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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도 : 마6장9-15절

by 최수근 2014. 10. 26.

2014년10월26일 설교문

[주님의 기도 : 마6장9-15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하나님께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셨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실은 기도하는 일에 부담감을 갖고 있습니다.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기도를 어떻게 채워가야 할지 모르다보니 몇 마디 기도하고 나면 더 이상 기도할게 없습니다. 기도가 이렇다면 점점 기도의 자리는 멀어지고 맙니다. 이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의 특권과 기도의 능력을 주셨는데 말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에게도 기도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아침과 정오와 일몰 때에 세 번씩이나 개인 기도를 드려야 했습니다. 바리새인, 서기관 같은 종교지도자들이야 그렇지 않았겠지만 보통 사람들에게 매일 반복되는 기도의 시간이 그리 자유스럽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래서 통상적으로 그들은 카디쉬’, ‘쉐모네 에스레’, ‘쉐마와 같은 기도문을 사용했습니다. 하루 세 번 매일 기도할 수 있도록 모범 기도문을 제공한 겁니다. 그 외에도 한 사람의 스승이 있으면 그를 따르는 제자들은 스승이 가르쳐주는 기도로 기도했습니다.

주의 기도

하지만 예수님은 복음서 어디에 보아도 유대교의 관습을 따라 하루에 세 번 기도했다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사역을 마치시거나 혹은 새벽녘에 수시로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기도에 있어서 독립적이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도 보면 스승이신 예수님이 간절히 기도함에도 불구하고 그 기도에 동참하지 못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에야 기도의 문이 열렸고, 오순절 성령강림까지 뜨겁게 기도하게 됩니다. 그렇게 기도에 부담감을 갖고 있던 제자들이었기에 어느 날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런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오늘 우리 기도의 영원한 모범이 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기를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대로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 정신과 내용과 순서상의 방법에 대한 모범적인 제안을 하신 것입니다. 그 점에서 주기도문은 우리가 지속해야 할 기도의 틀입니다. 건물의 뼈대와 같은 역할입니다. 예수님께서 똑같은 말로 기도하도록 가르쳐주신 것은 아니지만 초대교회도 그랬고, 지금도 많은 이들이 주기도문을 그대로 따라서 기도하곤 합니다.

하지만 주기도문을 의미 없이 그냥 글자대로 외워 수천 번 기도한다면 수리수리마수리처럼 주문처럼 끝나고 말 것입니다. 이 기도는 우리가 입으로도 말하지만 생각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이루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는 나의 독백이 아닙니다. 나의 간구함을 들어주시는 분이 내 앞에 계시고 그 분께 나의 언어로 나의 기도를 채워가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 분이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주기도문의 모든 내용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의 첫머리를 아버지를 향한 외침으로 채우셨습니다.“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람어로 아바라는 말입니다. 예수님 외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그렇게 부른 적이 없습니다. 당시 아바라는 말은 어린 자녀들이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하던 호칭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해 감히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자녀로서의 권리를 주셨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가족으로서의 신뢰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분명히 가르치십니다. 기도는 사람을 향한 것도, 자기 자신을 향한 것도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에서 하늘에 계시다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와 멀리 계시다거나 분리되어 계심을 뜻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하늘은 하나님이 전적으로 다스리시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왕국을 뜻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늘은 우리가 사는 땅과 연하여 있습니다.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오늘도 우리 가운데 계시기에 우리를 알고, 우리에게 관심을 갖고 있으십니다. 우리의 기도에 언제나 들을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하나님을 향해 아빠! 외치며 기도하도록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깨우는 외침이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 하나님을 부름으로서 그 분을 향한 나의 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와 함께 그 분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현존 안으로 이끌어 들인 후에 하나님과 그 분의 영광에 대해 세 가지를 기원하게 하시고, 그 후에야 우리 자신과 우리의 필요에 대해 세 가지 기원을 드리도록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순서가 중요합니다. 먼저 우리 자신에게 관심을 가진 나머지 하나님의 현존 속으로 뛰어들어 우리가 필요로 하는 쇼핑목록을 그분께 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우선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한 첫 번째 간구로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향해 당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소서라는 간청인데, 그 간청이 없어도 하나님은 이미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라고 기도하도록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우리 자신의 삶에서, 교회에서, 세상에서 하나님께 응당 돌려져야 할 영광이 제대로 돌려지기를 열렬히 원하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와 함께 그 간구함 속에 주님! 우리가 당신을 가장 중요한 존재로 삼게 하소서.”라는 우리의 고백이 담겨져야 합니다. 이것은 내 인생 최고의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기를 소망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우리들의 삶의 모든 측면에서 그 분을 거룩하게 하는 책임을 다해야만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기도가 출발하지 못하면 기도는 언제나 우리 자신에게 집중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더 이상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 마음속에 아무렇게나 떠오르는 생각과 두려움과 갈망으로 변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주문이 되고, 넋두리로 전락되는 것입니다.

