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8월 20일 주일예배
[작은 자를 업신 여기지말라: 마 18:5-14]
어느 인간 사회나 적당한 서열을 확립하는 데 관심을 기울입니다. 평등은 있을 수 없습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분명하게 나누어집니다. 물론 서열이 세워지고, 그에 따른 책임을 적절하게 지고 사람들이 잘 살아가도록 그 자리를 성실하게 감당하기만 해도 힘없는 아래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을 텐데, 요즘 우리 사회는 그렇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리는 독식하려고 하면서 무책임, 무능력, 무공감으로 인해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힘없는 작은 자들의 탄식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복음서에서도 서열 다툼에 대한 제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몇 차례의 분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땅에 지위와 중요성에 대한 모든 관례적인 생각을 거부하시면서 ‘어린아이’라는 이미지를 부각하시면서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모델을 제공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핵심은 물론 순진무구함이나 비이기적인 마음과 같은 어린아이의 성품에도 있지만 실은 권위에 종속되고 의존적이며 힘없는, 서열 매 밑바닥에 있는 어린아이와 같은 위치의 의미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라는 의미와 함께 사람들이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하찮은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이중적 의미로 사용하신 거죠.
예수님은 이처럼 어린아이처럼 낮은 자리에 있는 이들을 받아들이는 것, 곧 자기를 낮춤으로써 시작되는 작은 자의 환대를 제자들에게 요청하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그런 모습이야말로 그가 진정 큰 자가 되는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군가를 누르고 일어서는 자가 결코 큰 자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마 18: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가장 큰 자니라.”
하지만 세상은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고 겸손하면 오히려 그를 인정하고 배려해주기보다는 힘이 없다고 여겨 더 억압하고 무시하고 존재감을 지워버리는 비열한 행동을 일삼습니다.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직장에서도 세상의 수많은 집단에서 오늘도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그런 속성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마 18:7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다른 이들을 넘어지게 하거나 또는 자신이 넘어지는 일들이 늘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잘 지켜 가고 있습니까? 그러지 못하면 그 화를 고스란히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저는 믿습니다. 지금 아무리 뉴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잘난 체하고 뭔가 권력을 잡은 것처럼 행동하여도 누군가를 넘어지게 한 자는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그 행한 대로 갚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타자에 대한 배려와 환대, 이를 기쁨으로 수행하기 위해 자기 또한 겸손해져야 하는 일들은 우리의 공동체를 살리는 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5절부터는 4절에서 밝히신 상호 겸손의 의미를 더욱 심화시켜 나가셨습니다. 그것은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신 예수님의 몸 된 교회에서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가장 미미한 자를 매우 중요한 자로 대접하는 것, 그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이 일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행동이 됩니다.
마 18: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이와 같은 태도는 자연적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에게서 철저한 변화, 즉 돌아섬, 회심을 요구하고, 그리스도와의 연합 가운데 배어져 나오는 삶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단호하게 요구하셨습니다. 막 8:34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제자들이 그와 같은 길을 갈 수 있도록 예수님은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계실 때 문벌 좋고 권세 당당한 자들보다는 주로 죄인과 세리의 친구가 되셨고, 가난하고 병든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눅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예수님은 생명을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율법의 짐을 백성들에게 지게 해서 그들을 힘들게 하고 억압하였던 반면에 예수님은 눌린 자들을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그분의 오심은 잃어버린 한 영혼을 구하는 것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교회의 진정한 사명과 존립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모범입니다. 이 모범을 따라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작은 자들을 포용하는 것과 세상에 힘없고 낮은 자들을 위한 따뜻함을 이어갈 때만이 그 공동체는 살아있는 신앙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머리 되신 주님과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분과 단절되어있다면 이 일을 결코 할 수 없을 겁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모든 제자의 삶은 타자를 살리는 삶이어야 합니다. 작은 자들을 업신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삶이 얼마나 중차대한 것인지 예수님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들어서 제자들에게 말씀해주셨습니다. 그것은 작은 자 중 하나를 환대하지 못하고 오히려 업신여겨 넘어지게 했을 때, 마음 상하게 했을 때 우리에게 다가올 결과입니다.
