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8월24일 주일설교문
[ 하나님 말씀 중심의 삶: 마5장17-20절 ]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목적 상실
제가 얼음물을 뒤집어쓰는 인증 샷을 올리면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할까요? 요즘 세계의 유명인들 사이에 얼음물 뒤집어쓰는 일이 트렌드가 되고 있습니다. 본래 아이스버킷 챌린지는 루게릭병 환자를 위한 사회운동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얼음물을 뒤집어쓰거나 미국 루게릭 협회에 100달러를 기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재미있는 점은 사람들이 얼음물을 뒤집어쓰고 나서 다른 세 사람을 지목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운동이 급속하게 퍼져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벌써 난리가 났습니다. 정치인, 연예인들이 너도나도 참여하여 인증 샷을 올리고 있습니다. 여기에 참여하지 못하면 소외당하는 듯해서 자기 이름을 지명해 달라고 부탁까지 한다는 이야기가 들립니다. 저는 급속도로 퍼져가고 있는 이 일을 우려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루게릭병 환자를 돕기 위한 사회운동으로 시작된 아이스버킷 챌린지가 본래의 정신과 목적은 사라지고 유명인들 사이에 유행처럼 변질 된 것 같아서입니다.
이런 일들이 실제로 비일비재합니다. 왜 시작되었는지 이유도 모르고 행해지는 일이 우리 주변에 너무도 많습니다. 본래 의미와 정신을 끝까지 지켜가는 일이 쉽지 않아 보입니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 신앙에 가장 중요한 가치와 목적들을 잃어버릴 때 지금 행하고 있는 우리들의 행동은 하나님 앞에서 의미를 상실하고 말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사람들이 쉽게 타성에 젖어서입니다. 혹은 자기 편리한 대로 해석하고 적용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늘 개혁이 필요합니다. 개혁은 처음 정신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처음 정신으로
우리에게 믿음의 가치와 목적을 바로 보여주는 길라잡이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기독교는 종교개혁을 통해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성경을 기반으로 초대교회의 모습을 회복하자는 취지에서입니다. 한국교회도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성경이 들어왔습니다. 성경을 배우기를 힘쓰고 했던 한국교회입니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가 정말 성경중심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그 옛날 유대교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성경을 자기들이 편리한 대로 해석하고 적용하여 전혀 다른 길로 가거나 그냥 관습에 젖어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 상황이 그와 같았습니다. 말씀의 본질이 아닌 비본질적인 것들이 우선되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유대사회를 향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외치시면서 이 땅에서의 메시아 사역을 시작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유대 사회가 하나님의 의를 온전하게 이루어가고 있었다면 어떻게 회개하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그런 중요한 이유 때문에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본래 허락하신 율법의 정신을 찾아가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율법의 두 기둥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교는 율법의 스피릿을 벗어나 온갖 종교적인 규제가 넘쳐나서 사람들을 강력하게 옭아매고 있었습니다.
