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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설교원고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마 9장 9-13절]

by 최수근 2015. 6. 15.

2015년 6월 14일 주일설교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마 9장 9-13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어긋난 사람들 

마태복음 91-8절에서 예수님은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찾아온 중풍 병자에게 하나님의 용서를 선언하셨고, 그의 질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이야말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오신 메시아이심을 증언한 마태는 예수님께서 세리였던 자신을 부르시고 자기의 집에서 세리들과 죄인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버리는 장면과 그것을 못마땅해 하는 바리새인들과의 갈등 속에서 예수님의 초점이 점점 더 죄인들에게 맞추어져 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한쪽 편에서는 구원의 길이 서서히 열리고 있는데, 다른 한 쪽에서는 그 길이 점점 더 폐쇄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드는 장면입니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고, 제의적인 일에 최선을 다 함으로써 종교적인 행동에 특심한 자들을 향하시지 않고, 왜 예수님은 그들의 반대편으로 나아가셨던 걸까요 

하나님 나라에서 믿음의 건강함은 단순히 보여 지는 행동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마음의 문제에서 판가름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형식도 중요합니다. 원칙을 지키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이것을 무시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렇지만 본래 하나님의 의도하신 목적을 잃어버리고, 전혀 비본질적인 것을 쫓아가고 있다면 그 믿음은 잘못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왜곡된 것을 다시금 되돌리고자 시도 하신 것이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의 산상수훈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선되려면 우리 안에서 하나님 말씀의 온전한 회복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것은 말씀을 단지 나를 정당화하도록 만드는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진정 말씀 속으로 들어가 그 속에서 우리 자신의 본 모습을 발견하고 말씀이 나를 새롭게 하시도록 주도권을 넘겨드림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나의 의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의로 살아가게 하는 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초기 사역 때부터 믿음 안에서 본질이 아닌 비 본질에 충실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자신들의 거룩함과 의를 내세우는 자들을 찾으시기 보다는 전혀 그렇지 못하지만 그래서 그들 안에서 어떤 종교적인 가능성도 갖고 있지 못한 자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자들을 찾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자들이 누구인지를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단지 자기의 필요에 따라 찾아와서 예수님을 선택하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런 선택은 예수님께서 거절하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필요에 따라 예수님이 직접 찾아오셔서 사람들을 선택하셨습니다. 마태를 찾아오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주목하여 보셨고, 그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9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마태는 세리였습니다. 당시 세리들은 로마의 세금 징수를 맡았던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로마 제국을 위해서 일하면서 그 권세를 등에 업고 사람들에게 세금을 무리하게 부과하고 징수하여 부를 축적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습니다. 유대 사회는 그런 그들을 회당에서 출교시킴으로 그들을 소외시켰고, 그들과 함께 가족까지도 멸시하였습니다. 그러니 더 자기들끼리 똘똘 뭉치고 악랄해졌겠지요. 

여느 때와 같이 마태는 가버나움 변두리 해변의 끝을 통과하는 지역에 세워진 세관에서 이 지역을 넘나드는 사람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마태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좀 황당한 일 아닙니까? 이것은 전혀 예고된 부름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부름 앞에 선다면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마태의 반응은 매우 즉각적이었습니다. “일어나 따르니라.”

마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아마도 그가 즉각적으로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에 대한 전 이해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는 가버나움의 여느 사람들처럼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을 것이고, 예수님의 기적도 보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 분에 관해 수군거리는 것을 들으면서 경이롭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앞에 서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순간 마태는 거절할 수 없는 권위 앞에 순종했습니다.

수면 위로는 드러나 있지 않지만 성령께서 오늘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일이 이와 같습니다. 성령님은 사람들의 두터운 외곽을 조금씩 금이 가게 하십니다. 바로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일을 하시는 겁니다. 복음의 내용이신 예수님이 그 사람 속에 뿌리내릴 때 구원의 문은 점점 더 확장이 되고 그 마지막은 예수님께서 찾아오심으로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선택은 우연이 아닙니다. 마태를 제자로 삼기로 작정하셨기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냥 마태를 찔러보신 것이 아닙니다. 그의 무의미했던 일상을 깨뜨리시고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도록 제자로 부르시기 위해 이미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도 그렇게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시기 전까지 세리로 살았던 마태의 생활이 어떠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무더운 세관에 앉아서 이곳을 넘다드는 사람들에게 세금을 받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달가워하지 않았겠지만 그는 막대한 돈을 벌었습니다. 만일 그 일이 마냥 즐겁고 행복했더라면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순종했을까요? 그런 일은 단연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세금을 걷어 부자는 되었겠지만 마냥 그 생활이 즐겁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외치시던 주님의 음성이 그의 답답한 마음을 두들겼을 것입니다. 그 이후로 그는 예수님을 주목해 보았을 것입니다.

