아담과 하와와 함께 동산을 거닐 던 모습처럼 하나님과 교제하며 동행하는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와 함께 하나님은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방식으로 자신을 친히 내보여 주십니다. 그래서 온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해 있음을 보게 하시는 거예요. 그로 인해 마음이 청결한 자들은 만물을 지혜로 다스리시고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는 만물의 창조자로서 하나님을 느낄 수 있고, 그와 같은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신앙의 노래를 부를 수 있다면 우리들의 삶은 결코 두렵거나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풍성하게 느껴지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이런 믿음으로 인해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손이 항상 좋은 것을 주시려고 그들 위에 드리워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말씀을 통해서 언약의 하나님을 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보게 되는 거예요. 그와 함께 하나님을 누리는 통로의 완성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회복되고 매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활짝 열려 있지만 어느 순간 죄가 들어가면 하나님과의 친교가 깨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특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마음을 청결하게 유지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요”(16:8)라고 말할 수 있도록 내적으로 정결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보고자 하는 갈망

비록 우리가 불완전해도 지금 우리는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그 분을 보고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오늘도 마음을 깨끗하게 하기 위한 영적인 훈련을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청결함을 말하면 인기를 얻을 수 없습니다. 아마도 뭐 그렇게 너만 잘났냐고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볼 것입니다. 이런 세상의 요구에 너무 민첩하게 행동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자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정결함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나누어진 마음이 아닌 온전하고도 성한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보고자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영광 가운데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지고의 비전을 깨닫고 우리의 걸어가야 할 길을 더욱 확신하며 달려가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더욱 더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광휘 가운데로 우리를 이끌고 들어가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앞에 하늘의 잔치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알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기다림의 시간이 아무 가치도 없고, 부끄럽게 여기게 될 일들로 가득차서는 그 순간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부끄러운 만남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한 가지 확신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활동하시며 이를 위해 우리를 준비시키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가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과 기도로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는 모든 자들의 마음을 정결하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를 생명가운데로 인도 하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인생의 문제들과 잡다한 일들에 매어달려 바둥거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영광과 경이로움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마음의 청결이라는 목표를 우리 존재 중심에 두면서 하나님께 나아간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깨끗하게 하심과 용서를 구할 때. 이 복은 우리에게 임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 그 이상으로 하나님을 충만하게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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