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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지켜야 할 가치와 영역: 마 22장 15-40절

by 최수근 2023. 10. 29.

2023년 10월 29일 종교개혁주일예배

[교회가 지켜야 할 가치와 영역: 마 22장 15-40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지난 이천 년 교회의 역사에서 교회를 교회 되게 한 가치들은 무엇일까요? 지난 12년 전 또 하나의 교회가 아닌 바로 그 교회를 찾아가고자 시작된 예수생명교회입니다. 한결같이 우리 공동체를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많은 어려움과 도전 앞에서도 위축되거나 주저앉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작고 강한 교회의 모습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리 교회를 통해 이루어가실 하나님 나라 선교의 비전이 더욱 구체화 되고 열매를 맺어갈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고, 함께 선교의 최전선, 저 변두리로 나가 작고 약한 자들을 품을 수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이를 위해 매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올바르게 분별하고 순종해야 하는 행동이 뒤따라야 할 겁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살아가면서 교회공동체는 수많은 도전에 직면해 왔습니다. 게다가 지난 3년 넘게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를 향해 밀려오는 세상의 파고를 의연하게 뚫고 나갈 수 있기 위해선 이런 상황들을 대처할 총체적인 역량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어느 영역을 강화해야 하며, 우리가 흔들림 없이 지켜가야 할 가치는 무엇일까요?

오늘 마태복음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을 공격하고자 질문해오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대응하시면서 답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옵니다. 정신없이 쏟아놓는 공격적인 질문에 명쾌하게 답변하는 예수님의 말씀 안에 그 답이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 말씀 속에서 오늘 우리 교회가 분명하게 지키고 가야 할 영역과 가치가 무엇인지 나누고자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워지지 않고는 교회가 교회로서 올바르게 작동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향해 자꾸 오작동이 발생하는 것은 그런 연유에서입니다. 그렇게 교회 스스로 신뢰를 잃는 일이 반복되고 있어 마음이 심히 안타깝습니다.

앞에서 혼인 잔치의 비유를 통해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말씀으로 비유를 마쳤을 때 그들은 그 대상이 자기들임을 알아챘습니다. 그러기에 즉시 자리를 떠나 자기들끼리 모여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넘어뜨릴까 상의하였습니다. 상의 후에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계명에 관한 질문을 던지게 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로마법에 저촉될 수 있는 말실수를 유도해내어 예수를 처벌하고자 한 계략이었습니다.

22:16-17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당시 로마제국에 세금을 내는 일은 예민한 문제였습니다. 식민 지배를 받으면서 무거운 경제적인 수탈까지 당하는 처지에서는 백성들이 흥분할만한 주제였습니다. 민감한 사안이기에 지금 예수님이 옳다거나 옳지 않다거나 어떤 대답을 하여도 유대 백성들이나 로마당국에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궁지에 몰려고 하는 그들의 계략을 아셨기에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22:18 “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예수님께서는 악한 의도를 간파당하여 긴장한 바리새인의 제자들에게 세금으로 낼 돈을 내어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데나리온 동전을 예수님께 내어 보였습니다. 그 동전을 쳐다보신 예수님이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동전에 새겨져 있는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그러자 가이사의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렇게 가이사의 것이라는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은 명확하게 세금을 내어야 하는 기준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22:21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이건 뭐라고 평할 수 없는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대답이었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교회는 매우 중요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이것은 세금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세속의 도시에 우리가 서 있는 한 이곳에서 마땅히 해야 할 책임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교회는 세상을 위한 세상에 예속된 단위가 아닙니다.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예속된 신앙공동체이기 온전히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는 분별과 책임이 있습니다.

이 일의 분별에 실패할 때 교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세상을 향해 권위가 설 수 없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바쳐진 공동체입니다. 세상 공동체가 아닙니다. 세상의 권익을 위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신령한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우리 공동체는 이 사회 속에 서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회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감당해야 할 책임과 의무 또한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이건 종속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거룩함은 반드시 지켜야 할 가치입니다. 동시에 세속의 자리에서 교회의 책임 영역을 도외시해서는 안 될 겁니다. 그와 같은 책임 영역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사두개인들과의 논쟁을 통해 교회가 갖추어야 할 영적인 영역을 볼 수 있습니다. 그건 진리의 영역입니다. 진리의 영역에서 흔들리는 교회라면 그건 모래 위에 세워진 집과 같습니다. 언제고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제자들과 헤롯 당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놀라워하며 떠나가자 뒤이어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득달같이 달려와서 물었습니다. 논쟁에 틈을 주지 않고 예수님을 몰아치기로 작전을 짠 것처럼 말입니다. 두 번째 것은 그건 사회 속에서 통용되고 있는 형사취수 제도에 관한 질문인데 그걸 부활과 연결해 매우 비비 꼬아 예수님이 답하기 어렵게 질문을 던진 겁니다.

22:24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이 제도는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여자가 남편이 죽고 자녀 없이 홀로 남았을 때 당할 사회적인 어려움을 보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걸 과하다시피 적용해 예수님을 곤란하게 만들고자 한 겁니다. 그들이 이어서 이야기합니다.