이걸 보면 복음의 힘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보게 되요. 이걸 우리가 안다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개의치 않고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 사람은 안 될 것 같아 생각하는 것 자체가 바리새인들과 같은 사고입니다. 이와 같은 영적인 초벌작업이 있었기에 마태는 의미 없는 시간 속에 사로잡혀 있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 없던 시간 속으로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자신을 불렀을 때 마태는 거부할 수 없었던 겁니다. 그 부르심의 순간이 마태는 분명 치유의 기적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두 가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누구도 거들 떠 보지 않았던, 모든 사람들에게 경멸을 당하고 미움을 받고 있던 한 사람, 세리 마태에게 일부러 신경을 쓰셨다는 사실입니다. 위대한 스승이 그에게 옴은 지금까지의 고독이 치유되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모른 체해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그래 투명인간처럼 취급해도 외로워하거나 마음 상해하지 마십시오. 세상이 우리를 무시한다 해도 누가 우리를 주목해 보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다른 하나는 마태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세금 징수는 돈이 벌리는 직업이었습니다. 그 자리를 버린다는 것은 돈을 버리겠다는 결단이고, 다시 그 일로 돌아가는 것 또한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는 자신의 현재의 삶을 탈피하고 메시아를 따름으로 뭔가를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 기대가 돈보다, 안정적인 직업보다 컸기 때문에 마태는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안정된 직업과 세리로서 누릴 수 있는 부귀를 버리고 주님의 부르심에 즉각 응답한 것을 통해 마태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도의 전형적인 모습을 강조하였습니다.

마태는 이 장면을 통해 우리 자신에게 넌지시 질문을 던져보도록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해 "나를 따르라" 명령하셨을 때, 과연 우리는 이 명령에 자신의 모든 것을 미련 없이 버리고 일어나 주님의 뒤를 좇아 제자의 길을 걸어갈 결단을 내릴 수 있을까  마태는 보장된 직업과 부요한 생활방식을 버리고 일어나 좇아갔습니다. 그리스도를 좇겠다는 결정은 때로 어렵거나 고통스러운 선택들을 요구합니다. 이 때 우리는 마태처럼 그리스도를 좇음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내버릴 수 있을까요? 성경에서 말하는 제자도는 이처럼 래디컬 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버리는 것들보다 주님을 따름으로서 누리는 것이 더욱 큼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고민하지 않게 되겠지요? 

죄인들과 함께 앉았더니

이렇게 예수님을 따른 마태가 첫 번째로 한 일은 예수님과 다른 제자들을 위해 자기 집에서 연회를 베푸는 일이었습니다. 이 연회에는 많은 세리와 죄인들 또한 초대되었습니다. 10"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마태는 왜 이와 같은 일을 기획했을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따르기로 한 결정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자리였을 것입니다. 이 일을 통해 돌아갈 다리를 끊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자기가 만난 예수님을 동료들에게 소개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저들 또한 자신처럼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인생이 바뀌기를 소망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만난 이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그런 마태의 초대에 예수님은 기꺼이 응하셨습니다.

하지만 세리의 초대에 응해 그 집을 방문 일은 유대 사회에서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입니다. 더군다나 유대인들에게 세리와 죄인들, 이방인과의 식사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함께, 혹은 이방인의 집에서의 식사를 꺼려합니다. 그러니 예수님과 제자들이 마태의 집에 가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셨으니 문제가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이 이렇게까지 확대 되리라 예상하지 못하셨을까요? 예상하셨을 겁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행하셨을까요? 예수님은 그들에게서 잘못 굳어버린 율법적인 틀을 깨고 싶으셨습니다.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방식이 어떤 것인지, 그와 함께 앞으로 세워질 교회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 그 길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자 하셨습니다. 그와 함께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이야 말로 그들의 위로가 될 것이고, 그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적대하는 바리새인

이처럼 새로운 하나님 나라를 열어 가시는 예수님이셨기에 그에 따른 적대자들이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경직되고 좁은 소견으로는 예수님의 행동이 납득이 가지 않았던 겁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따지듯이 묻습니다. 11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죄 사함의 권세를 보여주신 예수님께서 세리였던 마태를 제자로 부르시고 그의 집에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신 것은 메시아로서 지극히 당연한 행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행동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바리새인들은 그냥 넘어가지를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을 충격적이다 못해 수치스러운 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예수님을 조롱하기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11:19)라고까지 하였습니다. 

