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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동영상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에베소서 1장 7절

by 최수근 2020. 8. 3.

2020년 8월 2일 주일예배설교동영상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에베소서 1장 7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향하신 계획을 창조 이전부터 오랫동안 품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은 엡 13-6절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택하셔서 참으로 영광스러운 자리, 즉 하나님의 자녀요 상속자로서의 신분과 지위를 우리가 얻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에 따라서 우리는 거룩하고 흠이 없는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아름다운 아들딸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죄로 물들지 않은 창세기 1-2장의 에덴동산과 요한계시록 21, 22장의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은 에덴동산도 아니고 새 하늘과 새 땅도 아닙니다. 우리는 21세기의 어지러운 세상, 코로나 펜데믹 상황에서 인간들의 민낯이 드러나고 있는 세상, 보편적 가치가 전도되고 무너진 세상, 온갖 죄의 유혹이 난무하는 세상의 한가운데에 서 있습니다. 

매일같이 로마서 6장의 말씀을 떠올리며 죄 죽임의 생활을 하겠다고 다짐해보지만, 넘어지기 쉽고, 죄짓기에 십상입니다. 그러니 늘 갈등하게 되죠. 723-24절에서는 매일 일어나는 내적 갈등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 밖에 있는 것처럼 문 듯 생각이 듭니다. 이런 고민 자체가 싫은 거예요. 그래 하소연 하는 이도 있습니다. “왜 내가 예수님을 믿어 이렇게 힘들게 살지?” 이렇게 말한다면 이분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택하심으로 이루어진 은혜를 얻는데 가장 큰 장애는 죄의 장벽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벌어진 것은 죄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59:1-2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성경은 죄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다고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죄로 인해 하나님께 도저히 갈 수 없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 이전에 계획하신 구원의 은총을 입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이르려면 죄의 문제가 먼저 처리되어야만 합니다. 이 지점에서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이 죄의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죄를 감추어서 행복해지려는 경향을 갖고 있습니다. 자꾸 숨기려고 합니다. 부인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죄를 매우 심각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죄를 드러내어 죄 사함의 자리로 우리가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이 때 우리가 유념해서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죄 사함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심으로 단순히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죄의 용서를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피로 죄의 값을 치르게 하셨습니다. 구약에서는 일 년에 한 번씩 속죄제를 드림으로 백성들의 죄를 사함 받았습니다. 속죄제는 매년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때가 이르렀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서 있는 장애,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를 누릴 수 있기 전에 제거되어야 하는 죄의 장애물을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단번에 처리하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죄의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3-6절까지에서도 보면 매 절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가 사랑하신 자 안에서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과정입니다. 그 점에서 복음의 중심과 핵심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전혀 구원이 없다는 진리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적 필요성을 인식하지 아니한다면 그건 기독교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받아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자신을 구원하게 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구원에 있어서 결코 다른 길, 다른 가능성을 열어놓지 않으신 거죠. 오직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옴을 선언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자꾸 다른 길을 추구합니다. 종교 다원주의가 그런 것입니다. 산 정상에 오르는 길은 여러 루트가 있다고 주장을 하면서 구원도 그렇다고 이야기 합니다. 

현대인들은 자주 예수 그리스도를 윤리 교사로 성인으로 몰아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윤리적인 측면에서 도덕적인 측면에서 접근하여 읽습니다. 물론 그 교훈이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삶, 선한 삶을 살아가는 데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겠지만 온전한 구원을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바르고 선하게 산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운 일은 많은 종교들이 이 길을 주장하곤 합니다. 

이것은 이 땅에 예수님이 참 인간으로 오신 성육신의 목적을 잘못 읽어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가르쳐 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교훈하고 가르치셔서 우리가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을 하여야 하는가를 본보기로 보여주시고, 고무시키려고 하시기 위해 오신 것도 아닙니다. 구원에 이르는 어떤 방법, 길을 열어주시고자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방법을 가르쳐주시기 위해 오셨다고 믿는 순간 우리는 헤어나올 수 없는 늪에 빠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스스로 해보려는 행동의 굴레에 갇혀 자유하게 하시는 구원의 은총을 평생 맛보지 못하고 스스로의 억압된 구조에 갇혀 힘들게 신앙 생활 아닌 신앙생활을 반복하고 마는 것입니다. 피 값을 치르시고 해방시켜주셨는데 자유자가 아닌 노예로 여전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기 위하여 대속 제물로 자신을 드리고자 오셨습니다.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우리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을 이루시고 성취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너희들이 이렇게 하면 용서해 줄게 선언하시는 사건이 아니라 갈보리에서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죄를 사하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속량, 곧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가 곧 구원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고전 1: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단순히 믿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 분이 구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로마서 6장에서는 세례 사건으로 이야기 합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죽으심, 장사지냄, 부활하심, 승천하심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출발점이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사함을 받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모든 인간은 죄의 결과로 인하여 종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노예 신분입니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해방할 수 없습니다. 이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자 이 세상에 오신 것이죠. 죄 사함을 위해서는 충분한 값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값이 바로 예수님의 피입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다고 단호하게 성경은 말씀합니다. 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구약의 제사처럼 짐승의 피로써는 죄를 없이 할 수 없었습니다. 10:4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이렇게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써 예수님은 우리를 사셨습니다. 5:9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속량, 속전을 통해 우리는 주님께서 사신 바 된 인생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인생입니다. 주인이 바뀐 것입니다. 이젠 죄의 노예가 아닌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인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고전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악을 위하여 죽으셨고 그 피의 값으로 우리를 사셨다는 것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강한 감동과 울림을 주고 있습니까? 아니면 불편하십니까? 나의 죄에 대한 자각이 없이는 그래서 그 죄가 얼마나 우리를 죽이는 것인지 깨닫지 못하는 한 우리는 늘 불편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인됨을 철저하게 인정하고 그리스도 앞에 엎드렸다면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피를 흘리시고 죄를 사해주셨다는 사실 앞에 감사하고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제가 나음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제가 구원받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이와 같은 속량의 과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이루어졌습니다. 100% 자기 자신을 우리를 위해 드리고자 하신 것이야말로 그 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은혜의 풍성함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과정에서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으셨습니다.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생명, 자신의 피를 조건없이 우리를 위해 내어주셨습니다. 그렇게 풍성한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안타깝게도 너무 계산적일 때가 많습니다. 조금도 손해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희생과 섬김의 자리로 나아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익만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 앞에서 우리는 은혜를 입은 자로서 이기적인 마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이루어진 죄 사함의 은혜를 받고 순전한 마음으로, 전심으로 응답하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설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계산하지 않음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자로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속량 즉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값을 치르셨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더는 죄가 요구하는 일에 대해 응하지 않아도 됩니다. 자유하게 해 주셨습니다. 죄 사함을 통해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죄인으로서 우리가 매일 필요로 하는 것은 죄와 시험을 이길 수 있는 힘과 도움이 아닙니다. 근본적인 죄의 문제가 해결함을 받고, 죄인에게 임하여 있는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정죄에서 벗어나 참 자유함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죄사함은 의롭다 하심을 받고 거룩하게 되고 장차 올 영화의 지점으로 인도되는 것입니다. 모든 다른 축복들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모든 복락들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합니다.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은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습니다. 말로써 영광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로 영광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이들을 동기부여 해 영광돌리도록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몸으로 영광을 돌리라 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수고함으로 드리는 섬김과 헌신이 타올라 아름다운 향기되어 올라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거룩한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통해 올려드리는 영광을 받으시고 기뻐하시기를, 그래서 더욱 풍성한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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