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2월17일 주일설교문
[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 빌3장2-9절 ]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1. 사순절
오늘은 사순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지난 재의 수요일부터 시작해서 주일은 빼고 부활주일에 이르기까지 40일간을 교회력으로 사순절이라고 합니다. 처음 사순절은 부활주일에 세례 받을 사람들이 세례를 위해 준비하는 기간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며 자기를 부정하고 참회하는 절기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사순절 기간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앞에 서기까지 경건함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주님 앞에 이 사순절 절기를 지내며 어떤 신앙의 삶을 보여드려야 하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가 보다 성숙해지는 절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관계가 무르익고 성숙해질 때 거기에 열매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사순절 절기를 보내면서 보다 더 그리스도에게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과 거리를 둠이 필요합니다.
2. 세상 밖으로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세상과는 구별된 자리로 이끌어가고자 하십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세속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이들과 구별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의 믿음을 좀먹고, 잘못된 길로 이끌어가는 옛사람의 가치들과 단절이 요구됩니다. 빌립보 교회 안에서도 사도 바울의 권면을 통해 그와 같은 단절이 요구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이미 바울이 전한 복음을 왜곡시키고, 파괴하고자 하는 유대인 거짓교사들의 활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할례를 끊임없이 주장하였습니다. 여전히 자신들의 공로를 내세운 것입니다. 그런 그들의 주장과 행동에 대하여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강력하게 삼갈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2절에서 바울은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고 경고합니다. 지혜가 여기에 있습니다. 해로운 것은 그 곁에도 가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자들은 그 곁을 얼쩡거리다가 해를 입습니다.
2절의 말씀을 보면 여기엔 거짓교사의 특징이 세 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째, 개들입니다. 개는 유대인이 아주 추악하게 여겨 접촉하기를 꺼리며, 경멸하던 동물인데, 그들은 이 용어를 이방인을 경멸하는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반대로 교회를 찾아다니면서 공격할 대상을 찾는 유대 율법주의를 신봉하는 거짓교사들을 떼를 지어 다니면서 먹을거리를 찾는 개들로 묘사한 것입니다. 이건 사랑스런 애완견 수준이 아닙니다. 사람들을 헤치는 사나운 들개수준인 것입니다. 둘째는 행악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이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자랑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복음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복음의 뜻을 심각하게 훼손시키는 악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이들을 행악하는 자라고 한 것입니다. 셋째는 몸을 상해하는 자들로 ‘손할례당’이었습니다. 여기서 ‘몸을 상해하는 일’이란 살을 잘라내는 할례를 뜻합니다. 이들은 할례를 주장하면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할례를 행하도록 요구했습니다. 그것을 매우 중요한 표지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런 외적인 표지는 몸을 훼손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외적인 할례가 아니라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거짓교사들의 세 가지 특징을 나열하면서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로 하여금 이와 같은 자들을 삼가하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그 당시 거짓 교사들이 교회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나도 컸던 것입니다.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기쁨을 누린 이들이 거짓교사들에 의해 복음의 진리와는 상반된 그래서 잘못된 길로 들어서는 불행한 일을 바울은 단호하게 막고자 하였습니다. 아무리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건강한 이들이라고 해도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받아들이다보면 영적인 센서가 무디어지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이 어떻게 잘못 가고 있는지 느끼지 못하고, 심지어 옳다고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자신들만이 옳고, 다른 그리스도인은 잘못되었다고 믿게 됩니다. 이게 오늘 이단에 빠진 이들의 심각성입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더 이상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오직 거짓됨만을 붙잡고 그것을 사수해야만 진리를 사수하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많은 이들이 어이없이 무너지는 상황을 보았기에 저들로 하여금 거짓교사들을 철저하게 삼가 하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오늘도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들이 주변에 많습니다. 거기에서 우리를 지켜내는 것은 간단합니다. 더 이상 가까이 하지 않는 것입니다. 상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을 분별할 수 있도록 우리 영성의 깊이를 더해야 합니다.
