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8월10일 주일설교문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 마5장10-12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은 일이 있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온유하고 다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고 우리의 마음을 청결히 하고, 화평케 해도 우리는 환영을 받지 못하고, 무시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헌법상에는 분명 종교의 자유가 있지만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물론 목숨까지 위협받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부모에게서, 남편이나 아내에게서, 형제에게서, 친척이나 친구들에게서, 직장에서 소외당하고 핍박받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형제도 제사 때에 절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버지와 친척들에게 심하게 야단맞고 집에서 쫓겨나서 오랫동안 집을 떠나 살았습니다. 자매들도 결혼을 할 때 믿지 않는 집안으로 시집을 가서 오랜 동안 신앙생활을 함에 어려움을 겪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핍박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보편적인 경험은 아닙니다. 예수 믿으면 핍박은 필수야 그러면 누가 믿으려 하겠습니까? 더군다나 요즘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목적 자체가 우선 마음이 평안해지고, 복 받는 일에 있기에 어떤 불이익이 닥쳐온다면 믿음을 쉽게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요즘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으로 인한 고난은 피부에 잘 와 닿지 않습니다. 고난이 온다 싶으면 도망 가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제자들에게 고난은 당연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13장9-13절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마지막 때에 당할 환난을 경고하셨고, 요한복음15장18-19절에서도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고 핍박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그와 함께 빌립보서 1장29절에서“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습니다.
말씀을 종합해보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부터 이미 우리는 고난의 환경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 때문에 가치충돌이 일어나게 되면 언제 어떻게 사람들이 돌변하여 우리를 핍박해올지 모릅니다. 핍박하면 사람들은 굉장한 것들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핍박이란 일상에서 부딪치게 되는 자그마한 불편함 일수도 있고, 언어폭력일수도 있고, 부당한 대우일 수도 있고, 주일에 교회에 못가도록 발을 묶어놓는 경우일수도 있습니다. 이런 핍박의 상황이 닥쳐온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자리를 모면하기 위해 타협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부딪치면서 내가 받고 있는 어려움을 견디며 나가시겠습니까? 여기에서는 소위 말하는 감성지수, 인내력 등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받고 있는 핍박보다 자신의 믿음을 지키는 것이 더욱 가치 있는 일이라면 사람들은 핍박을 견디어 냅니다. 반대로 그렇지 못하면 믿음을 쉽게 버리는 것입니다. 핍박의 순간을 모면하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또 믿으면 되지 하는 생각을 갖기 때문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예수님은 그런 우리들을 향해 핍박은 두렵고 피해야 할 일이 아니라 복된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여덟 번째 복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박해를 받는 자가 복이 있다는 이 말씀에 동의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상식으론 이해하기 힘든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사람의 기본적인 심리는 어려움이 있으면 피해가거나 어려움을 유발시키는 것을 던져버립니다. 그것을 감내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은 인간 이성으로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없는 역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매우 역설적인 이야기들을 팔복을 통해 계속 강조하셨습니다.
우리가 동의하든 않든 간에 예수님은 핍박받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세상의 모든 박해받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제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합니다. 그러기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다는 것은 예수님 때문에 받게 되는 핍박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을 받는 이들이 복되다 하셨지만, 종종 핍박을 받는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이 오해를 하곤 합니다. 실제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자신의 믿음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게으름과 안일함과 영적무지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이름 때문에 핍박을 받는 다고 생각을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가정에서 가정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꼭두새벽부터 교회를 나가 남편이 출근하는 것도, 아이들이 등교하는 것도 챙겨주지 못한다면 당장 불신자 남편에게서 공격이 들어올 것입니다. 주중에 아내 혼자 갓난아이를 키우느라 정신없는데 남편이 주일아침 교회에 가 예배와 봉사, 교제할 것 다하고 저녁 늦게 들어오면 아내가 웃으면서 맞겠습니까? 모든 예배와 신앙의 우선순위가 하나님 섬김에 있다고 해서 가정생활을 도외시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믿는 자식들을 바라보는 부모들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다닌다고 하면서 자기생활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좋아할 부모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렇지 못하니까 교회 나가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들 열심히 일할 때 큐티하고 있고, 교인들과 카톡 삼매경에 빠져 있으면서 상관이 뭐라고 하면 내가 예수님 때문에 핍박받는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지금 있는 삶의 자리에서 자신의 본분을 다하면서 예수님 믿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세상의 부당함 앞에서 침묵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음으로 곤란함을 겪는다면 그것은 바로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을 받는 것이고 그것을 예수님은 복되다고 하시는 겁니다.
