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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설교원고

그리스도인의 선한 영향력 : 마5장13-16절

by 최수근 2014. 8. 17.

2014년8월17일 주일설교문

[ 그리스도인의 선한 영향력 : 마5장13-16절 ]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영향력의 힘

    요즘 대세 영화가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을 배경으로 한 명량이라는 영화입니다. 명량 해전은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구의 배를 맞아 싸워 크게 이긴 전투입니다. 이 영화는 천만관객을 최단기간 내에 훌쩍 뛰어넘어 한국영화사에 획을 그을 만한 추세로 절찬리에 상영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아산 현충사를 방문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었고, 이순신장군 관련서적 판매부수가 늘었습니다. 왜 지금 많은 사람들이 이순신 장군에게 저렇게 열광하고 있는 걸까요?

    임진왜란 당시 나라가 위경에 있는 가운데서도 자기들의 안위만을 위해 날 뛰었던 탐관오리들과 그를 제거하려고 하던 왕 때문에 큰 고초를 겪었던 장군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의종군하며, 어려울 때 자기의 안위를 우선하지 않고, 백성과 나라를 위해 살았던 지도자의 모습을 그에게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이순신 장군은 아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충은 임금을 향한 것이 아니라 백성을 향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위기의 끝에서 백성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놓을 수 있는 그런 지도자가 오늘 없기에 이순신 장군과 같은 지도자를 갈망하며 사람들이 몰려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지금 사람들의 마음속에 감동을 주는 리더도 없고, 누군가에게 깊은 영향력을 주는 리더도 없습니다. 한국사회가 선한 영향력의 힘보다도 오히려 악한 영향력의 힘이 더 커 보입니다. 관피아, 정피아, 독점재벌 등 온갖 이권과 권력만을 쫓아다니는 무리들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경제, 정치, 사회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는 문제들은 이와 같은 악한 영향력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영향력에 물든 이상 누가 나와도 똑같습니다. 이젠 밑에서부터 선한영향력이 이 땅을 새롭게 해야 할 시기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가 아닐까요? 더 이상 나락으로 떨어진다면 회복불능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걸 막아야 합니다. 여러분으로부터 선한 영향력이 흘러가 이 땅을 살리는 일이 시작될 수 있겠습니까? 그럴 때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반문합니다.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자신도 능력도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나약하고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제자들로부터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서 어떤 이들이 복 있는 자들인지를 말씀하신 목적도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의 반대편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갖고 살아가는 이들이 지금 세상에서 구별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선한 영향력을 갖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아무 것도 아닌 자들이지만 예수님은 그런 세상의 편견을 무시해버리시고, 제자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영향력이 있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13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매우 단정적인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근거에서 제자들이 그런 존재가 된다는 것인지, 또 그런 존재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산상수훈의 말씀들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어떤 의도에서 하신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중요한 부분은 너희는 소금이다말씀하시지 않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다는 점입니다. 제자들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위해 살아가야 함을 말씀하신 겁니다. 그와 함께 교회공동체 전체가 세상을 위한 소금이어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소금이요, 빛은 독립된 각 개인들이 각개전투로 수행할 임무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이루어야만 하는 일입니다. 나 혼자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같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공동체를 세우신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소금이란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다른 많은 표현들 대신에 무엇 때문에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을까요? 이 표현은 우리들의 어떤 신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즉 기능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소금의 역할

    소금은 인간생존에 필수적인 것입니다. 소금의 역할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맛을 내는 데 있습니다. 싱겁고 밋밋한 음식에 짠 맛을 통해서 간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무미건조한 세상 속에 들어가 그들의 삶이 의미 있는 삶으로 전환되도록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삶이 무미건조하니까 사람들이 쾌락을 향하여 동분서주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사람들의 무미건조한 삶에 들어가 그들의 삶에 거룩함과 풍미를 더할 수 있는 거룩한 소금입니까? 저들의 삶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선한 영향력을 갖고 있습니까? 이를 위해 우리는 세상과는 다른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고 있어야 합니다. 단지 도덕적인 삶이 아니라 예수님을 모신 작은 예수로 살고 있어야 합니다.