이렇게 이 땅의 관습에 철저하게 매여 있는 이들은 하늘의 새로운 질서를 수용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가려고 하면 우리 안에 전제들, 우리 자신의 원칙들을 깨뜨려야만 가능해지는 것임을 완고한 바리새인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이 벽을 넘어서지 못하면 우리는 예수님 없는 종교생활을 할 뿐입니다 

바리새인의 이와 같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죄인의 대명사처럼 여겼던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의 교제를 나눔으로써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죄 용서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 분명한 행동언어로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야 말로 하나님과 인간이 공동식탁에 참여하는 용서와 긍휼의 나라임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자기들의 의를 내세워 그렇지 못한 자들과 편을 가르고 그들을 무시하고 고립시키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실은 이런 일들이 이 땅에 비일비재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도덕적이고 영적인 감염원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것이 자신들의 임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들과 교제하기에 앞서 그들이 변화되기를 기대하면서 이런 사람들과 관계를 갖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치러 온 의사이셨기 때문입니다. 의사가 스스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으려고 격리실 안에 들어가 있으면 어떻게 병든 자를 고치는 소임을 다할 수 있겠습니까?

병든 자에게 

그러기에 예수님은 의사로서의 자신의 사명이 건강한 자가 아니라 병든 자에게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12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 데 있느니라.”   여기에서 건강한 자는 누구겠습니까?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의인이라고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세리와 죄인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만 살 수 있었기에 예수님은 저들을 치유하시고자 그들의 자리로 다가가신 것입니다.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의 긍휼에 굶주려 있었던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세리와 죄인들로 대변되는 이 땅의 죄인들을 향해 그 어떤 긍휼의 마음도 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품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피해야 할 대상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심각한 영적 오류에 빠져 있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호 66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좀 가서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3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선지자 호세아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열심히 제사를 드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 안에는 사랑이 없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그들에게서 진정 원하시는 것이 단지 종교적인 열심이 아니라 긍휼의 마음, 사랑의 마음을 원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만 잘 드리면 자신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사고를 책망하며 백성들 안에 긍휼의 마음이 있어야 함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런 잘못된 사고가 바리새인들에게서도 반복되고 있음을 예수님께서 보셨던 겁니다. 이것은 주전 8세기 이스라엘의 문제만이 아니라 주후 1세기를 살고 있던 이스라엘의 문제였고, 바로 오늘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웃을 향한 긍휼의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으면서도 제의적인 양식의 실천에만 의존하며 거기로부터 자신들의 거룩함의 근거를 찾고자 했던 이들의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은 아닌지?

바리새인들은 마태와 같은 세리와 죄인들을 경멸했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런 바리새인들의 태도를 참을 수가 없으셨던 겁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마태와 같은 죄인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따를 때 그들을 환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잔치에서 불쌍한 이웃을 제거시켜 버렸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의인으로, 세리와 죄인들을 죄인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바리새인이나 세리와 죄인들이나 모두 죄인입니다 

하나님 보실 때 건강한 사람이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안에 자리 잡은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보면서 그들을 정죄하는데,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이 그와 동일한 죄라는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품고 있으면서도 의사에게 찾아갈 필요성을 조금도 느끼지 않습니다. 자기가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결코 의사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다른 사람을 감염시켜 다 죽게 만드는 슈퍼감염원가 되는 겁니다 

이렇게 의사가 필요 없는 건강한 사람이라고 자부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이 말씀을 오해하고 들으면 예수님께서 인간을 의인과 죄인이라는 두 부류로 나누시는 것처럼 들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오심의 초점이 어디에 있느냐를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죄인입니다.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죄 가운데 빠져있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구원의 부르심에서 예외인 사람은 없습니다. 그로 인해 죄인이라고 치부되어 왔던 사람들에게까지도 동일하게 하나님 나라를 소망할 수 있는 명예로운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말씀에는 바리새인들 또한 죄인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들이 죄인이기 때문에 그들도 회개할 필요가 있고, 그들 또한 예수님을 더욱 필요로 하는 자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끝내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가 아니라, 자기의 행동을 통해 자신을 의인시하고자 하는 인간들은 구원의 혜택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진정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불행입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자기 의에 사로잡혀서 자신의 굳은 죄성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죄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금 회복시키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나오는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그들과 함께 어우러지시는 모습을 복음서를 통해 반복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초대 교회이래 오늘의 교회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인들은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그들과 함께 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따라 행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은혜가 정작 필요한 이들과 함께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바리새인처럼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모습이 지금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우리 안에 있는 것은 아닌지요?

예수님은 단지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치유하시는 의사이십니다. 죄는 종교에 의해 치유되지 않습니다. 이 영적인 질병은 종교적인 의를 시도함으로써 치료되지 않는 것입니다. 죄는 오직 위대한 의사에 의해서만 치유됩니다. 위대한 의사가 없다면 인간은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위대하고 헌신적인 의사이신 예수님을 통해 먼저 치유 받고, 그 복음을 들고 이웃과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죄인들에게 구원을 베푸심은 바리새인의 삶의 방식을 위협하는 것이지만 예수님께서 선포하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은 오셔서 그들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치유해 주실 것입니다.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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