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31일 주일예배설교동영상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마 5장 4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억울한 죽음, 억울한 일을 당하고서도 그 비통함을 위로받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작년과 올해는 코로나 팬데믹까지 겹쳐 참으로 많은 이들이 깊은 우울의 늪에 빠져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이들의 아픔을 공감해 주고 위로해 줄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15절에서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했습니다. 이들을 품어주고, 이들과 함께 울어주고, 공감하고, 고통을 나눌 수 있는 상생의 삶으로 우리를 부르실 때 흔쾌히 응답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아프지 않다고 해서, 누리고 있다고 해서 저들을 더 소외시키고, 저들과 함께 슬퍼하지 않고, 저들을 위로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회는 참으로 메마르고, 성숙하지 못한 사회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보호받지 못한 자, 고통받는 자, 가난한 자, 죄에 억눌려 있는 자, 억울한 사연이 있는 자들을 위한 복음의 소식을 갖고 위로의 메시아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위로가 절실한 사람들을 주목하셨습니다.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위로받을 수 없어 슬퍼하는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위로를 전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어느 곳보다도 이 땅의 교회가 예수님이 주목하셨던 저들을 향해 위로에 힘써야 할 때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마음 아파하는 자들과 함께 울어주고, 저들을 위로할 수 있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저들과 나눌 수 있는 위로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안에 타자를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이 있습니까? 의례적인 인사가 아닌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위로 말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에게 먼저 하나님의 위로가 임해야 합니다. 그 위로로 우리 심령이 채워져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 위로에 힘이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하늘의 위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4절에서 위로받기 위해선 먼저 우리가 애통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애통함은 어느 누구도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세상은 할 수 있는 대로 행복 하자고 말합니다. 향락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쫓고 있는 쾌락과 돈, 에너지, 열광들은 모두 이 애통하는 마음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가 무엇 때문에 복이 있다는 말씀일까요? 4절에서 “애통하는”으로 번역된 헬라어 펜둔테스의 원형인 “펜데오”는 심히 근심하며, 고통스럽게 슬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속으로 삭일 수 없고, 주체할 수 없는 극심한 슬픔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애통해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소중히 여기는 것을 잃어버리는 경우입니다. 그것은 재정이나 사랑하는 사람, 사회적 신분, 또는 건강 등일 겁니다.
그러나 4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고 있는 애통함은 단순히 일상에서 일어나는 상실과 실패와 좌절, 죽음으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애통함은 바로 영적인 애통함입니다.
애통은 외부의 문제 혹은 내부의 문제로부터 시작됩니다. 외부에 대한 애통은 세상의 불의함으로부터 나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를 보면 분배가 공정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부자들과 권력자들에게 유리하도록 짜인 체제의 불의함 때문입니다. 이런 사회적인 불평등 앞에 대항할 힘이 없는 다수의 사람은 그저 살기 위해 침묵합니다. 일부는 분노하며 대항하기도 하지만, 그런 사회의 불의함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 애통해하면서 탄식하는 경건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시편 119:136에서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같이 흐르니이다” 고백을 한 이들이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오늘날 세상의 불의함 앞에서 신앙적 양심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소리 높여 하나님의 공의를 외쳐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단지 분노하고 대적하기보다는 먼저 그리스도인은 사회의 문제를 안고 애통함으로 하나님께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애통의 핵심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한 애통은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한 반응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해서, 세상의 불의함에 대해서 눈물을 흘려야 할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해서 참으로 눈물 흘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원수 되었던 자신의 죄를 바라보면서, 그것들로 인해 깊이 슬퍼하고 철저히 애통해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능과 죄악을 느낄 때 그런 자신 때문에 우리는 슬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비참함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서 자신의 죄를 처절하게 회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죄에 대하여 참으로 애통해하며 슬퍼한 적이 있습니까? 마음이 너무 저며와 소리높여 울어본 적이 있습니까?
진정한 애통은 우리를 하나님에게로 이끌어 갑니다. 죄로 인한 절망감,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괴감에서 일어나는 애통함은 하나님을 의뢰하도록 하는 가장 보편적인 동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죄의 자각으로 일어나는 애통함이 없는 한 진정으로 절대자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애통해하는 마음을 주사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회개함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으니 이게 바로 애통하는 자의 복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 애통함은 소망 없는 사람들의 슬픔과는 다른 결과를 가져옵니다. 세상의 불의함과 자신의 죄악 된 모습을 바라보면서 애통해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일로 인해 좌절하지 않습니다.
