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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설교원고

어떤 밭입니까? 마 13장 1-9절

by 최수근 2023. 4. 23.

2023년 4월 16일 주일예배

[어떤 밭입니까? 131-9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이스라엘에선 10월 하순이나 11월 초가 되면 이른 비가 내립니다. 이 비가 내리면 지난여름 말라서 굳었던 땅이 촉촉해집니다. 그 타이밍에 맞춰서 농부들은 밭을 갈았습니다. 그 후에 씨를 담은 가죽 주머니를 허리춤에 차고, 밭에 이리저리 씨를 뿌리면서 나가면, 뒤에서 한 사람이 따라가며 다시 한번 쟁기로 흙을 덮어주면서 파종을 마치게 됩니다.

이렇게 씨를 뿌리다 보니까, 의도한 것과는 달리 씨가 다른 곳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어떤 씨들은 갈아엎은 좋은 땅에 떨어지겠지만, 더러는 밭과 밭 사이에 사람들이 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길에도 떨어지기도 하고, 또는 옆으로 밀쳐놓은 가시덤불에 떨어지기도 하고, 더러는 얇게 흙으로 덮여있는 돌밭에도 뿌려지게 됩니다. 이처럼 파종하는 일은 유대인들이 늘 겪고 있던 모습이었기에 사람들은 별생각 없이 지나쳤던 것인데, 예수님은 그렇게 뿌려진 씨들에 초점을 맞추시면서, 그 씨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길가에 뿌려진 씨는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습니다. 돌밭에 떨어진 씨는 싹이 나왔지만, 흙이 깊지 않아서 해가 돋은 후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말라버렸습니다. 가시덤불 위에 떨어진 씨는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무성하게 자라 결실하니 30, 60, 100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씨들의 결과를 이야기하시면서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13:9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이렇게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것은 땅이 씨뿌리는 자와 그 씨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시기 전에 상황을 보면 바리새인, 서기관들과의 여러 논쟁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반대편에 선 자들이 연합전선을 펴고 있는 이 시기에 왜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셨을까요?

여기에서 씨를 뿌리는 자는 막연하게 씨를 뿌리는 어느 한 사람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씨는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던지신 하나님 나라의 말씀입니다. 씨들이 떨어지는 땅은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비유는 마태복음 13장 이전에 예수님 앞에 나왔던 모든 사람의 마음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똑같은 말씀이 선포되는데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걸까요? 그것은 말씀을 받는 밭인 사람들의 마음의 상태가 어떠냐에 따라서 그 차이가 생겨남을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물론 이 비유의 가장 중심되는 메시지는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어떤 형식으로든지 우리에게 직면하게 될 때, 우리는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기에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비유 말씀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씨와 밭과 열매입니다. 뿌려진 씨는 똑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밭에서는 삼십 배, 어느 밭에서는 육십 배, 어느 밭에서는 100배의 열매를 맺고, 똑같은 씨가 뿌려졌음에도 어떤 밭은 전혀 열매를 맺지 못하였습니다. 이 과정을 보면 밭이 어떤 종류의 밭이냐 하는 것이 드러나는 것은 씨와의 접촉을 통해서입니다. 얼핏 보기에는 다 비슷해 보이는 땅이지만 씨가 뿌려졌을 때 비로소 그 밭의 참모습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아예 싹을 내지 못하는 땅, 싹을 내어도 곧 말라 죽는 땅, 어느 정도 자라기는 하지만 결실에 이르지 못하는 땅, 풍성한 결실을 내는 땅으로 구별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길가, 돌밭, 가시떨기밭, 좋은 땅, 이 네 가지는 말씀 앞에서 선 이들의 마음의 상태를 그리고 있습니다.

길가는 남는 게 하나도 없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뿌리내릴 수 없는 굳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은 냉담하고 무관심한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씨와 땅이 분리되어 있는 그 순간 사탄이 말씀을 빼앗아 간다고 하였습니다. 4:9 “말씀이 길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C.S.루이스가 쓴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 나오는 한 장면이 이와 같습니다.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영국의 한 노신사가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기독교 서적을 한 권 손에 잡게 되었고, 그 책을 읽다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맞아! 나도 이제 제대로 믿고 신앙생활을 해야지. 내 일생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하나님 앞에 나아갈 준비를 해야지.” 그는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머릿속에 점심시간이 다 되었다는 사실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에이. 우선 먼저 밥이나 먹고 생각하자그래서 그는 식당에 들어가서 밥을 먹었습니다. 밥을 먹다보니까 식곤증도 오고, 또 다시 생각해보니 인생이 다 그런 건데 내가 뭐 특별하다고 이 나이에 인생의 길을 바꾸겠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점심을 먹고 나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때 악마는 버스를 타고 돌아가는 노신사 뒤에서 회심의 미소를 짓습니다.

돌밭은 말씀을 받을 때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금방 어떤 어려움이 닥치면 곧 넘어지는 사람입니다. 13:20-21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소위 영적 깊이가 없는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좋을 때는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기다가, 밑으로 꺼질 때는 한없이 내려갑니다. 신앙은 감정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이들은 감정으로 하나님을 만납니다. 좋을 때는 한없이 하나님을 섬길 것처럼 하다가도, 나쁠 때는 철저하게 숨어버립니다. 좋을 때는 가장 잘 믿는 신자인 것처럼 열심을 내어 앞으로 나아가다가, 상황이 바뀌어 폭풍이 일어나고, 파도가 거칠어지기 시작하고, 많은 반대와 부정의 역풍이 불기 시작하면 그들은 자신이 들어선 길에 싫증을 느끼며 다시는 모험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을 합니다.