마 18: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저는 이 말씀 앞에 설 때마다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나의 행동, 나의 언어가 다른 이들을 넘어지게 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말입니다. 예수님은 6절의 말씀을 통해서 교회공동체 안에서 서로에 대한 존중과 배려와 환대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지 말씀해주십니다. 직접적인 행동으로서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나의 존재 자체가 다른 형제나 자매에게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긴장도 필요한 것입니다. 환대한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고슴도치와 같다면 다른 이들을 상하게 하고 아프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런 행동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을 반드시 물으시겠다는 겁니다.
따라서 그렇게 되기보다는 형제를 넘어지게 하는 잘못된 자신의 원인을 먼저 제거하도록 말씀하십니다. “찍어 내버리라” “빼어 내버리라”
마 18: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 18: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말씀대로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죄를 짓게 한 해당 부위를 즉각 찍어 내버리면 우리의 신체 중 남아 있을 만한 곳은 아마 한 군데도 없을 것입니다. 실은 손과 발은 유혹의 도구, 수단일 뿐입니다. 죄의 원인과 동기와 그 근원은 악한 생각이 나오는 곳, 즉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찍어 내버리라고 하는 것은 악한 생각과 죄의 유혹이 도사리고 있는 마음의 썩은 생각을 잘라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 철저하고 무자비해야 합니다. 어물쩍 넘어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타협하다 보면 어느 순간 무디어지고, 화인 맞은 것처럼 느끼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철저하게 제거하라는 말씀이죠. 그래야만 포도원의 담을 허무는 여우와 같은 존재가 아니라 작은 자를 영접하고 배려하고 존중할 수 있어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작은 자’이고 힘없는 자이기에 무시한다면 그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낮은 자들을 하찮고 귀찮게 여기는 그래서 그들을 위한 돌봄의 필요를 무시하려는 유혹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을 배제하는 태도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눈에는 그들의 삶이 투영되고 있고, 예수님 또한 목자로서 그들 가운데 서 계십니다.
마 18:10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이제 우리는 그러한 목자의 뒤를 따르는 제자로서 그분이 제시하신바, 희생과 봉사의 도리를 온전히 수행함으로써 극도의 이기주의와 자기 편의주의로 병들어가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과 온정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결코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그 누군가에 의해 잃어버리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는 영혼의 목자이신 예수님의 모습 바로 그것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선한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요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이처럼 길 잃은 양에 대한 비유에서 우리는 ‘작은 자’에 대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관심을 보아야 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도록 예수님은 길 잃은 양 한 마리의 비유를 말씀해주셨습니다.
마 18:12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마 18: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아흔아홉 마리의 양은 소중하지 않고 길 잃은 양 한 마리만을 소중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읽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흔아홉 마리의 양이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어요.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길 잃은 양을 찾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안타까운 마음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작은 자 중에 하나라도 잃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 18:14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리라.”
우리를 창조하신 아버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가로막고 오히려 다른 이들을 실족하게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엄청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세상의 패턴은 주로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지만, 신앙공동체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이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공동체는 모든 이들이 존중받는 곳이고 서로를 향해 마음을 낮추어야 하는 거룩한 자리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믿는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셨습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친밀함을 경험하고 이해받고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제자로서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으로 살아가는 삶의 패턴을 발전시키는 것이 공동체 내에서의 높은 가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의 청지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에 우리는 형제와 자매들을 서로 돌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하나님 나라의 가치로 우리가 낮은 자들을 대하는 태도는 바로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를 드러내 주는 척도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 척도는 우리 신앙에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의 사랑이 거짓되지 않고 균형을 찾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은 거짓된 것입니다. 요일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는 분명 한 영혼에 대한 분명한 책임을 갖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공적 책임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더욱 견고하게 하는 힘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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