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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설교원고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 마 9장 14-17절

by 최수근 2015. 6. 21.

2015년 6월 21일 주일설교문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 마 9장 14-17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며칠 전 저희 집으로 이단인 하나님의 교회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신문을 보여주며 자기들이 대통령상을 받았다는 겁니다. 지난 몇 년간 해양환경보호, 재난구호활동 등의 공로를 치하하여 제20주년 바다의 날을 맞아 단체상으로서 최고의 영예인 대통령상을 받은 것입니다 

그 뉴스가 실린 신문을 보여주는 저들의 저의가 무엇이겠습니까? 자신들은 꽤 괜찮은 종교단체임을 어필하려는 거겠죠? 그래서인지 많은 이단들이 사회봉사활동에 열을 올리고 그것들을 선전하느라 바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 가운데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와 부활의 능력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자기들의 공로와 업적만 있을 뿐입니다. 더군다나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를 그들의 교주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단들이 끊이지 않는 것은 결코 남의 탓만은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도 절대 타협불가인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 중심에서 조금씩 밀려나고 있고, 그와 함께 다분히 도덕적이고, 심리 치료적인 이신론의 경향이 조금씩 짙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단들이 교인들을 비집고 들어올 수 있는 틈이 그만큼 벌어져 있습니다 

도덕주의적이고 심리 치료적인 이신론의 배후에는 우리가 우리의 행위로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수 있고 또한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 의지를 이야기한 펠라기우스의 주장과 같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시작부터 대두되어온 이단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기실현과 자기 성취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의 역사가 결코 아닙니다.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런 연유로 사람들은 십자가가 과거의 죄로부터 구원할 뿐 구원받은 이후에는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정결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곤 합니다. 의미 없는 자기 수련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참석한 수많은 예배, 모든 종교 활동, 매일 묵상, 성경 읽기, 성경공부, 심지어 금식 등을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리 열심을 다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단지 자기만족에 그치고,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그로 인해 우리의 허물을 덮어 주시는 그 분의 대속의 은혜가 없다면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아무짝에도 쓸모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를 구원하고 거룩하게 하고 성도로서 지탱하게 하는 힘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과 부활의 능력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과 함께 하지 않는 한 구원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우리의 취향이나 오해로 인해 축소되거나 왜곡될 때 우리는 이단의 공격에 노출되거나 우리의 지체들을 공격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914-17절에서 벌어지고 있는 금식논쟁에서도 그와 같은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금식하는 데 

마태복음 99-13절에서 바리새인과 더불어 죄인들과의 식사 논쟁이 끝나자 바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금식에 관한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그 당시 소위 경건한 유대인들은 일주일에 두 차례,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을 했습니다. 세례 요한도 금식을 했고, 그의 제자들도 스승의 금욕주의적 습관을 따라 자발적으로 금식에 참여를 했습니다. 게다가 모든 유대인들은 일 년에 한 번 속죄일에는 의무적으로 금식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 날도 예수님께 금식을 종용하는 것으로 보아 전통적인 금식의 날이었을 겁니다. 더군다나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스승인 세례 요한이 옥에 갇혀 있기에 더욱 슬퍼하며 금식하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들은 금식하고 있는데,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고 있는 겁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그런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마음이 꽤 상했는지 예수님께 단도직입적으로 묻습니다.

14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이들의 질문을 잘 들어보십시오. 문제가 없습니까? 아니 문제가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라고 말함으로써 자신들의 행위와 바리새인의 행위라는 기준점을 예수님께 들이밀었습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도 자신들과 바리새인들처럼 유대교의 전통에 따라 금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저들에게 있어서 경건의 바로미터는 그들의 전통을 수행하느냐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기준이 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과는 멀어지는 출발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통에 따른 금식에 대해 하나님께서 거듭해서 거부하셨던 경험을 이미 갖고 있었습니다. 본래 금식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과는 다른 방향으로 변질되어 금식이 마치 경건의 바로미터처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의 대표적인 행동처럼 비쳐 진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616-18절에서 사람들을 향해 외식으로 금식하지 말라고 경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했지만, 그 행함 또한 어떤 마음으로부터 시작되었는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종교적이고 관습적인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은 끊임없이 반복되어 왔습니다. 인간의 전적 타락이 아닌 인간 안에 가능성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의 교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의 정체성을 종교적인 행동에서 찾습니다. 나아가 온갖 종류의 행위와 의식들을 지키면서 자기 의의 기준에 못 미치는 사람은 누구라도 믿음에 충실치 못한 사람으로 판단하고 정죄하곤 합니다.