이렇게 저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배격한 후에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이 나아가야 할 신앙의 방향이 어디인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육체에 할례를 행하는 것같이 자기의 의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자신의 의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만을 자랑하고, 예수님만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3절에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나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진정한 할례파라고 바울은 주장합니다. 육체의 의를 이루고자 혈안이 되어 있는 유대인들이 할례파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진정한 할례파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의 진정성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하였습니다. 빌립보 교인들로 하여금 헛된 것을 쌓아가지 않도록 했습니다. 오늘도 복음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이렇게 자기 의를 가지고 신앙 생활하고자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단지 우리의 왜곡된 열심일 뿐입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확실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육체의 할례를 주장하는 유대인들과 같은 주장을 하고, 그것을 가장 최선으로 여기고 있다가 그 함정에서 빠져나왔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 자리에 있었을 때 그 누구보다도 완벽한 열정과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누가 감히 뭐라고 할 수 없을 정도였음을 그는 자랑합니다. 최고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4절에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라고 했습니다. 그가 소유하고 있는 이 땅의 조건을 돌이켜보면 참으로 자랑할 만했습니다. 아니 완벽해보였습니다. 5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소개하기를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라고 했습니다. 소위 자기의 화려한 스펙을 자랑한 것입니다. 그는 유대교 전통에 따라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 할례의식을 통해서 유대인들은 자신이 선택된 사람이 되었다는 자부심을 갖게 됩니다. 바울도 이러한 유대인의 관습에서 예외 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그는 베냐민 지파였습니다.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 최초의 왕인 사울의 가문으로서, 이를 통해 바울은 자신이 우수한 가문 출신이란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었습니다. 그 당시 헬라 로마 세계의 혼합절충주의 문화 속에서 히브리 문화를 철저하게 계승하고 있었습니다. 율법으로는 철저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정통종파에 속해있었습니다. 바리새파는 유대교 부흥운동의 중심이 되었고, 율법에 충실했으며, 자신들만이 가장 깨끗하고 진실하다고 믿는 유대교 종파입니다. 사두개파는 세상과 타협했고, 에세네파는 세상을 등져버렸고 자연소멸 된 반면 바리새파는 끝까지 유대교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런 바리새파에 소속되어 있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한 것입니다. 이렇게 종교적인 면에서도 손색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유대교에 대한 열정을 갖고 헌신했습니다. 그러기에 사교라고 믿었던 교회를 매우 열심히 박해하는데 앞장섰습니다. 6절에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스데반이 순교하는 자리에서도 증인으로 그 자리를 지켰던 바울이었습니다. 유대교에 대한 열심이 그만큼 특심하였습니다. 이처럼 화려한 조건들을 하나하나 나열해보인 바울은 자신에 대한 마지막 결론을 내립니다. 율법에 비추어 봐도 전혀 자신은 흠을 발견할 수 없었다고 단언합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는 표현은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그만큼 바울은 종교적으로 결코 남에게 뒤지지 않을 열심과 완벽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와 같은 과거의 자기이해를 통해서 빌립보교인들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바울이 유대교의 패러다임을 통해 주장한 자기이해는 철저한 문화적인 자아이해입니다. 그런데 문화적인 자아이해는 자기 의를 기초로 한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문화든지 그 문화에는 자기 자랑, 우월감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문화의 척도를 가지고 사람들을 이해하다 보면 거기에 우월감과 자랑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자기를 우월하게 보려고 합니다. 빌립보에 있던 바울의 반대자들이 자신들을 문화적인 이해의 측면에서 자기자랑을 일삼았다면, 그것은 반드시 타인에 대한 지배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고 다른 사람을 부인해야만 자기의 정당성과 자기자랑이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연유로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개 취급한 것입니다. 또한 문화적인 자아 이해는 내적 자질보다는 외적 기준만을 봄으로써 인간의 참된 가치를 상실시킬 우려가 있습니다. 인간이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즉 소유에 의해서 판단하기 때문에 비인간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문화적인 자아이해는 자기를 왜곡시킬 뿐 아니라 타인도 왜곡시키고, 그들을 힘들게 만듭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자기이해는 이러한 문화적 자아이해를 부수고 오직 믿음으로 새롭게 자기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패러다임으로 자신을 관찰하지 않고, 복음의 패러다임으로 자신을 조명해 볼 때 우리는 자랑할 것도, 내세울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똑같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구원에 이르는 길도 차등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것을 거짓교사들은 할례를 통해서 왜곡시켜 버렸습니다.
