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4일 주일설교동영상
[오병이어의 기적: 요 6장 1-15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예수님에게로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개인적인 시간을 갖고자 하셔도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디에 계신지를 알아내고는 금방 따라붙곤 했습니다. 그렇게 몰려오는 수많은 사람을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셔서 받아들이시고 돌보셨습니다. 이날도 예수님은 쉬지 못하시고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하시다가 그만 식사 시간이 지나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바라보시며 빌립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예수님은 빈들이라 무리들을 어떻게 사 먹일 방법도 없고, 더군다나 지금 제자들에게 아무것도 없는 상황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저들에게 사람들을 먹일 방법을 물어보신 것입니다. 제자들의 신앙을 강화시키기 위해 시험하신 것입니다.
이에 빌립이 대답합니다. “예수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빌립은 지극히 현실적인 관점에서 판단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돈이 걱정되고, 신속하게 계산까지 해봅니다. 계산상으로는 여덟 달분의 임금이 필요하니 도저히 어떻게 해볼 방법은 없고, 설령 그 돈을 마련해서 떡을 준비한다 해도 모든 사람에게 고루 나누어 주려면 떡 한 조각씩밖에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니 식사 한 끼가 될 수 없을 것이고, 결국은 사람들을 충분하게 먹일 수 없으니 각자 흩어져 알아서 민생고를 해결하도록 조처를 하시는 게 좋겠다는 말입니다. 빌립은 예수님의 능력을 믿는 신앙적인 자세를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빌립처럼 대개 사람들은 자신의 제한된 자원을 먼저 보고 판단을 합니다. 주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이성에 의한 산술적인 계산에만 의존하는 모든 이들은 예나 지금이나 주의 요구에 여전히 부정적인 대답밖에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다고 대답하곤 합니다. 어떤 시도조차 하지 않습니다. 무조건 이래서 못하고, 저래서 못한다는 수만 가지 이유를 찾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물으셨을 때는 그런 부정의 답을 요구하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곤란한 문제들에 직면하게 될 때에 유념해야 할 점은 예수님이 우리를 도우시고자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신다는 사실입니다. “안 됩니다” 라고 부정하기 보다는 어떻게 하실지 아시는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면 도움은 즉시 다가오는 것입니다.
빌립의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계산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걱정이 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이들을 먹이시고자 하는 계획이 있으셨고, 이 일을 통해 빌립을 포함해서 제자들을 시험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오천 명이 배부르게 먹고 있는 그림을 갖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는 숫자도, 제한적인 자원도 결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시대와 우리가 사는 세대에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이미 아시며’ 우리 개인의 현재와 미래라는 얽히고설킨 실뭉치에 대해서도 똑같이 분명하게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처럼 계획을 갖고 계신 주님 앞에 어떻게 서야 하겠습니까? 나는 그림이 없지만 주님은 나에 대한 그림을 갖고 계시기에 나의 제한된 상황을 넘어 역사하시는 주님을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빌립이 안 되겠다고 말하고 제자들이 이 일로 인해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제자 중 하나인 안드레가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9절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안드레는 빌립보다는 좀 더 효과적인 행동을 취하여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는 ‘한 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 당시 보리떡은 가난한 자들의 양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양은 한 아이가 먹을 수 있는 한 끼 식사 분량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오천 명이나 되는 무리를 먹일 수 있는 것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안드레가 물론 오병이어를 믿고 드린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신의 최소한의 리소스를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드려진 작고 보잘것없는 것으로부터 우리 주님은 역사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손수 그 많은 사람을 먹이는 일을 해결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먼저 사람들로 자리에 앉게 하셨습니다. 보리 떡을 가지고 감사를 드린 후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11절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예수님은 나눠주시고 사람들의 원대로 주셨습니다. 그것도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그들이 배부르게 먹은 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셨습니다. 그렇게 거둔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습니다. 13절 “이에 거두니 보리 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처음 그들 앞에는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습니다. 그런데도 모든 사람이 배부르게 먹고 난 후에도 처음보다 더 많이 남았습니다. 우리들의 셈법으로 도저히 풀리지 않는 기적인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갖고 계시는 자원은 무한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뿐 아니라 그 이상의 것도 채우실 수 있습니다.