유대교의 핵심자원들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제대로 해석하고 삶에 적용하기 보다는 그들의 편리대로 율법을 해석하고 그 율법을 적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로들의 유전을 따라 행했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살리는 일에 매어달리지 않았습니다. 비본질적인 종교적 규제 강화에 열을 올렸습니다. 형식에 얽매였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그 사이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자리 잡을 수 없었습니다. 생명 살리는 일은 더 더욱 없었습니다. 죽어가는 자가 있어도 도와주다가 그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만지게 되고 자신이 부정을 탄다는 이유로 그 사람을 외면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완악한 유대교 사회를 향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시면서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신 것입니다. 그와 함께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외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나님은 우리를 형식으로 옭아매고 그 멍에로 힘들게 만드시는 분이 아닙니다. 평안과 안식의 기쁨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지금 신앙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평안은 간데없고, 삶이 무겁고 신앙의 길에서 힘이 든다면 하나님이 지어주신 짐이라기보다는 우리 스스로 짊어지고 가는 짐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그런 멍에를 짊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율법의 완성: 예수 그리스도
오히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야말로 율법을 폐하고자 하는 반율법적인 교사로 보았습니다. 그런 그들의 심중을 꿰뚫어 보신 예수님께서 마태복음5장17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율법과 선지자라는 표현은 구약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는 바로 이 율법과 선지자, 즉 구약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구약성경은 오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으로 가득 찬 책입니다. 바로 그 약속을 완성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런 목적에서 예수님은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신앙혁명이 정말로 이스라엘이 믿고 기다려 온 모든 것의 성취임을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또 하나는 자신이 선언하는 새로운 방식에 따라서 실제로 살고 있다는 것과 하나님의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해 죽으리라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와 함께 자신을 따르는 자들도 그 삶을 따르도록 요청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 사회에 매우 혁명적인 제안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래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들입니다.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퇴색되고 오염된 말씀의 본래 가치와 의미들을 끄집어내신 것뿐입니다. 그것이 기록된 것이 바로 신약성경입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 단절된 것이 아니라 그 점에서 하나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과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기독교 안에는 구약을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어 왔습니다. 마태복음이 기록된 뒤 수십 년 후에 마르시온이라는 이단이 교회사에 등장을 합니다. 그들은 구약성경이 마귀의 작품이며 기독교인들이 사용하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비난하였습니다. 여전히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히브리 성경을 원칙적으로는 인정하려 하지만 실제로는 경시하는 경향을 갖고 있습니다. 신약에 비해 양도 많고 어렵기도 하고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읽는 구약의 범위는 매우 한정적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구약의 완성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약속하심 없이, 구속사의 준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분이 아닙니다. 마태복음1장에 보면 왕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오랜 세월을 하나님은 구속사를 위해 준비하셨고, 그 마지막 완성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약속대로 오셔서 자신의 인격과 가르침과 역사를 통해 이와 같은 율법의 가르침을 완전하게 하셨습니다. 율법 해석의 표준이 되셨고, 율법을 통해 주시려 했던 하나님의 원래적인 의도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말씀을 제대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일들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한 시대에 적용되는 책이 아니라, 주님 다시 오시는 날까지 영원한 계시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18절에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완전하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은 반드시 지키고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인해 구원받은 이후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말씀에 깊이 뿌리내리고, 말씀중심의 삶이 요청됩니다. 말씀에 기초하지 아니하고 자기경험과 관습에 뿌리내린 신앙은 하나님 앞에 설 때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평가는 우리가 말씀에 뿌리 내린 삶인가 아닌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인지 아닌지, 천국에서 큰 자인지 작은 자인지를 구별하시는 겁니다.
작은 자와 큰 자
예수님께서 19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19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예수님께서“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 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이라고 하셨을 때 이 대상은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이들은 율법을 가르침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의 기본적인 원리에 부합하게 가르치지 못했고, 행동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나름대로 중요한 율법, 중요하지 않은 율법으로 나누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 말씀보다도 장로들의 유전이 우선시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하게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만이 율법의 수호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셨습니다.
