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8월3일 주일설교문
[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마5장9절 ]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끊임없는 분쟁과 다툼
인류의 역사는 첫출발부터 갈등과 다툼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과 아벨의 갈등으로부터 시작된 다툼은 결국 첫 번째 살인으로까지 이어졌고, 오늘까지 사람들이 사는 공간에서는 갈등과 다툼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세상에서 참 평화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실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요즘 여러분의 삶은 화평합니까? 화목해야 할 가정이 사랑과 배려가 실종된 채 부부간에, 부모와 자녀 간에, 형제간에 다툼으로 치열한 전쟁터가 되기도 합니다. 평생원수로 삽니다.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이웃사촌이어야 하는데 이웃사촌 잘못만나면 마음고생이 심합니다. 심지어 층간소음으로 인해 이웃 간에 살인까지 날 지경입니다. 사람들에게 요즘 직장은 어떨까요? 숨도 못 쉬게 만드는 곳들이 많습니다. 월요일이 기다려지지 않는다면 지금 직장은 지옥 같은 곳입니다. 더욱이 젊은이들에게 군대는 화평함의 장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얼마 전 선임자들의 구타로 인해 숨진 병사까지 있어서 지금 군대가 난리가 났습니다.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으로 들어가면 상황은 더욱 악화일로에 있습니다. 중동에서, 아프리카에서, 크림반도에서 신앙과 종족의 안전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뿐이지 자기들의 집단적 이익, 정치적 이익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이 끊임없이 다투고 갈등하는 이유는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을까요? 본래 창조된 세상은 조화롭고 평화로운 세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깸으로써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사람들은 점점 더 탐욕적이 되고, 상생이 아닌 이기적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관계들이 어그러지고, 서로 싸우고, 죽이고 하는 비극적인 상황이 멈추지 않고 지금까지 이르렀습니다.
화평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
하지만 하나님은 이 상황을 강 건너 불 보듯 하지 않으셨습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지 못하고 멀어진 인간들을 위하여 하나님은 먼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골1장20절“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그와 함께 죄인 된 우리를 하나님과 화평하게 하고자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희생을 통해 화평하게 하는 자의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한 삶인지를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많은 이들이 하나님과 화평하게 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각에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세상적인 패러다임으론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예수님은 화평을 만들어가는 삶이 얼마나 복된 인생인지를 잘 알고 계셨기에 끊임없는 다툼과 분열의 세상을 살고 있는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고 화평하게 하는 자가 얼마나 복된 지를 선언하셨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하나님이 사람들을 사랑하셨듯이 긍휼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행하신 화평의 일을 행하려고 애쓰고 있다면,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축복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이 일을 하나님이 참으로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결코 화평하게 하는 자들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과 화평함으로 그 은혜를 경험한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세상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 샬롬을 이루어가는 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이건 자연적인 인간의 품성으로 결코 이룰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취해야 할 핵심적인 행동으로서 화평하게 하는 일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화평의 의미
‘화평’이라는 뜻인 헬라어 ‘에이레네’는 히브리어로 ‘샬롬’과 연결됩니다. 샬롬은 구약적 평화 개념의 핵심으로 하나님, 이웃, 민족과의 관계를 포함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완전함과 온전함을 의미합니다. 극 최상의 상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화평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축복을 한 단어로 축약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화평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가장 좋고 훌륭한 것들이 그 삶 속에서 성취됨을 말합니다.
