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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설교원고

분노를 멈추라: 마5장21-26절

by 최수근 2014. 8. 31.

2014년8월31일 주일설교문

[ 분노를 멈추라: 마5장21-26절 ]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분노가 만연한 사회

오늘 우리 사회에 대화를 통해 문제를 풀어나가는 지혜가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사람들을 보면 너 한 번 내게 걸려봐라!”하는 마음으로 언제고 건드리기만 하면 폭발할 듯 스탠바이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서로 삿대질하고, 싸우고 힘으로 풀어가려고 합니다. 자기 뜻에 맞지 않으면 내치기 일쑤입니다. 자기만 지고지선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상대방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자기편에 줄을 서지 않는 이들은 분노의 대상이 되어 버립니다. 이와 같은 악순환을 풀어갈 수 있는 길은 없는 걸까요?

대게 문제가 커지는 경우를 보면 분이 가득 차 있는 사람을 공감해주고 만져주고 위로해주면 수그러들기 마련인데, 우리 사회는 오히려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해주기는커녕 모해하고 본질을 왜곡시키고 하니 열을 더 받는 것입니다. 이처럼 분노가 만연한 사회를 향하여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우리들이 어떻게 대처해가야 할지 하나님 나라의 의에 대해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통해 그 길을 찾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521-48절까지에서 예수님은 여섯 가지 구체적인 상황을 예로 들면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선을 의의 행위만을 강조하는 전통적인 의인 십계명과 대비하여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흔히 접하는 상황에 대한 양자 대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사는 이들의 내면의 성품과 마음이 어떠해야 하는지 확연히 볼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을 통해서 예수님이 의도하신 바는 무엇일까요? 바로 자기의 의를 드러내고자 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가 무엇인지를 말씀하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더 나은 의를 여섯 개의 주제인 분노 간음 이혼 맹세 보복 원수 사랑의 주제로 나누어 구체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본문인 21-26절 말씀은 십계명의 제육 계명인 살인하지 말라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계명을 주신 목적은 생명존중에 있습니다. 단순히 살인이라는 행위에 국한 된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제육 계명을 살인자의 행동에만, 인간의 피를 흘리는 행위에만 적용하려고 애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실제적인 살인만 범하지 않는다면 이 계명을 지켰다고 생각했습니다.

분노하지 말라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견해와 다르셨습니다. 21-22내가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예수님은 그 금지에 대한 적용이 훨씬 더 광범위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해치는 행동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죽게 하는 감정과 말까지, 살인뿐만 아니라 사람을 향한 분노와 멸시와 욕설까지도 제육 계명을 범하는 것이라 하셨고, 심판의 대상에 포함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토록 강경한 발언을 하시는 이유는 이것이 본래 계명의 목적이고, 또한 분노만으로도 한 인격을 충분히 죽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악행을 그 심령의 뿌리로 더듬어 올라가면 일종의 분노가 얽혀 있는 경우를 비일비재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합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분노를 통해서 형이 동생을 살해하는 불행한 결과를 보았습니다. 그 이후 이 땅에 단순히 분노로부터 시작된 수많은 살인이 있어왔습니다. 분노가 비극의 출발입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의를 향한 최우선의 기본 단계로 제시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 안에서 분노와 멸시의 제거입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제거하지 않고는 대부분의 문제들이 해결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회문제들이 여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분노로 상한 자아

왜 사람들은 분노를 산더미처럼 품고 다니는 걸까요? 맨 처음 자신을 분노케 한 대상뿐만 아니라 옆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직간접적으로 해를 입히며 많은 경우 자신의 삶과 건강과 행복에도 치명적 영향을 주는 분노를 품고 다니는 걸까요? 분노에 빠지는 이들은 자신이 입은 상처를 정도 이상으로 부풀리곤 합니다. 아예 다량의 아드레날린 분비에 중독되어 분노가 솟구칠 때 외에는 자신이 살아 있음을 제대로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반복적으로 내면에 품은 분노는 그 자체로 인간의 인격과 삶을 붕괴시킬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분노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간접 분노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반드시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출되어야만 세상의 독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를 분노에 내어줄 때, 말할 것도 없이 그 악은 순식간에 비참한 결과를 봇물처럼 쏟아 내며 나아가 모든 피해자의 마음과 몸에 또 다른 분노와 자괴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요즘 군내에서 동료병사를 향한 총기사고가 늘어나고, 자살이 늘어나는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특히 미국에선 직장 내에서 분노와 멸시로 인해 일어나는 살인으로 무고한 이들까지 매년 수천명이 죽고 있어요.