왜 세상 사람들처럼 좌절하지 않습니까?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세상은 애통해하는 자를 행복한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될 위로 때문입니다.
“위로를 받을” 것이라는 헬라어 동사 “파라클레데손타이”는 위로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하는 동사입니다. 참으로 애통해하는 자는 사람의 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를 받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위로는 단지 위로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들을 영적 파탄의 상태에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용서해주시고, 구원해주십니다.
더욱이 “파라클레데손타이” 의 시제가 미래형으로 되어 있어 오늘의 위로로 그치지 않습니다. 성도가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 받게 될 위로까지 확장이 됩니다.
계 7: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계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현실적인 역경 가운데 있습니다. 더불어 우리 내면의 죄와 싸우고 있기에 끊임없이 애통하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보혜사 성령을 통해 이끌어주시고, 매 순간 위로해 주실 겁니다. 이렇게 우리 안에 위로가 넘치기에 우리는 복 있는 자입니다.
반면에 애통해하지 않는 이들은 위로받을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해 근심하지 않는 자들, 진정으로 눈물 흘리며 회개하지 않는 자들이 화를 입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6장 25절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죄에 대해 애통함 없이 단지 성전으로 나와 하나님께 번제와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백성들은 자기가 바친 제물이 자신의 죄를 덮을 것으로 생각했겠지요. 그렇게 죄가 사해졌다고 생각하니 안심하고, 행복해합니다. 마냥 웃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증한 자들의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제사를 거부하셨습니다. 자신의 허물에 대해 애통함이 없다면 그 어떤 번제와 속죄제라고 해도 의미가 없고, 그 예배는 죽은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애통해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은 우리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기에 충분한 회개의 슬픔을 염두에 두셨던 겁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죄로 인한 영적 파탄 상태에 대해 늘 주의하고, 우리의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것을 참으로 슬퍼해야만 합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구해 내겠습니까?” 이렇게 애통해하는 고백을 하나님이 받아주십니다.
반면에 자신의 죄에 대해 그 어떤 심각한 부담도 느끼지 않는다면, 그 마음이 점점 무감각해진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이런 이들에게 애통해할 시간이 보장될까요? 그렇게 끝이라면 저들은 하나님의 위로를 결코 누리지 못합니다. 위로받을 수 있는데, 전혀 위로받지 못하는 비극입니다.
예수님은 팔복 중에 두 번째 복으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선포하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삶의 본질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영적 성취에 대한 자만을 버리고,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바라며 애통해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을 보고, 자기 자신을 보면서 회개하고 눈물 흘리며 하나님의 위로를 바랄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시 126편 5절에서 말씀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물론 이와 같은 삶이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거나 그 나라를 개진하기 위한 수단은 아닙니다. 이것을 수단으로 믿고 있다면 더욱더 강화된 율법주의에 빠지고 맙니다. 이것은 하나의 법적 수단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삶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는 팔복의 개별적인 특성들은 스스로 생성할 수 있는 것도, 우리 스스로 그런 삶을 살려고, 배우거나 모방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예수님의 방식대로 살고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제자의 삶에서 성령이 이루어주시는 온전한 삶의 모습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애통하는 자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먼저 성령께서 우리의 강퍅한 마음을 만져주시도록, 우리 삶의 어두운 구석구석을 조명해주시어 죄가 밝히 드러날 수 있도록 늘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성령으로 인해 우리의 삶이 낱낱이 드러나고, 이로 인해 애통하는 우리의 마음은 위로를 받으리라 주님은 선언하셨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죄로 인해 애통함으로 위로를 받은 이들이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갑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시작은 바로 자신의 죄로 인해 애통해하는 것에서부터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그와 함께 이 땅에 위로가 필요한 곳에 주님의 위로하심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애통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위로를 풍성히 받은 자들이야말로 이 땅에서 위로받기를 갈망하는 이들을 품고 함께 웃고, 함께 울어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진정 이 땅에 위로자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 40:1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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