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18일 주일설교동영상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님에게 내어주셨습니다: 요 6장 35-44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21세기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믿음을 소유하고,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기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신적 권위에 대한 도전, 인본주의적 사고의 영향, 비이성적인 영역에 대한 불신과 교회의 신뢰 하락 등으로 인해 기독교 신앙을 갖는 일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난공불락과 같은 성벽을 넘어 우리에게 믿음이 다가왔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정체성이 바뀌었을 때, 그래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참 예배자로서 사는 여러분들에게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이 채워줄 수 없는 신령한 은혜입니다.
35절에서 예수님은 선포하고 계십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영원히 목마름과 굶주림이 없으리라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대로 우리는 세상에서 취할 수 없는 하늘로부터의 채움이라는 은혜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영적인 채움이 있을 때 우리는 세상에서 구별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물론 육체적인 목마름과 배고픔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주시는 평강과 감사와 만족함으로 어려움의 순간들을 이겨나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선언이며 약속입니까? 그럼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믿지 않으려고 작정한 이들은 성경 시대에도 많았고, 오늘날도 많습니다. 요한복음 6장의 본문에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갈릴리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았으면서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 중에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본 자들도 상당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놀라운 이적을 목격했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떡과 권력 이상의 어떤 것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시선이 어디에 머물러 있느냐가 그래서 중요합니다. 보고도 믿지 않는 것은 자기가 보고자 하는 것만을 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믿지 못하니 이어지는 예수님과의 대화에서도 끊임없이 접점을 찾지 못합니다. 점점 그 틈새가 벌어졌습니다. 결국은 41절을 보면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수군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늘에서 내려’ 왔다는 예수님의 주장에 갈릴리 사람들이 보인 반응은 심히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그들은 투덜거렸습니다. 하늘로부터 왔다고 말하는 예수님에 대해 불편해하였습니다. 그 어떤 선지자도 감히 자신이 하늘로부터 왔다는 소리를 한 적이 없었는데, 이건 신성모독이라고 여겼습니다.
“수군거림” 즉 투덜거림과 불평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에서 나타난 가장 큰 특징이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것들에 대하여 불평하고 원망하였습니다. 마실 물(출 15:24)에 대한 기대가 무너졌을 때, 그들의 양식(출 16:2)과 물(출 17:3)이 떨어졌을 때, 광야에서 그들의 곤고 함이 심해졌을 때(민 ll:1), 약속의 땅을 정복하는 과정에서의 어려움(민 14:1-3)을 겪게 되었을 때, 심지어는 하나님이 내려 주신 만나(민 1l:4-6)까지도 저들은 끊임없이 투덜거렸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끊임없는 불평과 원망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거절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심판으로 귀결되고 말았습니다.
출애굽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하늘로부터 오셨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수군거림은 예수님에 대한 거절이었습니다.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는 예수님의 주장을 그들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늘에서 왔다는 예수님의 말을 수용할 수 없는 걸림돌이 있었습니다. 42절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그들은 예수님의 부모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이 땅에서의 예수님 성장 과정도 지켜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가 감히 하늘로부터 왔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생각하여 믿으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람들의 불평은 자신들의 선입견과 제한되고 불완전한 정보에 사로잡혀 진리를 보지 못하는 그들의 영적 무지와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과 불순종에 기초한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드러난 표적의 의미를 제대로 읽어냈다면, 그들은 예수님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코 수군거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자기 생각과 기대, 제한된 정보와 욕구라는 틀 따위로 하나님을 제한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자신의 제한적 사고의 틀 속에 하나님을 맞추려고 시도하는 순간 우리는 신앙의 눈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바라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오직 우리를 보호하시고 참 생명으로 인도하시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세상의 가치관과 당장 눈앞의 이익과 배치된다고 해서 무조건 불평하거나 불신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는 것일 뿐 아니라 스스로 생명을 저버리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뜻과 기대에 맞추는 것이 올바른 신앙입니다.