그런 상황 속에서도 자신이 뭔가 영향력을 쥐고 있다고 하는 오늘의 지도자들 중에는 사회악에 항거하려면 분노란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 앞장서서 부추기고 있습니다. 절망과 분노야말로 정의를 위한 싸움의 필수요소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게다가 분노와 원한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하게 옹호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노로 되는 일도 없고 분노가 없어 악화되는 일도 없습니다. 오히려 분노에 깔려 있는 자기 의가, 상대의 분노와 자기 의만 더욱 유발시킬 뿐입니다.

해답은 분노를 품는 것이 아니라 인내와 사랑으로 잘못을 바로 잡는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로서 분노를 품고 키우는 것은 마귀로 틈을 타게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그 틈을 살릴 것이고 그 대가는 지옥이 될 것입니다. 426-27절에서 말씀합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우리 안에서 분노가 지배하는 한 그 악순환은 끝이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분노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게 만듭니다. 120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물론 모든 분노가 다 악한 것은 아닙니다. 언제나 거룩하고 순수한 하나님의 진노에서 그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타락한 인간들도 때로는 의로운 분노를 느낄 수 있습니다. 루터는 그것을 사랑의 분노, 누구에게도 어떤 악도 바라지 않는 분노, 사람에게는 친절하지만 죄에는 적대적인 분노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절제해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것을 빌미로 우리 영혼이 마귀에게 틈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멸시하지 말라

이렇게 형제에게 노하지 말라고 하심과 동시에 예수님은 형제를 라가라고 부르지 말라고 또한 경고하셨습니다. ‘라가라는 말은 상대방의 지성을 모욕하는 것으로 머리가 빈자라는 의미입니다. ‘멍청이’, ‘멍텅구리’, ‘바보혹은 얼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람어 라가는 예수님 당시에 상대를 경멸의 대상으로 몰아붙이며 멸시의 표현으로 사용되던 말입니다. 그 점에서 라가라고 부르는 행동은 상대방을 멸시하는 행동입니다.

멸시는 고의로 상대를 깎아내리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멸시는 삶 속에 분노보다 은연중에 더 만연해 있습니다. 그래서 더 무섭습니다. 멸시의 의도와 결과는 언제나 상대를 배제시키고 밀어내고 따돌려 소외시키는 데 있습니다. 그 점에서 멸시는 분노보다 더 심하게 사회적 유대관계를 깨뜨립니다. 누군가를 깎아 내리거나 치밀하게 소외시키는 일은 인간 생활에 언제나 있는 일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공동체 안에도 있습니다. 일단 배제된 이들은 더 심한 멸시의 표적으로 당연시 됩니다. 일단 멸시하는 마음이 들면 최초의 분노가 정당화되면서 세력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멸시는 그 자체로 악합니다. 존재 자체로 인간의 영혼을 고사시킵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독버섯처럼 자리 잡고 있는 왕따의 문제도 멸시에서 시작됩니다.

분노와 멸시는 이 땅의 쌍둥이 재앙입니다. 두 악한 감정에 탐욕과 성욕까지 한데 어울리면 그야말로 치명적인 독소를 뿜어내며 인간 실존을 위태롭게 합니다. 분노와 멸시의 실체를 바로 알면 역사와 삶이 우리 앞에 끝없이 쏟아 내는 인간의 비극의 실체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비극은 분노와 멸시를 택하는 이들의 의지적 결정이 빚어낸 당연한 결과일 뿐입니다. 전쟁터마다 자행되고 있는 인종청소가 그렇습니다. 이와 같은 분노와 멸시의 뿌리를 제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악의 나무를 말라 죽게 하는 길입니다. 바울이 분노를 벗어 버리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3: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니라.”