이러니 돌밭도 결국 남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영적인 피로도만 매번 쌓여갑니다. 오히려 냉담하고 무관심한 사람보다 더 많은 상처를 받고 신앙의 삶을 포기하는데 빠른 사람들이 바로 이 사람들일 것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축복들만을 생각하며, 사실상 그런 축복을 즐기는 것과 제자가 되는 것을 단순하게 동일시하는 겁니다. 따라서 그는 세상에 계속되는 악의 현실에 결코 대처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바라는 신앙인은 아닙니다. “너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처한 그 자리에서 인내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어떻게 이끌어가는 지를 신뢰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결국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널 뛰는 것이 아닐까요?

가시떨기 밭은 각종 세상 염려와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가득 찬 사람들입니다. 13:22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말씀이 뿌려지면 그 안에 세상의 악한 것들이 말씀을 옥죄어 버립니다. 아멘하고 말씀을 받았는데, 금방 말씀의 기운이 사라져버립니다. 말씀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래된 정원에 가서 보면 많은 나무들이 큰 담쟁이 넝쿨에 휘감겨 거의 질식하게 된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한번 담쟁이 넝쿨이 일단 나무를 휘감으면 절대로 푸는 법이 없이 단단히 나무에 붙어서 시시각각으로 나무로부터 생명을 빨아먹습니다. 처음에는 담쟁이 넝쿨도 한때는 위로 올라가는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연약한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그 보잘 것 없던 약한 존재가 차츰 그 힘과 오만을 증진시켜 결국에는 주인행세를 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상 염려와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얽매이다보면 그것이 담쟁이넝쿨 되어 우리를 옥죄고 마지막에는 우리를 집어삼키어 파멸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그 전에 나의 삶을 옥죄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찍어내야 합니다.

길가, 돌밭, 가시떨기밭의 문제는 씨가 자라기엔 적합한 환경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씨를 억누르는 많은 방해 요소가 있어서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제거하지 않는 한 우리는 영원히 길가, 돌밭, 가시떨기밭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으로 인한 결실이 없다면 우리는 건강한 그리스도인이 결코 될 수 없습니다.

반면에 세 가지 종류의 땅과는 전적으로 구분되는 좋은 땅이 있습니다. 좋은 땅에서 자라는 곡식은 막 4:9을 보면 자라 무성하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현재 분사를 사용하여 계속해서 자라나는 것을 가리킵니다. 성장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자라고 열매 맺기 때문에 30, 60, 그리고 100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씨가 자라고 열매 맺기 위해 좋은 땅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단지 땅은 씨앗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13:23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이것은 일회적인 말씀의 수용이 아니라 현재시제를 사용함으로써 말씀을 계속해서 듣고, 계속해서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 듣는 것을 중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앞에 세 가지 밭의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인정하는 것을 여러 가지 이유로 중도에 포기하였지만 좋은 땅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그리고 지속해서 받아들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 차이입니다.

이처럼 좋은 밭에 심어진 씨앗은 아무런 방해만 받지 않으면 스스로 계속해서 자라갈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길가, 돌밭, 가시떨기밭에도 말씀이 자라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들만 제거할 수 있다면, 그래서 말씀을 다시 듣고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그래서 그 말씀을 지키며 살 수 있다면, 좋은 땅처럼 그 씨에서 30, 60, 100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말씀 앞에 방해물을 누가 놓는 것입니까? 사탄입니다. 사탄이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 바리케이드를 치는 것입니다. 굳은 마음, 냉담한 마음의 바리케이트를, 고통과 마음상함과 어려움의 바리케이트를, 세상 염려와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의 바리케이트를 치고 말씀이 자리잡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것들을 거두어내야 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이 부분을 보다 더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815절입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우리가 말씀을 왜 듣습니까? 그냥 좋은 말씀이니까 듣는 것입니까? 들어서 마음에 위안이 되니까 듣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곧 나의 말씀이 되기 위해선 그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여야 합니다. 그 말씀이 내 삶에서 실천되지 않으면 내 말씀이 될 수 없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받고 행함이 없다면 그 사람은 죽은 밭입니다. 믿음은 열매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죽은 밭인데 어떻게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참으로 좋은 땅과 같은 사람이라면 이곳에서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한 복판으로 나가서 그 말씀을 지켜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먹히지 않는 세속적인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지속하기 어려운 사회, 정치, 문화 환경입니다. 물질 만능을 추구하는 본능적인 대중매체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어떤 마음의 상태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오늘 어떤 밭으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 계십니까? 냉담하고 무관심한 밭입니까?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입니까? 세속적인 것들로 인해 말씀이 꽉 막혀 있는 밭입니까?

씨뿌리는 자와 씨는 동일합니다.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것은 땅이 씨뿌리는 자와 그 씨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생산하는 열매도 전적으로 거기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기에 씨가 뿌려지는 순간 좋은 땅으로 반응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때 여러분에게 풍성한 결실로 보상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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