또한 화평은 단지 상대편을 너그럽게 용서하고, 사이좋게 지내는 유화(宥和)적인 행동을 넘어서서, 화목을 통한 친밀한 관계 회복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회복으로 인한 궁극적인 평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관계회복이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화평함이 없이, 또 사람들과의 화평함이 없이는 결단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12장14절에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러기에 화평은 우리 믿는 이들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화평은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입니다. 성령의 사람이라면 생활 속에서 화평의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화평은 당연한 것이고, 그로 인해 다른 이들과의 관계가 친밀함에 이르러야 하는 것입니다. 이 둘은 늘 연결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화평은 독생자의 피라는 엄청난 대가까지 치르고 얻어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역시 그보다는 못하지만 화평하게 하는 일에서 희생이 요구됨을 알아야 합니다. 최상의 복된 상황을 누리게 되는 데 어찌 대가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를 부르심의 목적이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모든 사람과 화평함을 이루는 것에 있기에 그것을 이루는 과정에서 치르게 될 대가 때문에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화평하게 하신 혜택을 우리가 먼저 입었고, 또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성령을 통해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우리들에게 부여해주시기 때문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어떻게 화평하게 하는 자로서 살아가야 합니까? 예수님이 화평하게 하는 자를 말씀하셨을 때, 이 사람들은 단순히 평화를 위해 무저항이라는 수동적 자세로 꾸준히 참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게 무기력하게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대립하고 있는 현장 속으로 들어가 다투고 있는 이들 사이에서 화평을 이루어가고자 하는 적극적인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원수 된 사람들, 가정들, 집단들, 그리고 민족들을 품고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화해시키고자 하는 어려운 일에 자신을 바쳐 헌신하게 됩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샬롬을 경험하면서 이 일에 대한 열정을 갖게 되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평화를 세우는 일에 하나님의 도구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화평하게 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선언하시는 때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시대입니다. 로마는 최강의 군사력을 통하여 로마제국에 종속된 국가들 사이의 작은 국지전을 멈추게 하였고, 지중해의 해적들과 육지에서 강도들의 약탈행위를 감소시켰습니다. 전쟁을 수행하는 전선을 제외하면 제국의 영토에서 전쟁은 그치고, 평화로운 세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평화는 억압된 평화이었기에 로마제국의 힘의 균형이 깨어지면 언제고 무너질 수밖에 없는 평화였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불완전한 평화를 기대고 살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히브리적인 의미에서 샬롬은 막강한 로마군의 힘만으로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유대의 열심당원들의 무장봉기를 통해서 성취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샬롬의 출발점은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 간에 궁극적인 조화를 가져오십니다. 우리는 단지 그 분의 대리자가 되어, 세상으로 나가 예수님처럼 사람들과 화평하게 살아가기 위해 자기를 대가로 지불하면 되는 것입니다. 샬롬은 절대적인 힘이 아닌 절대적인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참으로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자기를 그곳에 던지고,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분열과 갈등을 온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회복을 기다릴 수 있어야 하고. 다툼과 갈등가운데 있는 이들을 위해 진정으로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헌신과 희생의 마음과 간절한 기도로 무장하고 나아가 우리들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의 화평을 위해, 또 가정과 이웃과 우리가 속한 모든 공동체의 사람들 사이의 화평을 이루어 내려고 수고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화평의 길을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화평의 중요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과의 화평을 먼저 이루어가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부서지고 분열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누구인지, 우리가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또 많은 경우, 우리 자신을 정말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많은 이들이 내적 갈등을 경험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말하는 것을 종종 듣습니다. “난 정말 멍청한 짓을 했어!” “난 절대로 그것을 정확하게 해내지 못할 거야?”“난 실패한 사람이야” 어떤 이들은 거울 속에 비친 자기 자신을 보면서 혐오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대체로 이러한 감정은 확실한 죄책감이라기보다는 단순히 자신을 무가치하다고 느끼는 자기 비판적인 감정일 경우가 많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렇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를 신속하게 재고하고 재건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자신에게 무가치한 사람들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가치 있는 정체성을 확신 하는 것은 우리 책임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화평을 이룰 수 있고, 자녀로서의 놀라운 혜택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과의 화평함을 이루고 하나님과의 화평을 이룬 후 밟아야 할 다음 단계는 모든 가족들과 우리가 교제를 나누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단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면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와 우리와 이웃과의 관계가 화평한 지를 끊임없이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이처럼 예수님의 화평하게 하시는 사역에 응답하여 곳곳에 들어가 화평의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은 화평함을 이루어가는 사람들을 주목하시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해주시고 저들을 소유하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될 것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새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일컬음을 받게 된다는 것은 그러한 자로 평가되고 간주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긍휼의 하나님, 평강의 하나님을 본받아 그 삶을 살아가고자 하기에 하나님의 아들로 일컬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버지의 품성을 자녀가 닮아가듯이 우리가 닮아가고, 또 꼭 닮은 품성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자녀로서 인정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곧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세를 누릴 수 있게 된다는 선언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사람들에게 우리들의 삶은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행하는 모습으로 비추어지고, 하나님의 아들, 딸들로 그 삶이 투영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린 굉장한 선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됨은 종말에 성도로서 우리가 인정받아야 할 자격입니다. 