    또 하나 소금의 중요한 기능은 음식을 보관할 때 쓰는 방부제의 역할입니다. 팔레스타인 땅의 기후는 매우 덥습니다. 그래서 고기를 부패하지 않도록 소금에 절임으로써 오랜 동안 저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이 썩지 않도록 하는 방부제와 같은 사명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이 땅에 교회공동체와 성도들이 소금으로서 본분에 충실할 때, 세상의 부패를 가로 막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도덕적 기준이 낮거나, 그 기준이 끊임없이 변하거나, 아니면 아예 없는 세상에서 도덕적인 방부제가 되고, 살균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소금 통에 편안하게 남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소금을 고기에 문질러 배어들게 하듯이 세속 공동체 속에 뿌려지고 녹아들어 나 자신을 희생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파하고 사람들을 돕기 원한다면 소금을 그들의 상처에 박박 문질러, 문제의 이면을 보여 주고 옳지 않은 것을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설탕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 달달하고 기분 좋게 하라고 존재하는 이들이 아닙니다. 소금입니다. 소금은 쓰라리게 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썩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활 속에서의 소금이 쓰임과 함께 팔레스타인에서 소금은 계약체결의 증거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것은 소금이 견실함과 영구함의 상징으로 쓰였기 때문입니다. 레위기213절에서도 하나님은 소제를 드릴 때 반드시 소금을 치도로 명령하셨습니다.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소금의 짠맛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언약도 변함이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확인시키기 위하여 소금을 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백성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향해 변치 않는 마음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향하여 언약백성으로 나아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세상에서 소금으로서 맛을 내야하고 세상이 썩어가는 것을 막아야 하고, 하나님 앞에서 언약백성으로 충성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삶을 위해 우리는 세상이 우리의 영적인 효용성을 희석시키지 못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반면에 구별되지 못하고 주변의 세속적 세계에 동화되어 자신의 소명을 잃어버린 교회공동체와 성도들은 어찌 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쓸모없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소금의 효력은 조건적입니다. 짠 맛을 지니고 있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용도가 다하거나 오염되어 불결해진 소금은 조미료로도, 방부제로도, 언약의 소금으로도 사용될 수 없어 더 이상 쓸모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소금이 그 맛을 잃어버리면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 의해 밟힐 뿐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당시 성전에서 사용된 소금은 수명이 다하면 성전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혔습니다. 일상생활에서도 사람들은 흙을 굳게 하고 누수를 방지하기 위해 집의 평평한 지붕에 폐기된 소금을 뿌렸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 지붕은 아이들의 놀이터로, 단체 회집장소로 사용되곤 합니다. 그러니 용도 폐기되어 뿌려진 소금은 사람들의 발에 늘 밟히는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그와 함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또 다른 역할, 빛으로서의 역할을 부여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어둠 속에 있는 세상을 환히 비추시기 위해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렇게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14절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은 영적인 일들에 관한 한 깊은 어두움 속에 잠겨 있습니다. 그 어둠 속에 빛을 비추도록 예수님은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들이 세상의 빛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빛을 비추려면 외적인 빛의 원천이 필요합니다. 우리들이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의 삶을 통해 빛이신 그리스도를 드러낼 때에 가능합니다. 우리는 분명 빛이 아니라 빛을 보여주는 창문임을 늘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빛이 없는 어두운 곳입니다. 이 어둔 세상을 향해 지금 빛이신 예수님을 여러분의 삶을 통해 드러내며 그 거룩함으로 세상의 어둠을 밝히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시면서 14b-15절에서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이렇게 달리 표현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산 위에 동네처럼 되어야만 하며 환하게 빛나는 등불처럼 되어야만 한다.” 우리들의 삶이 스크린 된 삶이 아니라, 음흉한 삶이 아니라, 거짓되고 가식적인 삶이 아니라 밝히 드러나서 예수님의 제자다운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우리는 빛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삶에서 드러나게 되는 거룩한 빛을 세상 사람들에게 비출 수 있어야 합니다. 16a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말씀드렸듯이 빛을 내는 발광체는 우리가 아닙니다.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모시고 살아갈 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빛 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을 통해서 나타날까요? 바로 일상의 삶을 통해서 보여 지는 우리의 모습 속에서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삶의 거룩함을 드러내어 사람들이 우리들의 착한행실을 보도록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보일지 우리 자신을 성령 안에서 성찰하고, 구원의 온전한 경영을 이루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라고 했는데 이것은 외식적인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도래한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부합된 삶과 행실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팔복의 삶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이 삶을 하나님께 보여드리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도 그 영적인 밸런스가 깨어지면 바리새인들처럼 우리 삶에 혼탁함을 보여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어디에서도, 그 어느 누구 앞에서도 우리는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의 빛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우리를 통해 드러나야 할 빛을 차단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지 못함으로써, 다른 이들의 영적인 필요를 무시함으로써, 죄가 그리스도를 위한 우리의 증거를 약화시키도록 허용함으로써, 부화뇌동하여 세상을 따름으로써 우리는 빛을 차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진리의 등대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계속해서 세상의 빛이신 주님의 빛을 반사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빛이 존재하는 이유는 밝히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무엇을 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비춤으로써 그들이 가야할 길을 도와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이처럼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가 소금이 되고, 빛이 되는 것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습니다. 16b“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우리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드러나야 합니다. 이것은 마태복음61절에서 예수님이 정죄하신 사람들의 태도, 즉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해 착한 일을 행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대조가 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주목해 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느냐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스포트라이트는 모두 하나님을 향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높임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하나님 나라의 의를 따라가며 선한 행실 가운데 살아갈 때, 그 삶은 인간 세상에 지울 수 없도록 뚜렷한 하나님의 사랑을 새겨 놓는 그림의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그 그림을 잘못 그려 우리를 통해서 아버지의 영광이 드러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마음으로 서야만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복음은 신빙성을 잃게 되고, 우리 하나님은 영광을 잃어버리실 것입니다.

