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31일 주일설교문
[귀신을 쫓아내시는 분은 누구신가? 마 8장 28-34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여름이 되면 왜 그리도 귀신 영화가 많이 나오는지?
물론 고도의 과학문명이 지배하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귀신, 마귀가 있다고 믿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귀신의 탓으로 돌렸던 일들을 오늘날 우리가 좀 더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악령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마귀가 사람들을 가장 교묘하게 속이는 것은 마귀가 없는 것처럼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사람들 뒤에서 끊임없이 작업을 합니다.
사람들을 장악하려고 말입니다.
영적인 세계에서 지금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우습게 여길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너무 지나치게 집착해도 문제가 될 것입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악의 세력은 패배했고, 그것들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마태복음 8장을 통해 예수님의 권세가 어떤 것인지 분명히 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통해 이 분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답을 주고자 합니다.
귀신 들린 자들과의 만남
풍랑까지도 잠잠하도록 다스리신 예수님 때문에 배는 안전하게 갈릴리 바다 건너편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곳은 “가다라” 지방인데,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는 거라사로 가셨다고 하였습니다. 두 곳 모두 갈릴리 호수 동남쪽에 위치한 주로 이방인들이 거주하고 있던 지역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을로 들어가실 때에 예기치 못했던 사건이 발생합니다.
무덤 사이에서 귀신 들린 두 사람이 예수님과 제자들 앞에 뛰쳐나온 것입니다.
귀신들린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정신병과는 다른 것입니다.
또한 무덤은 그 당시 부정한 장소로서 사람들이 가기에 꺼려하는 장소였습니다.
그러니 마을에서 쫓겨난 문둥병자나 귀신들린 자들에게는 적당한 은신처가 될 수 있었습니다.
마 8장 28절 하반 절에서 묘사하기를 그들은 몹시 사나운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귀신이 이들을 발작하게 하면 어떤 해를 입힐지 모르기에 동네 사람들도 이들이 있던 무덤길로 지나가기를 꺼려하였습니다. 그렇게 인적이 드물었는데 한 무리가 자기들에게 다가오니까 자신들의 땅에 감히 들어온 예수님 일행을 겁주어 쫓아버리려고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귀신들린 자들의 상황은 매우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서는 그가 군대귀신에 들려있다고 했습니다.
군대를 뜻하는 “레기온”은 군단을 의미합니다. 로마의 한 군단은 대략6천명의 군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수많은 귀신들이 그를 붙잡고 있으니 그의 몸과 마음과 영혼이 비참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로 인해 두 사람은 벌거벗은 채, 괴성을 지르기도 하고, 돌로 제 몸을 스스로 자해하기도 하면서 비인간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철저하게 버림받았고 심지어 자기 자신도 스스로를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들에겐 어떤 희망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귀신에 사로잡혀 비참하게 파괴된 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오늘도 여전히 귀신들은 다양한 루트를 통해 인간 속에 슬그머니 들어와서 인간들의 마음을 서서히 파괴하고자 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 삶이 무너져 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파괴는 사탄의 특성입니다. 이런 파괴의 과정을 묘사한 책 가운데 하나가 C. S. 루이스가 쓴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입니다. 사탄이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 어떤 고도의 전략을 쓰고 있는지 매우 디테일하게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더러운 귀신에게 사로잡혀 비참하게 파괴되어 가고 있는 이들을 위하여 예수님은 이곳에 오신 것입니다.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오늘 어두움의 권세 가운데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됩니다. 그 분을 만남으로써 우리 안에 무너진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지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귀신들린 자들이 뛰쳐나와서 보니까 자기들이 상대하기에는 만만치 않은 분임을 즉각적으로 깨달았습니다. 순간 돌변하여 귀신 들린 자들이 자기들을 방어하기에 급급해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자기들을 괴롭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근거는 아직 자기들이 물러날 때가 아니라는 겁니다.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헌데 이들의 말 속에서 우리는 굉장한 사실을 듣게 됩니다.
마 8장 27절에서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사람들이 질문을 던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답이 뜻밖의 존재로부터 나왔습니다. 바로 귀신들린 두 사람이 예수님을 향해 “하나님의 아들이여”라고 외친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고백은 예수님을 향한 진실 된 믿음의 고백은 아닙니다.
자신들의 능력으로 더 이상 맞설 수 없고, 결국은 예수님에 의해 쫓겨날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단지 그 다음 자신들이 활동할 거처에 관해 예수님과 협상하고자 하는 시도에서 비롯된 고백일 뿐입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 던진 말입니다. 종종 우리들도 마음과는 다른 고백을 할 때가 있잖습니까?
어쨌든 이런 고백을 통해서도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듣게 됩니다.
그와 함께 예수님 앞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애를 쓰는 귀신들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의 권위가 귀신들을 누르고 있음을 마태는 우리들에게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 아들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돼지 떼의 몰살
귀신들은 더 이상 시간이 없음을 깨닫고, “만일 우리들을 쫓아내시려면 돼지 떼에 들여보내 주소서” 간청했습니다. 마침 근처에 돼지 떼가 방목되고 있었던 겁니다. 예수님께서 귀신들에게 “가라” 명하셨습니다. “가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귀신들에 대한 예수님의 권세가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긴 축사의식을 행하실 필요도 없었습니다. 순간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서 돼지 떼에게 들어가자 돼지 떼가 놀라 미친 듯이 바다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귀신들린 두 사람은 귀신이 나가 치유되었지만 그만 돼지 떼가 바다에 빠져 전부 죽었습니다.
이건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까? 돼지들은 많은 사람들의 생계수단입니다. 결국 돼지들을 죽게 한 것은 재정적으로 무책임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와 같은 일을 허락하셨을까요?