이들이 말씀을 실제로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구분한 반면에 예수님은 그 차이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형제에 대하여 욕하거나 수치를 안겨주는 것은 작은 것이므로 무시해도 되고 살인하는 것은 큰 범죄이므로 죄라고 선포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원리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는 형제와 동료와 이웃에게 노하고 욕하는 것부터 살인과 마찬가지인 큰 죄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또 하나님과 화해하는 제사법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형제와 화해하지 못하는 것도 하나님과 화해하지 못하는 것만큼 심각한 죄라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간음을 행하는 것만 나쁘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여자를 보고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부터 간음하는 것만큼 중한 범죄라고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 더러움은 정녕 씻어내지 못하고 거룩한 척 하나님 앞에 서서 열심을 다한다면 하나님이 그 열심을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점에서 주일에만 얼굴을 내미는 선데이 크리스천들은 회개해야 합니다. 다른 날은 온통 세상의 가치에 휩싸여 분주하게 살아가면서 말씀도 하나님과의 교제함도 잃어버리고 살다가 주일에 겨우 그 혼미함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려고 하니 쉽지 않은 것입니다. 삶에 열매도 없고,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의 처지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엉성하지만 풋 냄새 나지만 하나님은 처음 열매를 원하십니다. 그 열매라도 맺기 시작할 때 보다 더 맛깔 나는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당장 자신들을 종교지도자, 스승이라고 으스대고 있지만 천국에서도 하나님의 대접을 받으리라고 기대하지만 그들은 결코 큰 자가 될 수가 없었습니다. 작은 자 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하나님으로부터 외면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아주 사소한 것 하나라도 소중하게 여기며 그 율법을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서 크다고 하셨습니다. 19절b“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결국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는 자로서 크다 또는 작다라고 일컬음을 받을 수 있는 기준은 그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어떻게 가르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계명이라도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생각과 마음으로서 뿐만 아니라 생활 속에서 사람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본래 율법의 스피릿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이셨기에 예수님은 율법을 어기며 불법을 행하는 자를 모르신다고 하셨습니다. 마7장23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더욱이 마지막 때에는 말씀을 떠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 만연하게 될 것입니다. 마24장11-12절“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의 식어지리라.”우리가 말씀 안에서 깨어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말씀의 정신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의
그러기에 신앙과 대립되는 자기의 의가 아닌 신앙의 표식으로서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삶을 통해서 들어나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믿음을 입증하는 의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이 보실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그 점에서 실패하였습니다. 이들은 율법의 형식적인 준수에 충실하던 자들입니다. 서기관은 율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치고 그것으로 백성을 재판하던 자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실제 생활화하려 노력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모두 율법의 참 정신은 잊어버리고 오직 형식에만 매달려 그것을 준수하기에 급급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사소한 것 지극히 작은 것을 위해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을 버렸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였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누구보다도 잘 지킨다고 했지만 실상 하나님의 율법을 폐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그들의 의는 실로 제로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제로 상태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이들 보다 나아야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20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의는 자기를 과시하는 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이와 같은 의를 넘어서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넘어설 수 있습니까? 바리새인들처럼 그럴듯한 논리와 편의에 따라서 하나님의 계명을 제한하거나 왜곡하지 말고, 순전하게 말씀을 행하고, 가르침으로서 말씀이 온전히 우리의 등불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성령께서 말씀을 조명해주시고, 깨달을 수 있도록 말씀 앞에 설 때마다 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말씀이 이끌어가는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저들의 의보다 우리를 낫게 하는 것은 내 열심, 내 의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서 있는 가입니다.
나은 인생을 살고 있는가?
지금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정말 세상 사람들보다 나은 거룩하고 구별된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들과 동일시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제자는 예수님께서 그러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행하며, 신앙과 행함이 일치하는 의, 곧 외식하지 않고 자기 의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채워지고, 그 의가 바탕이 되어서 우리의 행함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소금이 되고, 빛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점에서 교회가 지금 세상 사람들이 공감할 만한 빛과 소금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기독교인이라면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고 나름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지금 우리의 모습은 세상의 그런 기대치에 조차도 미치지 못하니 신뢰할 수 없는 겁니다.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게 드러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삶은 우리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며 그분을 예배해야 한다고 세상 사람들에게 말하는 하나의 표지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우리를 거룩하게 하고, 구별되게 하고,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보다 낫게 하는 것은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왜냐하면 나의 의가 아닌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받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열심을 다한다 해도 얻을 수 없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우리는 오늘 예수님과 더불어 구원의 새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새 시대를 믿고 살아가는 제자들 서 우리는 새로운 세상에 속하고 싶다면 단지 종교적인 거룩함에 매어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언약의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그것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바꾸시고, 그 변화를 통해 이 땅에서의 행동이 바뀌어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거룩한 삶을 통해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 사람들에게 비추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와 함께 하나님의 선물, 하나님 나라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의지 하지 않고, 우리에게 주신 말씀중심의 삶을 겸손하게 살아가지 못하고, 그 반대편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자기 열심만 갖고 우왕좌왕 살아가다가는 너무도 소중한 하나님 나라를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의가 어디에 기초하고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야 합니다. 골로새서2장6-7절“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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