22:25-28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들었다가 죽어 상속자가 없으므로 그 아내를 그 동생에게 물려 주고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그들이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본래 신학적으로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이 부활과 관련되어 질문을 던지고 있으니 상황이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를 부정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자 하나에 남자 일곱 명, 그렇다면 부활한 후 여자는 누구의 아내인가라는 질문에 당황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의 무지함을 질책하시면서 대답하셨습니다.

22: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22: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22:31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22: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예수님은 부활 이후에 사람들의 일상적 삶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분명히 하셨습니다. 이 땅의 살아생전에처럼 장가들고 시집가고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와 함께 32절에서 우리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심을 강조하셨습니다.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하나님께서는 현재 동사를 사용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과거형이 아닙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들이 죽은 자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이들은 여전히 살아있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병행 본문인 누가복음 2038절에서는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라는 말씀 뒤에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느니라라는 말씀을 덧붙여 그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표현하셨습니다.

저는 이 부활 논쟁을 통해 교회가 지켜야 할 영역의 중요한 두 번째를 보았습니다. 그건 진리의 영역입니다. 예수님은 잘못되거나 왜곡된 성경 이해는 우리 신앙을 올바르게 세워갈 수 없음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우리가 붙잡고 있는 진리가 분명합니까?

우리 주변에 참 많은 이단이 있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정통교회들을 교리적으로 공격하고 있습니다. 자기들만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의 공격으로부터 교회를 어떻게 건강하게 지켜갈 수 있을까요? 그와 함께 사회적으로도 동성애 문제, 사회 참여 문제, 생명공학 문제, 정의와 평화의 문제 등 수없이 던져지는 상황에 따른 질문 앞에 서 있어 하나하나 대응하기도 벅찬 것처럼 보입니다.

이와 같은 도전 앞에서 예수님처럼 세상에 답과 길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문을 걸어 잠그고 우리끼리 살아갈 수 없습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것들을 바라보고 과감히 대처하고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람들을 잡아주면서 위대하신 하나님의 창조 질서 회복을 위한 행동을 이어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성경을 잘 알고 바르게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타락으로 빠지는 길은 하나님의 뜻이 명확하게 드러나 있는 성경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들 뜻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교회가 올바른 성경의 진리 위에 세워지지 않으면 교회는 세속 공동체와 무엇이 구별될 수 있겠습니까? 올바른 성경의 진리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기초가 되십니다. 그와 함께 그 성경을 잘 읽어낼 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 합니다. 눈이 어둡고 귀가 얇을 때 언제나 문제가 생기는 법입니다. 우리의 거룩한 지식이 넓어지고 깊어지고 높아지기를 기도합시다.

이렇게 사두개인들이 박살이 나고 물러나자 그 소문을 듣고 바리새인들이 모였습니다. 그중에 율법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여 물었습니다. 그것은 가장 큰 계명에 관한 질문이었습니다.

22: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유대인들은 십계명을 중심으로 해서 613개 조항의 율법을 만들었습니다. 이걸 하나 같이 다 지킬 수 있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이들 사이에서도 이걸 지키기 위한 우선순위는 언제나 논쟁거리였던 겁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의 논쟁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게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를 제시하셨습니다.

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22: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율법사는 613개의 조항 중에서 가장 큰 계명이 나오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각각의 조항으로 답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정신을 묶어 통전적으로 답하셨습니다. 그건 십계명 자체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행동을 했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의 문제를 예수님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이웃 사랑의 계명을 하나님 사랑의 계명과 같은 지위에 놓으셨습니다. 두 번째 계명이 첫 번째 계명과 동등하게 취급된다는 말은 첫째 계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필연적으로 둘째 계명을 실천하고 확증하도록 작용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은 같이 가야 한다는 것이죠. 결코 따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함께 가는 교회이어야 합니다. 성경은 언제나 이 부분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 똑같습니다. 한쪽에 기울어진 것은 진정성을 담지 할 수 없습니다. 그걸 우리는 성경에서 드러나고 있는 인간들의 반복되는 실패 속에서 명확하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웃 사랑의 실천 없이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외면하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반응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어야 합니다. 타자를 향한 사랑의 실제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와 우리의 삶이 하나님이 흠향하시는 산 제사가 되기 위해선 우리를 부르신 소명대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같이 가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엄청난 어떤 결과들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실은 작은 것이라도 아버지의 마음에 울림을 줄 수 있는 작은 산 제물이면 됩니다. 수려한 말의 향연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그분의 시선으로, 그분의 발걸음으로, 그분의 손길로 이 사랑을 약한 우리 이웃에게로 흘려보내면 됩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예배는 시작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이렇게 보여주신 가치와 영역을 지키기를 힘쓸 때 세상 앞에 생명 살리는 교회공동체로 설 수 있습니다.

우리 그런 교회를 꿈꿉시다. 메마른 이 시대에, 거대한 맘몬이 사람들의 마음을 짓누르는 이 시대에, 수많은 우상의 무게에 짓눌려 숨조차 쉬기 어려워하는 이 시대에, 갈 길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이 시대에 빛과 소금이 되어 작은 소망을 나눌 수 있는 그런 교회를 꿈꿉시다.

우리 하나님은 교회가 희망을 잃었다고 사람들이 외치는 지금도 교회를 통해서 일하시기 원하십니다. 지금 이 땅에 누가 희망이 될 수 있겠습니까?

여전히 교회는 세상의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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