그러기에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예수님을 향하여 어찌하여 금식하지 아니합니까?”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이들에게는 그들의 행위를 통해 어떤 안식도 누리지 못합니다. 위로와 기쁨도 없습니다. 오직 반복적인 저들의 행함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거룩함에 이룰 수 없고, 우리의 행함만으로는 결코 죄의 문제를 넘어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죄책감만 더 가중 되고, 그로 인해 금욕적인 자기 괴롭힘의 단계만 더욱 깊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점점 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져가게 될 뿐입니다 

그 점에서 우리의 신앙적인 행동의 기준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이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리 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 신앙의 기본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 진정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 지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에 집중하다 보면 결국 율법주의로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대게 율법주의에 빠진 이들은 어찌하여하면서 자신들의 신앙적 경건주의를 내 세우면서 자신들의 우월성을 주장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어리석고도 또 무서운 종교적 편견과 독선입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모습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이들의 행동이 아닙니다.

새로운 시대 즉 하나님의 나라에 적합한 삶은 다른 사람의 행동을 자기 의에 기준에 따라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고, 때론 용서하고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행함으로 자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던진 질문은 하나님 나라의 의가 아닌 자기 자신의 의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의 잘못된 믿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던진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 비유를 통해서 대답하셨습니다. 혼인집 비유와 생베 조각 비유, 그리고 새 포도주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전혀 이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가 도래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먼저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혼인집 비유를 통해 왜 예수님께서 금식하지 않으시는지 대답하셨습니다.

15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유대의 결혼식에서는 혼인 잔치가 일주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웃고, 노래하고, 춤추고, 모든 경비는 신랑 가족이 다 지불하고, 모든 손님은 그냥 즐길 뿐입니다 

여기에 금식은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금식일인 월요일이나 목요일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날이 결혼 예식 기간 중이면 금식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결혼의 기쁨이 금식으로 인하여 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 신랑의 손님들이 어떻게 슬퍼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신랑과 함께 웃고 마시고 함께 기뻐하는 혼인집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지금이 바로 신랑과 함께 먹고 마시는 혼인잔치의 때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금식이 필요하겠습니까?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아직도 새 날, 즉 메시아께서 오기를 금식하며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날이 임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임했고,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흐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각종 질병으로부터 치유되었습니다. 귀신들이 물러갔습니다. 죄 사함이 선언되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되었습니다 

그렇게 고대하던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신랑으로 오셨고, 하나님 나라의 잔치가 벌어지고 있으니 당연히 사람들은 기뻐해야지 슬퍼하며 금식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이미 스승인 세례 요한을 통해서 메시야가 오셨음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스승은 메시야를 예비하는 자인데 제자들은 그 길을 막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의도가 금식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무려 40일 동안 금식하셨습니다. 초대교회도 기록에 의하면 일주일에 두 번 금식을 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단지 자기의 의를 드러내고자 하는 수단으로서의 금식이 필요 없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은혜의 길이 새롭게 열렸기 때문입니다. 새 언약의 백성들에게는 금식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채워짐을 통해 살아가는 새로운 양식의 삶이 주어졌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금식할 때가 아니라는 거예요. 날마다 예수님을 먹고 마셔야 합니다. 하루에 적어도 세 끼를 먹습니다. 우리가 밥을 먹지 않으면 우리 몸이 죽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먹지 않으면 우리의 영적 생명이 죽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생명의 떡과 생명의 음료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짐으로 누리는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매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은 단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살고 밖에 있으면 죽습니다.

생베 조각과 낡은 옷 

예수님은 이어서 생베 조각 비유와 새 포도주의 비유를 들어서 새로운 언약의 도래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말씀하셨습니다.