    왜 교회가 사람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까? 왜 교회의 지도자들이 세상 사람들의 욕을 먹고 있습니까? 주님으로 인해 욕을 먹고 핍박을 받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복 있는 자이지만 아시다시피 실상은 그렇지 못합니다.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우리들의 거룩한 삶으로서 우리 신앙의 실제를 세상 사람들에게 증명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임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우리 삶을 통해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지 못한 거예요.

    빛을 비추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빛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너무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께서 제공하신 거룩한 향기를 잃어버린 채 변두리에 물러나 앉아있습니다. 영향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세상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우리의 거룩한 삶이 퇴색된다면 하나님 영광의 빛은 우리 안에서 흐릿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선한 영향력

    그러기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구별된 삶을 살아가라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같이 퇴색되고, 죄로 찌든 삶을 살아간다면 어떻게 우리 삶에서 빛이신 예수님이 비추어질 수 있겠습니까? 소금으로서 어떻게 세상의 썩어 감을 막을 있겠습니까? 내가 이미 썩었는데!! 소금은 맛을 잃으면 더 이상 쓸모가 없습니다. 빛은 비출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아니하면 빛이 필요한 곳을 비출 수 없습니다. 이같이 그리스도의 제자는 소금으로 맛을 내고, 썩는 것을 막고, 예수 그리스도의 빛으로써 사람을 비추어야 합니다. 제자 된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있어야 할 위치 선정, 곧 실존의 문제는 그래서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의 소금이시고, 이 세상의 빛이십니다. 온 세상이 볼 수 있도록 언덕 위에 세워진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모든 사람을 위한 희망과 새 생명을 밝히는 등대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예배하도록 이끄셨습니다. 율법과 예언의 가장 깊은 완성인 자기희생의 사랑을 구현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예수님을 생명의 근원으로 의지하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 자기 생활 속에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사람들에게 증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분의 살아계심을 보여드려야 합니다.

    이 세상에 지금 당장 소금과 빛이 필요한 곳은 어디입니까? 우리가 나아가야 하는 세상은 일상생활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지금 우리의 주변 사람들입니다. 먼저 그들에게 우리의 변화된 삶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은 매일의 삶에서의 변화된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삶으로 다름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간다면,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결코 무례하거나 불친절하거나 하지 않을 것입니다. 존경하고, 예의바르고, 사려 깊고, 섬기고, 봉사할 때 우리 주변의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진정으로 차이를 만들어내고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임재의 실제를 증거 할 수 있습니다.

    팔복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지닌 본질적인 성품을 말한다면, 소금과 빛의 비유는 세상에 미칠 제자들의 거룩한 영향력을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영향력은 우리의 성품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안에서 그와 같은 성품들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치들과 대립되는 세계와 분리된 상태에서 심령이 가난하고, 죄를 슬퍼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긍휼히 여기며, 마음의 청결함을 이루며, 화평을 추구하며, 의를 위해 핍박받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복 있는 자들에게 요구되는 기본적인 삶의 자세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에서 소금과 빛이 되도록 의도된 존재입니다. 팔복의 삶을 통해서 우리는 세상의 참된 소금이요 세상을 밝히는 빛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들의 거룩한 영향력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나기 시작할 때 세상을 변화시키고, 이로써 주께로 돌아오는 이들이 많아질 때, 아버지 하나님은 기뻐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끊임없이 우리는 살아가면서 누군가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이것이 긍정적인 영향일 수도 있고, 부정적인 영향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떤 영향력의 사람이 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제자가 된 자들은 거룩한 삶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세상에 선한 영향을 주어야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갈등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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