그 점에서 주의 기도는 구약에 야베스의 기도와 다릅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대상4:10) 이것은 잘못하면 기도를 마치 소원을 이루어주는 마법 장치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필요가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그러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한 두 번째 간구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구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이 간구는 이 땅을 하나님이 통치하시도록 하나님께 촉구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과 함께 이미 이 땅에 임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이 기도는 세상 사람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확장되어, 하늘의 영광과 아름다움이 이 땅에서도 실현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다스림을 위해 기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하나님의 통치와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타락한 삶을 통해 가리어지고 있습니다. 그 점에서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회개를 위해, 또한 주님을 진실로 따르기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오히려 하나님나라를 가로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세 번째 간구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10b“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만약 제자들로서 우리가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통치를 보고자 열망한다면 우리들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데 무관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이 우선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마5장 첫머리에서 팔복을 말씀하신 후에 517-48절에서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은 바리새인들의 배타적인 의가 아니라 더 사랑하고 더 화평하게 하는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삶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 이 땅에서의 삶이 하늘에서의 삶에 더 가까워지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땅에 머물러 있는 한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중심적인 세속 문화의 유혹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 자신의 하찮은 이름에 대해, 우리 자신의 하찮은 나라에, 우리 자신의 어리석은 하찮은 뜻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세 가지 기원을 통해서 우리의 가장 우선적 관심사가 우리의 이름과 나라와 뜻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에 있어야 함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제자들은 오직 이 세 가지 우선적 사항을 먼저 기도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필요로 옮겨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위한 간구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아주 인상적으로 간결하게 가르치십니다. 먼저 예수님은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11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여기에서 일용할 양식이라고 번역되는 단어 에피우시오스라는 단어는 거의 쓰이지 않는 단어입니다. 아마도 이 말은 하나님이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용할 만나를 주신데서 온 것이 아닌 가 추정됩니다. 모세는 그들이 하루에 먹을 수 있을 만큼만 거두어야 하며, 하나님이 다음 날 필요한 양식을 더 주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고, 하루에 필요한 것 이상의 분량을 축적해 두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서 먹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공급자이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그 점에서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는 그날의 기본적인 필요를 위한 기도이며, 하나님의 채우심을 위한 기도이자 공급자이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기도입니다. 그 신뢰가 무너지면 그 때부터 내가 뭔가를 해결하려고 시도합니다. 그것은 출애굽 당시 광야백성과 같은 삶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양식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포함합니다. 그리고 일용할이란 단어는 우리가 구하는 것에 대한 계속적인 공급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주 앞에 서는 날까지 우리의 공급원이신 하나님께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님을 하나님 앞에 날마다 겸손히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자신의 기본적인 필요들을 위해 기도할 뿐 아니라 더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채우심을 위해 중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기도는 생명을 살리는 기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위한 두 번째 간구는 죄사함과 용서에 대한 것입니다.