미련한 놈

이처럼 예수님은 살인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내면의 악을 말씀하시면서 점진적 단계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십니다.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이 말씀에서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것은 특유의 섬뜩한 멸시와 살벌한 분노를 한데 담아 미련한 놈이라고 쏘아붙이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분노나 멸시 자체보다 피해가 훨씬 큽니다.

성경이 말하는 미련한 놈이란 요즘 말로 가장 근접하게 표현한다면 개XX XX놈 정도가 될 것입니다. 중요한 일을 순간 망쳐 놓았거나 주행 중에 갑자기 앞으로 끼어드는 운전자한테 흔히들 임택트있게 날리는 말입니다. 게다가 성경에서 미련한 자란 어리석은 고집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태도, 그리고 지각 있는 사람들이 지향하는 모든 것에 역행하는 자세를 총칭하여 이르는 말입니다. 완고하게 비뚤어져 반항하고 알면서도 악을 행하여 해를 자초하는 자입니다.

이런 의미로 누군가에게 미련한 자라고 딱지를 붙이는 것은 참으로 파괴적입니다. 그 안에는 분노와 멸시의 모든 악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그런 언어폭력은 한 인생을 쉽게 죽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 가해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야 마땅하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남들을 그런 태도로 대하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의와 자세로 살아간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물론 분노와 멸시가 살인이라는 궁극적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살인과 진배없습니다. 요일3:15“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분노와 멸시와 모욕은 방해되는 존재를 제거하려는 욕구를 나타내는 추한 증상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생각, 표정, 말은 모두 우리가 감히 입 밖에 내어 말할 수 없는, ‘그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마음으로부터 악한 바람이 불고 있기에, 그 바람이 결국 죽게 만드는 치명타가 되기에 바로 제육 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심판

하지만 랍비들은 제육 계명을 위반하는 경우는 살인뿐이라고 가르쳤고, 살인에 대한 벌도 살인이라는 결과에 대한 형벌 만임을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유 없이 노하는 자마다 똑같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고, 형제를 모욕하고 멸시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라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두 경우 모두 예수님은 범죄의 성질뿐 아니라 심판의 성질도 확장하셨습니다. 분노와 모욕이 살인에 해당할 뿐 아니라, 그로 인해 우리가 받게 되는 벌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이 모든 말씀이 지나치게 심각한 것으로 느껴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분노에서 멸시를 거쳐 언어의 모독으로 발전되는 이 세 가지 금기를 통해 예수님이 강조하고자 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소중함입니다. 인격의 가치를 드러내 보이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소중함은 분명 살인을 범하지 않는 것만으로 제대로 실현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감정, 언어까지 절제되고, 우리의 성품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모습을 갖추어가기 시작할 때 상대에 대한 소중함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선악 간 행동의 근원이라는 좀 더 깊은 차원에서 접근하고 계십니다. 우리 존재의 참 모습,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우리도 공유하여 그분의 삶과 조화를 이루게 될 그 사랑 속으로 우리를 깊이 이끌어 가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 차원에서 변화되지 않고는 아무도 천국의 의미에서 의로울 수 없습니다. 물론 그 차원이 변화될 때 부당하게 분노하지 않는 것, 멸시하지 않는 것, 남들을 개xx라고 부르지 않는 것 등의 문제는 자동으로 해결됩니다.

부당하게 화내지 않는 다는 계획만으로는 이웃 사랑에 이를 수 없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그런 계획을 의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십계명처럼 율법은 행동만을 다루기 때문에 그 자체로 앎이 필요하고 선하고 아름답다 해도 행동의 근원인 인간의 마음에는 절대 이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321“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율법이 참으로 귀한 것이지만 율법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능하신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의 관계라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화해하라

예수님께서 보이신 의에 대한 옛 가르침과 천국의 의인 첫 번째 대비에서 분노와 멸시의 위험성이 지적된 것은 최종 단계를 향한 기초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그 분의 놀라운 그러므로가 나옵니다. 이 말은 우리를 단순한 부정과 금기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을 향한 놀라운 긍정적 관심으로 이끌어가는 중요한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23절에서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방금 명확히 말씀하신 그 원리들에 대한 실제적 적용을 제시하시기 위해 일상에서의 상황을 그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논지는 만일 분노와 모욕이 너무나 심각하고 너무나 위험하다면 그것을 피하고 가능한 한 빨리 조처를 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 나라에서 그분께 그토록 소중할진데,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긍정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천국의 삶에 합당한 자가 될 것인가? 율법으로는 절대 이를 수 없는 그 태도가 두 가지 예화를 통해 제시됩니다.