사람들의 불평과 떠듦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즉각적으로 경고하셨습니다. 43절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수군거림을 멈추지 않는 한 믿음은 점점 멀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 앞에 서서 이와 같은 수군거림이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 말씀처럼 당장 수군거림을 멈추십시오. 불평과 투덜거림을 내려놓으십시오. 잠잠히 참아 기다리십시오.
하나님은 가나안 정복의 첫머리인 여리고성을 취하는 과정에서 침묵을 명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수군거리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여리고성 점령에서 하나님 주신 전략은 굉장한 전략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하루에 한 바퀴씩 여리고성을 도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마지막 날 성을 일곱 번 돌고 함성을 지르라는 것입니다. 정말 지루한 전략입니다.
사람들이 거기에서 다양하게 수군거릴 소지가 있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전략을 세웠냐, 이래서 어떻게 정복하냐, 이건 미친 짓이다,” 수군거린다면 일주일을 이어가지 못하고 대열은 흐트러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잠잠하여야 할 때가 많습니다. 당장 결과가 보여지지 않아도, 나의 상식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여도, 비이성적인 것처럼 보이더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한계와 함정, 장애물들을 넘어 주님을 신실함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앞에 여리고성이 수없이 있습니다. 우리가 침묵 순종할 때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분히 물질적이며, 부정적인 면에 서 있는 갈릴리 사람들의 불신에 직면해서 예수님은 예수님의 초청에 진정으로 반응할 믿음의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님께 나아오게 되는지 믿음의 비밀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모든 이들이 불신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수많은 불신이 가득한 자리에도 분명 믿는 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많은 이들이 떠나가도 남는 자가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었을까요? 그냥 믿기로 작정하면 믿음이 생기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믿고자 하면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다시 말해 오늘 본문의 표현을 보면 믿는 자들, 예수님에게 나아오는 자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아들 예수에게 ‘주어진’ 자들입니다. 신앙이란 우리의 영역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역이기 때문에 그들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37절에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라고 했고, 39절에서도 “내게 주신 자 중에”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예수님에게 주어진 자들입니다.
정확히 말해서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님 앞으로 이끄심으로부터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신적 기원과 이 땅에 내려오심의 문제는 그 당시 군중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빛을 밝혀 주시지 않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요 6장 44절a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라고 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을 잠그신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고 그것에 대해 열심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은혜요 선물인 것입니다.
이렇게 아버지께서 이끌어 아들 예수에게로 주신 자들에 대해 예수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37절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믿는 이들을 모두 보존하고 보호할 책임을 갖고 계십니다. 그래서 자신에게로 오는 자들, 예수님을 믿고 나아오는 자들을 절대 내쫓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마 28:20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못합니다. 더 이상의 쓸모가 없으면 방출되고 맙니다. 회사도 그러하고, 단체도 그렇고, 대부분의 세상 공동체가 그렇습니다. 거기에 대한 엄청난 스트레스를 사람들은 받고 삽니다. 함께 하던 사람들도 어느 순간 훌쩍 곁에서 떠나갑니다. 영원토록 함께 할 것처럼 하다가 우리들의 마음을 후벼놓고 큰 상처만을 남기고 떠나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뛰쳐 나아가지 않는 한 결코 방출되지 않습니다. 단 마 8:12의 말씀처럼 예수님을 불신하는 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끝까지 성도를 돌보신다고 약속하는 것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38절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 성육신하신 것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아들에게 주신 자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종말론적인 약속의 실현입니다. 마지막 심판 때 자신의 백성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39절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믿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 안전하게 보전되는 것과 함께 마지막 날에 ‘살리심을 받을’ 것이라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40절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이렇게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으로부터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우리가 그분의 것임을 주장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형상의 담지자로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행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반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부르시고 회복하여 주셨습니다. 그 은혜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계획의 일부입니다. 그 계획에 따라 믿음을 선물로 주시고 우리를 향한 소유권을 선포하신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어떤 두려움이 와도 위축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실 것이고, 다시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롬 8: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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