이 말을 잘못 오해하면 동물보호자들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사람의 생명을 더 귀하게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와 함께 사탄과 귀신들의 절대적인 목표와 극악함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들의 대상이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파괴요, 죽음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카오스, 즉 혼돈의 힘을 상징하는 호수의 사나운 흔들림을 잠재우셨던 것처럼,
귀신들려 내적으로 바른 생각과 행동을 하지 못하며 몹시 파괴적으로 살아가던 이들에게서 악의 세력들을 물리침으로써 그들을 살리셨고, 삶에 평안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생명을 구원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에게로 다가가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들의 몸과 마음이 회복되고, 새로워질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샬롬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로 인해서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지켜보았고 들었던 가다라 지방의 많은 자들이 두려움에 빠진 것입니다.
거부하는 사람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권위에 직면한 모든 사람들이 그 분에 대한 믿음과 충성으로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혼합된 동기를 갖고서 예수님에게 나왔다가 그를 따르는 것이 안락한 삶에 도리어 위협이 됨을 발견합니다(18-20).
또 다른 이들은 이중적인 충성심을 갖고 나왔다가 예수님에 대한 헌신이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 관계를 위협함을 보게 됩니다(21-22).
또 다른 사람들은 개인적인 일상 자리에 예수님을 모시게 됨으로써 그들의 삶에 닥쳐올 손해를 두려워하곤 합니다(34절). 결국 두려움으로 인해 주님을 거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가다라 지방의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들의 청을 받아들여 왜 애꿎은 돼지들을 죽게 했느냐는 것입니다.
그로인해 가다라 사람들은 예수님께 떠나가시도록 요구합니다.
이들은 이웃이 치료받은 것을 기뻐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위협요소로 보았고, 결국 예수님을 그들에게서 떠나도록 하였습니다.
물론 그들도 귀신들렸던 자의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에게서 상세한 이야기를 듣고 놀라서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러나 가다라 사람들은 두려움만 들었을 뿐 예수님이 참으로 누구신지에 대해 알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 때문에 지역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손해 볼 일이 생기지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이 커지다보니까 예수님께 떠나가기를 간구하였던 겁니다. 몇 명을 예수님이 더 치유하시면 이 지방이 다 거덜 나겠다는 마음이 들었겠지요?
우리가 말씀을 들으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엄청난 이적을 보고, 그것 대해 듣는 다고해서 모든 사람들이 참신앙의 눈을 뜨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준비되지 못한 영혼들은, 그래서 여전히 세상 유익에 마음의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 자들은 그 어떤 것을 보여주고, 들려주어도 자신의 것을 잃지 않고자 하는 마음이 더 강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의 진면목을 보려면 우리가 잡고 있는 것들을 놓아야만 합니다. 그래야 들리고 보이게 되고 그 분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하늘에서 바라보는 인간생명의 가치는 값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 가다라 사람들처럼 돈이 되는 수많은 돼지 떼를 아까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것은 바로 이웃보다 값비싼 돼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던 무리들의 탐욕입니다. 탐욕은 사람들의 마음을 자극시켜 예수님에게 그 지방에서 떠나가도록 간구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하고 있는 무리들의 탐욕과 예수님 앞에서 드러난 그들의 불안감은 그들도 사실상 귀신에 사로잡혀 있음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저들이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사탄의 세력 앞에서 종노릇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섭고 질긴 것인지, 이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아 보입니다.
무리들이 간곡하게 떠날 것을 요청하였을 때, 예수님은 곧 바로 배에 올라 가버나움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모든 능력을 보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기 보다는 오히려 치유로 인해서 발생한 손실을 바라보는 무리들에게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에서 귀신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론 그 사람들에게선 떠나갔지만 여전히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승리를 통해 사탄을 예수님께서 이기셨지만, 사탄과 그 무리들인 귀신들의 완전한 종말은 마지막 심판 때로 연기되어 있습니다. 그때까지 구석구석에서 그들의 힘을 과시하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스크르테이프의 편지에서 드러난 마귀들의 활약상이 곳곳에서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결국 이들에게 농락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심으로써 이 땅에서 이미 하나님 나라의 권세가 승리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심으로 우리도 악의 세력과 싸움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분과 연합함으로써 대적할 수 있음을 확인시켜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의미합니다. 이는 반대로 말해서 마귀의 추방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다라에서 귀신을 쫓아내는 예수님의 사역의 초점은 예수님의 초자연적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심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데 있습니다. 그와 함께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이심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시할 수 없는 하나님의 힘이십니다. 그분을 따르거나 혹은 무서워할 수는 있더라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따라야 하는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며, 이 세상에 알려야 하는 예수님도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마태복음 8장을 통해서 예수님의 권위를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정할 때 알아야 하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훌륭한 사상가가 아닙니다.
단순히 하나님과 더 좋은 관계를 맺는 법을 가르쳐 주시는 분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물리적인 세계에서든 비물리적인 세계에서든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하늘의 권위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그 어떤 종류의 상황도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가다라 지방의 사람들처럼 내 안에 고집과 아집으로, 또는 두려움으로 그냥 나를 혼자 두고 가시라고 외치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전적으로 신뢰하고 따라야 하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의 정체성과 능력의 실체를 접하게 되었을 때 적합한 반응은 무엇이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권위적인 위격과 사명에 조건 없는 신뢰와 충성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경외함으로 존경해야 할 뿐만 아니라 현 상태에서 어떤 위험과 대가를 치르게 될지라도 그가 우리를 부르실 때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오직 그 분을 통해서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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