또 다른 오해는 자기 신념이나 자기 독선 때문에 받는 핍박을 마치 하나님 나라의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은 바로 11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분명히 예수님을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언제고 예수님을 선택하고 그 분의 이름으로 행동하고자 할 때 세상이 어떻게 돌변할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은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꺼려합니다. 예수님만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외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아주 싫어합니다. 그런 우리 믿음의 고백과 복음의 증거는 오늘도 많은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줄 뿐만 아니라 공격의 빌미를 제공합니다. 왜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냐, 기독교인들이 너무 독선적이라고 비아냥거립니다. 길거리에 나가 예수님을 전해보세요. 상냥하게 전도지를 받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간혹 못된 사람들에게는 낭패를 당합니다. 저도 전도하다가 한 할아버지에게 호되게 혼 난적도 있습니다. 기독교인들, 이 나쁜 것들이라고 하면서 얼마나 몰아붙이시던지요?
박해당하는 교회, 박해하는 교회
초대교회의 성도들도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다가 수많은 박해를 받았고, 처음으로 스데반 집사가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복음이 수리아 지역을 거쳐 유럽 쪽으로 번져갔습니다. 이후로도 로마제국 곳곳에서 황제가 아닌 예수에게만 충성한다는 이유로 박해가 있었지만 저들은 꿋꿋하게 박해를 이겨나갔습니다.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성도들은 활활 타오는 불 앞에서, 굶주린 사자의 포효함 앞에서, 길거리에 줄지어 서 있는 십자가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기뻐하였습니다. 세상이 보면 미친 짓입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목숨조차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수백 년 동안 박해가 가해지면 기독교인들이 줄어들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믿는 이들의 수가 점점 더 늘어났습니다.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영원한 가치를 예수님에게서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예수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걸 발견하면 예수님 때문에 기꺼이 죽을 수도 있는 겁니다.
하지만 박해를 받던 교회가 국가의 종교로 공인되고, 중세교회에 들어서면서 교권과 세상권력이 손을 잡고, 교회가 오히려 세상을 박해하는 일들이 자행되었습니다. 이교도들을 처참하게 처형했습니다. 마녀 사냥으로 수많은 이들이 무고하게 희생되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오히려 핍박을 받는 곳이지 예수님 때문에 다른 이들을 억압하고, 지배하는 곳이 결코 아닌데 자신들의 교권확립을 위해 그와 같은 억압의 정치를 자행했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자 하는 이들, 말씀을 자기들의 언어로 읽고자 하는 이들을 핍박하고 죽였습니다. 그렇게 예수를 위해 고난을 받아야 하는 제자로서의 삶을 상실하면서 교회는 타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영적으로 저들은 더 이상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그 점에서 볼 때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평안해지고, 삶이 윤택해질 때 오히려 영적인 건강을 상실할 위험을 갖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어렵고 힘들수록 모이기를 힘쓰고, 기도하기를 힘쓰게 되는데, 평안하다보면 영적으로 나태함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한국교회를 바라보면서 비판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이것을 혹자는 교회가 박해를 받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박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결코 예수님 때문에 가해지는 비난과 압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붙잡고 있지 못하는 순간 힘을 잃어버립니다.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합니다. 며칠 전 조간신문에 대문짝만하게 한국교계를 대표하는 강남과 강동의 대형교회와 그 교회 담임목사들을 싸잡아 비난하는 광고가 실렸습니다. 이것은 결코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받는 핍박이 아닙니다. 이런 웃지 못 할 상황에서 우리는 한국교회를 위해,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오직 하나님의 영광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이 아닌 하나님에 의해 교회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건 세상의 박해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단지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죽음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박해 당하고 있는가?