다툼과 갈등이 충만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화평함을 위해 애쓰는 사람은 종말의 날에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로 살고 있는가?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완전한 화평의 모델이 되어주셨지만, 여전히 이 땅은 다툼 충만, 갈등 충만, 분열 충만합니다. 이처럼 분열과 갈등이 충만한 세상에서 여러분들은 어떤 존재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세상은 원래 소망이 없다고, 화평하게 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냥 세상이 그렇게 흘러가도록 방관하는 자로 서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샬롬을 위해 지금 내 삶의 자리에서 아주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화평하게 하는 자로 서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세상을 모른 체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아들, 딸인 우리들이 하나님의 샬롬을 이루기 위해 할 수 있는 매우 작은 일들이라도 행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만일 우리가 가는 곳마다 다툼과 갈등이 일어나고, 이간질을 하여 분열이 일어나고 미움이 생겨난다면 그건 분명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어느 곳에 갈 때에 형제와 형제 사이에, 성도들 사이에 화목이 있게 되고 서로 간에 분쟁이 해소되고 미움이 사라지고 오해가 사라지고 하나 됨이 이루어지고 화목이 이루어진다면 단언컨대 그런 사람은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화평하게 하는 자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가정에서 우선적으로 샬롬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가정에서 화평하게 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다른 곳에서 화평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결혼을 하고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선 지난 삶의 방식을 수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결혼 전의 두 사람은 다른 궤도로 태양 주변을 돌고 있는 혹성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결혼 후에는 같은 속도로 같은 궤도를 돌아야 합니다. 만일 같은 길을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속도로 돈다면 결국은 둘이 충돌하고 말 것입니다. 이 충돌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요? 부부가 함께 화평을 이루기 위한 일들을 해야 합니다. 어설프지만 서로를 알아가고 공감하고 존대하고 설령 마음에 차지 않더라도 함께 가고자 하는 마음이라면 샬롬은 어렵지 않게 우리 가정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엡5장21절“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고, 남편들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면 가정은 화평하게 될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 간에 화평도 같은 이치입니다. 자녀는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는 자녀를 분 내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말씀으로 양육하고 거기에 서로를 위한 진심어린 기도가 자리 잡고 있다면 부모와 자녀 간의 샬롬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직장에서 내가 직원이라면 성실한 마음으로 행하고, 사장이라면 일한 것에 대해 잘 보상해주고 격려해주고, 칼자루를 함부로 휘두르지 않으면 그곳에 화평이 있습니다. 그런데 진정성 없이 서로 거저먹으려고 할 때 그곳에선 화평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원리는 사회라는 틀 속에서도,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나아가 세계적인 차원에서도 기본원리는 같습니다.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힘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없는 자들을 하대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긍휼의 마음으로 섬기고자 한다면, 예수님처럼 먼저 자기를 희생하려고 한다면 그곳에 하나님의 샬롬이 조금씩 이루어져갈 수 있습니다.
물론 때로 화평하게 하고자 하는 우리들의 노력이 아무 쓸모없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수고는 결코 실패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샬롬을 원하시고, 그것을 마침내 이루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갈6장9절“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항상 삶의 모든 영역에서 평화의 사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현장에서, 그것이 공동체든 사무실이든 학교든 교회든 상점이든 어떤 자리이든지 간에 누구를 만나든 모든 사람들 앞에서 평화의 사도로서 준비되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 마음속에서 우리의 옛 사람이 되살아나 그 못된 자아가 드러나려 한다면 그래서 그 본성이 평화를 추구하려는 우리의 노력에 제동을 걸고자 한다면 우리는 신속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그분께 겸손함으로 순종하고 상대방을 위해 긍휼의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와 함께 우리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성령께서 계시기에 이 일은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오래 전 자신의 모든 것을 내 던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려고 애썼던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서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이와 같은 삶은 곧 하나님의 아들, 딸이라 일컬음을 받는 축복의 길입니다. 오늘 이 땅에 하나님의 샬롬을 이루어가는 도구가 되기 바랍니다. 로마서12장18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이처럼 화평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 딸이라 일컬음을 받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놀라운 축복을 누릴 것입니다. 하나는 우리가 축복의 통로로서 많은 이들을 하나님과 화평하게 하는 자리로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평화의 도구로서의 삶을 기뻐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영원토록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영생의 삶을 약속으로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과 사람을 화평하게 하시고, 사람들을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그럴진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우리는 마땅히 주의 길을 따라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어 다툼과 분쟁이라는 세상의 악취를 내뿜는 대기 속에 하나님 나라의 맑고 평온한 향기를 불어넣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얼마나 행복해지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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