종종 우리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는 상황을 한탄하고 그로 인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이고 개인에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는 겨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먹는 것도 부족한데 어떻게 나눌 수 있습니까? 어떻게 선교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좀 더 채워지면 하죠.” 그렇다면 교회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개인의 환경에서도 그렇습니다. 보잘 것 없는 것을 들어 우리의 상상력을 뛰어넘어 일하시는 주님을 보질 못합니다. 이것이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의 유한한 자원 앞에서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자원을 갖고 계시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당장의 결핍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비전을 품고 그것들을 실천해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통해 오천명이 먹는 기적을 경험하자 사람들이 술렁입니다. 14절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예수님을 메시아적 왕이시라고 칭송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무리에게서 벗어나 다시 산으로 떠나가시면서 오늘 장면이 끝이 납니다.
15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은혜를 경험한 그 이후의 우리 자세가 중요합니다. 이기적인 마음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놀라운 일을 행한 예수님을 믿음으로 나아가기보다는 그들의 필요를 채워줄 대안으로만 생각을 한 것입니다. 정치적인 메시아로서의 역할에 대한 기대였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 예수님의 거부는 분명 단호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소위 표적을 경험하고도 주님을 떠나는 것은 이와 같은 행동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얻게 됩니다. 첫째는 교회와 오늘날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직면하고 있는 섬김에 대한 도전입니다. 세상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곰곰이 생각만 하고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필요들, ‘생명의 떡’은 물론 물질적인 빵 그리고 충족시켜 달라고 절규하고 있는 다른 모든 필요들을 직시하라고 도전하십니다.
예수님은 필요에 직면하셔서 여전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리고 교회 공동체들에게 물어보십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이것은 예수님의 우발적인 질문이 아닙니다. 우리를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안락보다는 우리의 성장에 더 관심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주님의 시험에 우리는 너무나도 종종 빌립처럼 반응합니다. 우리는 필요를 측량해보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불충분한 자원을 헤아려 보고는 시작조차 하지 못하고 포기해 버립니다. 그리고 그 필요들은 모두 우리의 능력 밖이며 채워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결코 우리는 그 어떤 섬김도 행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제자의 삶이 아닙니다.
둘째, 우리는 자신의 리소스를 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리소스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무언가를 할 때 어떤 이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넘어 창의적인 접근을 하는 이가 있는 반면에 자신의 한계 안에 갇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후자의 사람들을 보면 대개 못한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왜냐하면 제한적인 것들을 주목하다 보면 정말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믿음에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자그마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해보자는 말에 “예, 해보겠습니다”라고 긍정적인 자세를 보이지만 믿음이 없으면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일이 이런 시각 때문이지 않을까요?
심지어 안드레처럼 제한된 자원이라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별로 더 가망 있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하지만 우리가 가진 자원, 보잘 것 없는 자원을 주님은 놀랍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실로 우리가 우리에게 있는 것을 예수님의 손에 드린다면 예수님은 그것을 위해 축사하실 것입니다. 그것 자체가 하나의 경이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모든 것을 다해 그 분을 신뢰하고 그 분이 주실 것을 믿는다면, 그분은 우리를 취하시고, 필요대로 우리를 떼어 하나님 아버지께 드릴 것입니다. 그럴 때 그 분의 손 안에서 기적이 되풀이 되고 자원이 증대되며 많은 무리가 먹을 것을 공급받게 된 것처럼 우리들의 삶에 풍성함의 은혜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어떻게 먹일 수 있겠느냐?” 빌립과 안드레의 대답이 아닌 “주님, 저는 못하지만 주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무엇을 해야겠습니까? 말씀하십시오. 제가 순종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 속에, 우리들이 걸어가는 사역의 현장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이 날마다 경험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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