요즘 세계는 영적으로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카톡에 종종 이슬람권 국가에서 박해받는 기독교인들의 이야기가 뜰 때가 있습니다. “지금 이슬람권의 기독교인들이 심각한 박해를 받는 상황이니 이들을 위해 기도해주십시오.”라는 내용입니다. 아직도 국가적으로 기독교를 허용하지 않는 나라들이 있습니다. 그곳에선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쉽게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 미국이 이라크 내에 이슬람 반군이 장악한 지역에 공습을 했습니다. 그들로부터 공격받고 있는 이라크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보호한다는 목적이었습니다. 이라크의 기독교인들은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이슬람 국가가 아랍에 세워진 이후에도 1600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그렇게 온갖 핍박을 받으면서도 대대로 신앙을 지켜온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많은 나라들에선 헌법에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어 심각한 박해가 없습니다. 창수 형제가 순교자가 되겠다고 전에 서언을 했는데 한국에선 순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들어나는 박해는 없지만 오늘날 교회가 은연중에 핍박을 당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핍박이 아닌 공동체적인 핍박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사회정의나 올바른 삶을 주장했다고 핍박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전초기지가 바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잣대를 가지고 세상의 빛이 되어 저들의 죄를 들추어내기 시작할 때 스데반에게 달려들어 죽이려고 돌을 던졌던 것처럼 세상은 교회를 향해 돌을 들 것입니다. 소위 소수인권이라는 명분으로 죄악 된 인간들의 삶의 실태를 말할 때 교회는 즉각 공격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잘못된 것들을 말할 수 없게 법적으로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믿음의 삶에 분명 고난이 있다고 하셨는데, 지금 여러분의 삶은 평안하십니까? 하지만 평안하게 보내고 있다면 왜 그렇게 평안한지 생각해보셨습니까? 물론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기에 평안하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직무유기 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우리 안에 영혼을 향한 구령의 열정이 일어나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세상의 가치와 상반되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들이밀면 사람들은 싫어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일을 반복적으로 하다보면 소외당하거나 따돌림을 당하게 될 겁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들고 가는 복음으로 인해 자신의 죄가 들추어지는 상황에 다다르면 결국 너그러움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폭발하게 됩니다. 그렇게 자신의 죄가 하나님의 의를 통해 드러나기 시작하면 사람들의 태도는 두 가지 양상으로 나옵니다. 그 죄를 회개하던지, 아니면 상대를 공격할 것입니다. 하지만 전자가 많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후자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이 두려워서 들추어내려 하지 않습니다. 모른 체 합니다. 피하려고 합니다. 이와 같은 행동은 내 안에 싹터 있는 복음을 무시하고 스스로 타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복된 삶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박해를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가 예수님께 충성함으로 세상의 가치에 반대편에 서 있다는 이유로 우리를 공격하고, 비난하는 세상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저들은 결코 우리를 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저의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히려 긍정적으로 접근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11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욕을 먹고, 핍박을 받고, 우리를 모략하며 악한 말을 한다고 해도 마음 상해하거나 힘들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의 무기력, 나의 실수, 나의 죄가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받는 어려움이기 때문입니다. 한 발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이럴 때 위축되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어렵고 힘들 때 그 고난 자체를, 그 문제 자체를 너무 깊이 묵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늘어나는 것은 깊은 한숨뿐입니다. 자괴감에 빠질 이유도 없습니다. 감정과 이성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영적인 지성에 귀를 기울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다니엘서를 보면 다니엘의 친구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바벨론의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않는다고 해서 엄청난 박해에 직면합니다. 왜냐하면 디모데후서3장12절에서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말씀하고 있듯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타협하지 않는 자들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자세는 두려워하거나 울상 짓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담대하였고, 감사하였습니다. 슬쩍 절 한번 한다고 누가 뭐라고 할 사람도 없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믿음을 지킨 그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은 그들을 불꽃 속에서 지켜 주셨고, 그들을 공격했던 사람들 앞에서도 존귀함을 얻게 하셨습니다. 로마서8장18절“현재의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말씀하였습니다. 예수님도 12절에서 말씀하셨어요.