16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옷감을 헌 옷감에 대어 기워놓으면 당장에는 괜찮아 보이겠지만 그 옷을 물로 세탁할 경우에 새 옷감이 줄어들면서 헌 옷감을 잡아당겨 옷에 주름이 지거나 찢어져서 옷 전체를 망가뜨릴 수 있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이 말씀하고자 하시는 의도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옛 전승을 임시변통으로 짜깁기 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새로운 옷을 주려고 오셨습니다.

물론 이것이 구약을 폐지하신다는 급진적인 주장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과거의 가르침을 폐지하거나 반대로 과거의 가르침에 단순하게 덧붙인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본래 주셨던 옛 언약의 근본정신을 밝히고 이를 형식적으로 준수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온전하게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나 바리새인이 행하던 형식적인 금식과 같은 일에 종속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분과 함께 먹고, 마시고, 그 분을 통해서 채워져야 하는 새 언약의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자기 의의 성취라는 낡은 옷을 벗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새 옷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이것을 보충 설명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가죽 부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17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발효가 되지 않은 새 포도주는 가죽 부대에 넣어두면 차츰 발효가 되어 처음보다 더 큰 부피로 팽창하게 됩니다. 그 때 낡은 가죽 부대는 탄력성과 신축성이 없기 때문에 새 포도주의 팽창력을 견디지 못하고 터지게 됩니다 

이 비유처럼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려면 옛 질서가 아닌 새 질서가 필요합니다. 더 이상 자기의 의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연합함을 통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올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 시대가 이미 도래 했음에도 불구하고 옛 질서를 고집하였습니다 

결코 새 가죽 부대가 되지 않으면 복음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 바리새인들이나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받아들이기 위하여 구태의연한 과거의 기준에 얽매여서 예수님을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먼저 변화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들은 옛 것을 고집하느라 정작 하나님의 구속사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끝내 거절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변화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겸손하게 귀 기울이고, 성령님의 소리에 순종할 때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래야 새로운 복음의 질서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수하게 귀 기울이지 못했습니다 

새 부대로 준비되어 

이처럼 죄인들의 죄를 속하시는 예수님을 통해 금식을 이해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속죄일에 유대인들은 모두 금식하고 슬퍼하며 자신의 죄를 속죄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의 멍에를 벗어버린 사람들은 자신의 죄가 벗겨진 것에 대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잔치를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만난 사람들의 기쁨입니다 

이것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완전히 새로운 개념이었습니다. 또한 지금도 도덕주의적이고 심리 치료적인 기독교에 빠져 있는 이들에게서도 부족한 개념입니다. 그러기에 여전히 자기들의 노력으로 거룩하신 하나님께 다가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지금 새 일을 행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새로운 은총에 응답하는 새 방법을 찾을 때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삶의 양식은 바로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55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하셨습니다. 우리 자신의 의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못한 존재들로 전락되고 말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이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행하고 계신 일을 찾아내어 기뻐하기 보다는 우리가 뭔가 해야 하지 않을까 조바심내곤 합니다.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오히려 부자연스러워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주님의 잔치자리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마귀의 궤계일 뿐입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은혜의 표지들에 대해 민감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 은혜의 표지들 속에서 진정한 기쁨의 이유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표지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새롭게 행하신 구원의 역사 한 가운데 있다면 어떻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되었고,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지금이 금식할 때가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기뻐하고 즐거워할 새로운 은혜의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이 말씀을 통해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은혜를 갖고 오셨습니다. 은혜는 실제로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얻는 것이 은혜를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신 복음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둠은 물러가고 새 날이 밝았습니다. 밤에 적합했던 일들이 이제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낡은 부대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담아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유대인들은 낡은 인본주의 종교 의식을 버리지 못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었습니다. 그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라는 영생의 은혜를 헛되게 땅에 쏟고 말았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그들이 받은 고통은 너무나도 컸고 혹독했습니다. 지난 세계사를 통해 그 고통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새 언약의 시대에 새 부대로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도록 그리스도 안에서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은혜를 담지 할 수 없는 낡은 부대를 버리고, 새 부대로 우리를 하나님께 날마다 드립시다 

그렇게 우리의 의가 되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나를 새 부대로 드릴 때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 클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우리의 삶에서 더욱 확장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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