첫 번째 실례는 23-24절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성전에 가는 상황이고, 두 번째는 25-26절로 고발자의 고발에 대답하기 위해 법정에 가는 상황입니다. 이 예들을 조금 더 현대적인 모습으로 바꾸어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만일 네가 교회 안에 있고, 한창 예배를 드리는 중인데 갑자기 형제가 너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는 것이 기억난다면, 즉시 교회를 떠나 그 문제를 해결하라, 예배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 먼저 너의 형제를 찾아내 용서를 구하라, 먼저가고, 그 다음에 오라, 먼저 가서 너의 형제와 화목 하라, 그 다음에 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라.”

또한 만일 네가 갚지 않은 빚이 있다면 , 그리고 너의 채권자가 돈을 돌려받기 위해 너를 법정으로 데리고 가고 있다면 빨리 그와 타협을 보라, 법정 밖에서 당사자끼리 합의하여 해결을 보라. 그렇지 않고 일단 법정에 도착하면 너무 늦을 것이다. 너를 고발한 사람은 재판관 앞에서 너를 고소할 것이며 재판관은 너를 경찰에 넘겨줄 것이고 너는 감옥에 갇힐 것이다. 네가 마지막 한 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절대 거기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감옥에 들어가기 전에 돈을 갚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한 일이다.”

상황은 다릅니다. 전자는 교회에서 나온 예이고 후자는 법정에서 나온 예입니다. 전자는 형제와 관련된 것이고 후자는 원수와 관련된 것입니다. 하지만 두 경우 모든 기본적인 상황은 똑같습니다. 누군가가 우리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본적인 교훈도 똑같습니다. 즉각적이고 긴급한 행동을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도중에 그 불만을 기억한다면 예배드리는 일을 멈추고 가서 그것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바로 그 길에 빚을 청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즉시 행동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주의를 기울이는 경우가 얼마나 드문지 모릅니다. 살인이 끔찍한 범죄라면 악의적 분노와 모욕 역시 끔찍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거나 그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모든 행동, , 표정, 혹은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악들에 대해 좀 더 민감해야 합니다. 우리는 절대 소원함이 남아 있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그런 소원함이 자라도록 해서는 더욱 안 됩니다. 즉시 바로 잡아야 합니다.

즉시 깨어진 관계를 알아차리자마자 주도권을 잡고 그것을 고치고, 우리가 유발한 불만에 대해 사과하며 아직 갚지 않은 빚을 갚고, 보상해주어야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제육계명의 논리가 함축된 이러한 극히 실제적인 교훈들을 이끌어 내셨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사람을 해하는 일을 피하고 싶다면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조처를 적극적으로 취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두 예화를 통해 우리는 단순히 살인하지 않는 선과 하나님 나라의 선을 나란히 대조하여 보게 됩니다. 전자는 후자에 비하면 참으로 공허해 보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런 예화를 율법으로 만들어 지킨다면 우리는 과연 형제 자매에게 의로운 자가 될 수 있을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을 지키면서도 이웃을 미워하고 해칠 수 있는 다른 길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습니다. 결국에는 정말로 중요한 핵심을 놓치게 됩니다.

산상 강화에서 예수님은 다른 어떤 문제보다도 분노와 적의의 문제를 아주 길게 다루십니다. 분명 그것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의 삶에서 멸시와 억제되지 않는 분노를 제하여 낸다면 그것만으로도 실제 발생하는 잘못된 행동을 크게 제한 셈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이 어떤 사람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 있는데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기뻐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 사이에서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는 관계 회복을 포함합니다.

그 점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매일 다른 이들과의 건강한 삶의 관계성을 유지해야 하는 긴박함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와 함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위엄을 손상시키는 그 어느 것도 행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하나님 사랑이고 이웃사랑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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