3. 그리스도 안으로
이렇게 바울은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율법의 의의 기준으로서 완벽하였습니다. 사람들의 부러움을 살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강력한 회심을 경험하고, 그 일을 통해서 그의 패러다임이 180도 달라집니다. 그 안에서 종말론적인 가치전도가 일어났습니다. 그동안 그렇게 좋게 보였던 것들, 그가 소중하게 붙잡고 있었던 것들이 더 이상 그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바울은 모두 해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7절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여겼다’라는 말은 결단의 성격을 강조합니다. 이것을 통해 바울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의 변화가 의지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말함으로써 빌립보 교인들도 자기와 같이 스스로를 새롭게 이해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중심의 가치관으로의 전환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해로 여길 수 있었던 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그가 익히 알아왔던 지식들보다도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었습니다. 8절a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어떤 지식의 증가가 이루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가치의 전도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이루어온 문화를 절대적 가치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주로 인식함으로써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 변화가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로 인해 지난 수십 년 동안 그가 쌓아온 모든 공적을 그는 후회함 없이 다 버렸습니다. 그것을 심지어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렇게 바울이 모든 것을 버리고자 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리스도를 얻고자 하는데 있었습니다. 8b“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모신 것이 가장 귀하기 때문에, 자신이 붙잡고, 누리고 있던 것들을 다 버린 것입니다. 예전에 것들을 버리지 못하면 우리는 결코 새로운 것을 채울 수 없습니다. 지금 붙잡고 있는 무의미한 것들을 다 놓아버리기 바랍니다. 그래야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살아가게 됩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옛사람으로서 애지중지 붙잡고 있던 것들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비워야 신령함으로 채워집니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고 함에 있었습니다. 9절a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 한다.’는 말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바라보았을 때 그냥 한 인간의 모습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보여지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 예수님이 우리의 영원한 주소지가 되어야 합니다. 언제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결코 있어선 안 되는 자리에서 발견되면 그게 뭐가 되겠습니까? 그러기에 우리는 늘 자신의 자리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가 지금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 말입니다. 그래서 사순절 기간 우리 발걸음에 대한 절제가 이루어질 수 있기 바랍니다.
4.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 서 있음으로써 그는 이제 새로운 의를 얻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율법 아래에서 의를 이루고자 고군분투했던 삶에서 벗어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를 누리는 은혜의 자리로 옮겨간 것입니다. 9절b“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과거에 바울은 율법에 의한 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6절에서 말한 바와 같이 율법의 의로 말하면 바울은 흠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에서 난 의를 포기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의는 하나님께 근거를 둔 은혜의 성격이기 때문에 인간은 절대로 자랑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자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으로부터 오는 어떤 의로도 만족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제아무리 의를 행하고 노력을 하고 하나님을 만족시키려고 애를 써도 사람의 행위를 가지고는 하나님이 만족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 자신의 의로 하나님께서 만족하시는 것이지 피조물, 그것도 죄인인 우리들이 하나님을 만족시킬 만한 공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의롭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을 해주신 것이지 우리가 의로운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하나의 중요한 전제가 필요합니다. 바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소유했느냐 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다른 것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히11장9절에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순절 절기를 보내면서 그간 우리가 잘못 붙잡고 있었던 것들을 다 버릴 수 있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로 채워지는 은혜의 절기가 되기 바랍니다. 철저하게 자신을 비우고, 자기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분을 향한 온전한 믿음으로, 온전한 섬김으로 나아갈 수 있기 바랍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과거에 귀했던 것들을 배설물처럼 버렸다고 했습니다. 예수를 만난 이후 바울은 다른 것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에게 그의 마음이 고정되었고, 예수님만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다른 것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차단해버립니다. 사순절 절기를 보내면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키우는 은혜의 기간이 되기 바랍니다. 그로 인해 보배로우신 예수님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써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안식과 회복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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