12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우리는 용서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양식이 신체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죄 사함은 영혼의 생명과 건강에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죄 사함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결코 완전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창조된 목적에 부합될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영원히 즐거워하며, 그 사랑이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어려운 이웃들에게로 차고 넘치도록 할 수는 있습니다. 영광스럽게도 그것은 가능하지만 우리를 용서해 주옵소서!’라며 통회 자복하는 마음과 진실함으로 기도하지 않으면, 그래서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피로 정화되기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이 두 번째 간구에서 약간의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주면 우리도 용서받을 권리를 얻게 되는가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12절 말씀과 여기에 부연 설명된 14-15절은 우리가 용서한 횟수에 비례하여 하나님의 용서가 조금씩 주어진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14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나님께서 만약 너희가 너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나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까다롭게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오히려 하나님의 자비를 받는 것을 기대하기 전에 우리 마음의 완악함을 참으로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열고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용서하실 때에도 하나님을 향해 우리의 마음을 열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가 수포로 돌아가 버리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기 바란다면, 우리는 그들을 용서할 수 있고 또 용서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무한한 사죄의 은총을 받은 인간은 거기에 대한 반사작용으로 형제의 죄를 용서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한 행위가 있을 때만이 하나님께서 내 믿음을 인정하시고 나의 예배를 받으시고 완전한 구원을 허락하시기 때문입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세 번째 간구는 사탄 마귀와의 영적 싸움에서 이길 수 있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13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인간으로 존재한 우리는 매일 유혹에 직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기치 못한 유혹들이 우리의 방심을 틈타 우리를 곤경에 처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매일 매순간유혹에 맞설 수 있는 힘을 주소서.”기도해야만 합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힘만으로 유혹에 맞선다면 유혹은 점점 더 커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주의를 돌린다면 이 싸움을 잘 싸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악에서 구하여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또한 우리는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이 땅에 모든 악이 사탄에 의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전투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는 예수님은 그들에게 아버지의 능력을 날마다 구하라고 명하신 겁니다. 아버지의 그 능력만이 그들을 시험에 들게 하는 악한 자의 유혹에서와 그들을 죄짓게 만드는 악한 자의 권세에서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당신의 나라가 확장되며,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우리의 필요가 공급되며, 우리의 죄가 용서되고, 우리의 시험이 극복되기를 원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기도입니다. 모두 57개의 헬라어 단어들은 하나도 무익하게 반복되지 않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고 모든 이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순종토록 하셔서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시도록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를 예수님께서 처음 우리에게 전하신 이래로 이천년이 지났고 이 기도는 아직 응답되지 않은 채로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지체에 대한 해답은 마태복음1228절에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은 종말의 일이지만 그 미래의 사건에 대한 보증은 현재에 주어진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도래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했다면 이 기도를 드리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그 나라의 징표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참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당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실 수 있으며, 우리는 우리 주변의 세속적인 세상과는 다른 믿음의 행진곡에 발맞추어 나감으로써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라는 직접적인 기도에는 내가 동터오는 하나님 나라의 효과적인 표지가 될 수 있도록 당신의 뜻이 내 안에서, 나를 통하여 나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간접적인 기도가 내재되어 있는 겁니다. 가난한 자들을 보살피고, 우리에게 해를 입히는 자들을 용서하고, 유혹을 물리침으로써 하나님의 성품을 증거 할 때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 기도가 여러분 자신의 간절한 기도가 되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정확히 이 기도문대로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이런 방식으로 기도하라고 하셨음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의 기도에 나의 삶과 연관된 말들로 채워야 합니다. 간절한 이 소망들을 나의 언어로 채워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위선적인 것과는 다르게 진지하고, 기계적인 것과는 다르게 사려 깊은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 점에서 주기도문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모범으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진실 되게 기도해야 합니다. 기계적으로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깊이 하나님을 묵상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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