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무엇보다도 전혀 누구도 이 믿음의 길에서 박해받지 않았다면, 그래서 새로운 길이라면 그 길을 가기가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지난 2000년간 많은 성도들이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았지만 그 길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들이 뿌려놓은 희생의 길에서 더욱 담대하게 신앙의 길을 타협하지 않고 걸어가면 되는 것입니다. 타협하니까 오히려 어쭙잖은 신앙을 향해 세상이 돌을 던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서 있으면, 우리에게 능력이 있으면 세상은 감히 우리를 해할 수 없습니다. 이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이기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임이 분명해집니다. 그렇다고 그 모든 핍박이 두렵고 힘든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 불편한 정도입니다. 마음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기지 못하고 타협하거나 모른 체 하며, 자기 믿음을 내려놓는다면 그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수많은 은혜의 선물을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의를 위해 박해받는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하나님 나라를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은 우리를 훈련하시고 연단하십니다. 직접 행하시기도 하시지만 다른 사람들과 환경을 통해서 우리를 담금질하십니다. 쇠가 붉게 달구어지면 해머로 두들겨 쓸 만한 물건을 만들듯이 우리를 제련하십니다. 그렇게 우리에게서 불순물이 빠져나가고, 우리의 내면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순복할 때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도록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팔복과 나의 신앙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은 결코 자연적으로 얻어지는 품성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임하시고 우리의 내면을 만져주시기 시작하면서 자리 잡게 되는데 먼저 우리 심령의 가난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음을 깨닫고, 자신의 영적인 파탄을 회개하면서 애통해 할 때 하나님은 우리들의 상한 마음을 위로해주십니다. 이렇게 겸손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애통해하는 온유한 자로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은 이 땅을 다스리도록 통치권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만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늘 의에 갈급함 마음을 가지고 생명의 떡이시고, 음료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그리스도로 채워진 심령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듯이 긍휼의 마음을 품고 사람들을 대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심령의 채워짐을 통해 우리들의 마음은 더욱 청결해질 것이고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더욱 믿음은 견고해질 것입니다. 그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화평케 하셨듯이 사람들을 화평하게 하는 일에 쓰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 나라를 진실 되게 살아가고자 할 때 세상은 우리를 공격할 것입니다. 심각한 지경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욥이 당했던 고난들처럼 참으로 이유 없어 보이는 일들이 주변에서 일어나면서 힘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일들이 벌어질 때마다 그와 같이 원치 않았던 일과 결과 때문에 신앙의 길을 떠나는 이들이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사탄이 바라는 바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끝까지 나아가십시오.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감사하며, 찬송하며 나아가십시오. 빌립보 감옥에서 바울과 실라가 차꼬에 차여 찬송 부를 때 옥문이 열리고 차꼬가 풀어졌습니다.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모든 억압의 틀이 일순간에 열려지고, 상황이 바뀌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우리들의 동기와 행위와 일과 언어와 사상과 우선순위에서 하나님을 맨 앞에 모시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이 부름을 부담스럽게 여깁니다. 가기 어려운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복을 갈망합니다. 이율배반적인 행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도하신 길에 기꺼이 들어선다면 우리에게 행복한 삶을 보장해주십니다. 왜냐하면 행복은 하나님이 만드시는 것이지 다른 그 어떤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축복은 불투명한 미래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신 여덟 가지 복은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고 그 분의 은혜를 맛본 사람들이 갖는 표지입니다. 이 표지를 우리들 서로에게서 발견하고, 함께 하나님 나라에서만 누릴 수 있는 기쁨을 서로 공유하는 예수생명교회 믿음의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생명교회의 간판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교인인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명분뿐인 신앙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습니다. 온전한 신앙의 삶을 오늘 주님께 올려드릴 수 있기를 소망합시다. 좀 어렵고 힘들어 보이는 것 같지만 이것이 주께로 향하는 옳은 길이고, 이 길을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러기에 이 길에 서 있는 자들이야말로 복된 자라고,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참 제자라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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