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12일 주일설교원고
[하나님의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 의: 롬 3장 21-28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14년 타던 매그너스 차량을 지난 9월에 폐차를 했습니다. 페차장에 차를 보낼 때 마음이 아팠습니다. 겉은 멀쩡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차의 심장인 엔진은 제 기능을 잃어버렸습니다. 겉은 멀쩡해 보여도 속이 언제 멈출지 모르는 상태라면 그 차는 더 이상 효용가치가 없습니다. 당연히 폐차장행입니다.
주변에 보면 겉은 멀쩡한 데 속은 뭉개져서 위험천만하게 달려가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 분들을 보면 겉은 초 긍정의 힘으로 반짝반짝 빛나 보이려고 애를 씁니다. “난 괜찮은 인생을 살고 있어.” “나만큼만 하면 되지 않겠어?” 자신의 힘이 아니라 다른 것에 의지하려는 것은 죄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어떻게든 노력하면 모든 것을 극복하여 결국은 넘어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그 순간에도 그의 속은 조금씩 허물어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긍정적 마인드는 믿음이 아닙니다. 매우 긍정적으로 산다고 해서 믿음이 좋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기의 의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삶은 일자리를 구할 때 그 자리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경험과 기술을 기록한 이력서를 제출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보고 나를 뽑아주세요.” “난 이 일을 하기에 최적의 사람이에요,”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제출한 이력서가 좋은 평가를 받으면 받아들여 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결과도 없이 백통 이 백통 숫자가 늘어나면서 지치게 되고, 어느 순간 허무하게 무너지는 위험성을 안고 있습니다.
이렇게 긍정적의 힘을 믿고 불나방처럼 살아가는 이들과 반대로 죄책감에 파묻혀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끊임없이 죄의 무게에 짓눌려 살아갑니다. 무엇을 해도 잘 될 수 있으리라는 소망이 없습니다. 좌절감이 앞섭니다. 뭔가 잘못되면 인과응보의 사고 속에서 힘들어합니다. 그로 인해 끊임없이 자신을 학대합니다. “나란 놈이 무엇을 할 수 있겠어.” “늘 요 모양 요 꼴이네.” 항상 바닥을 쳐버립니다.
이 두 영역에서 살아가고 있다면 당장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우리는 두 가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특권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지만, 자격 미달이지만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켜주심의 특권을 부여받았습니다. 본래 우리는 하나님의 완성의 자리에서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던 죄로 인해 하나님과 동행하던 그 길에서 떨어져 나온 자들이었습니다. 23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라고 말씀합니다.
헌데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임을 결코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나름 잘 살고 있다고, 선하게 살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 인간을 참으로 비관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죄를 지었고, 그 죄로 인해 유죄로 정죄 받았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사람들은 무기력하고 소망이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인간들을 은혜로, 절대적으로 값없고, 전적으로 과분한 은총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귀한 선물이며 특권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죄인들을 그 분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신다면, 어떤 근거에서 그렇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의로우신 하나님이 자신의 의를 타협하거나 그들의 불의를 눈감아 주지 않고 불의한 자를 의롭다고 선포하는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대답은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와 십자가가 칭의의 근거가 됩니다. 하나님이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단 한 가지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2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습니다. 25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화목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실 뿐만 아니라,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말씀할 때 다른 하나는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거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능력을 고스란히 받을 수 있습니다. 바로 성령 안에서 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
죄인임을 고백하고,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무릎 꿇을 때 예수님은 우리의 힘이 되어주십니다. 죄책감의 자리로부터 우리를 건져주십니다. 단순한 죄 사함이 아닙니다. “가라! 너의 죄로 인해 마땅히 받아야 할 처벌이 면제되었다”고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로 와라. 너는 나의 사랑과 나의 임재 안에 기꺼이 받아들여졌다” 선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단순히 죄의 용서를 넘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26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십자가는 하나님의 화목과 죄인들의 구속을 이루는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정의가 옳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아들이 죄를 지고 대속적 죽음을 겪으신 것을 통해 죄에 대한 자신의 진노를 가라앉혀 화목케 하사 우리를 구속하고 의롭다고 하셨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보이셨습니다. 복음에서 기본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구원의 주도권을 쥐시고 계신다는 진리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의롭다 여겨지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러기에 나의 나 됨이 어떤 은혜를 힘입어 이루어진 것인지, 인지하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왜 예수님께 비난을 받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자신의 공로를 통해 무언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었고, 그것을 사람들 앞에서 자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혹은 사람 앞에서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27절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실은 모든 인간은 상습적으로 자랑하는 자들입니다. 자랑이란 우리의 타락한 자기중심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 자랑은 그 어떤 효력도 갖고 있지 못한 헛된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회복과 구원은 율법도 아니고 행위도 아니고 오직 믿음의 법으로 이루어집니다.
그 어떤 긍정의 힘도 아닙니다. 우리들의 도덕적 선도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믿음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해야 합니다. 자신을 자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자랑 외에는 어떤 자랑도 있을 수 없습니다. 자랑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서 찬양이 있어야 합니다. 그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높여드리는 것입니다.
28절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우리의 잘난 삶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온전한 연합이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진정한 의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세상의 다른 이데올로기나 종교는 종교의 자선이라는 선행을 통한 모종의 자기 구원을 가르칩니다. 하지만 복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 분의 진노를 내몰았으며,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죽음과 우리를 향한 심판을 당하셨고, 하나님이 받을 가치 없는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셨고, 우리가 행하거나 심지어 기여할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은혜와 율법, 자비와 공로, 믿음과 행위, 하나님의 구원과 자기 구원 사이의 대조는 절대적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비기독교적 체계들은 하나님에게로 향한 ‘인간 자신의 움직임’을 생각합니다. 도덕주의도, 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비기독교적 종교의 자신 만만한 낙관주의 역시 비슷합니다.
하지만 이들 중 어느 것도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 된 인간 사이에 벌어져 있는 간격을 보거나 느끼지 못합니다. 그 간격을 희미하게 감지하기 시작할 때, 그리고 그 간격을 우리는 결코 넘어설 수 없다는 절망에 이를 때, 우리는 복음이 선포하는 것,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점에서 자기의 의와 죄책감은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 길에 방해꾼들입니다.
“그러나 이제”!! 절망 밖에 없는 상황에 한 줄기 희망을 비쳐 줍니다. “너희가 할 수 없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것을 이룰 것이다.” 말씀하시며 우리를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의에 응답하고 나아가십시오. 주도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완전무결한 의를 만드신 후에, 그 의를 우리에게 주셔서, 그 의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로 나아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 구원의 자리로 오직 그것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나아가십시오. 나아가셨다면 생명의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하십시오, 그 분과 연합하십시오, 예수님 때문에 여러분의 삶에 날마다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 풍성한 삶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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