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2월3일 주일설교문
[존경받는 그리스도인 : 빌2장25-30절 ]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우리 사회는 점점 존경하는 인물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요즘 초등학생들이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연예인입니다. 지금 자라나는 다음 세대에게 본을 보일 수 있는 인물이 없다는 것은 이 나라의 불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우리 사회가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만큼 철저한 자기관리와 자기절제를 통해서 사람들의 신망을 받는 이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회분위기가 강퍅해지면서 존경받을 만한 분들의 사생활이 왜곡되게 들어나고, 그로 인해 그 분에 대한 좋은 평판이 깨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그래서 심히 억울하겠지만, 어쨌든 그런 빌미를 제공한 것은 당사자에게 있습니다. 게다가 사회의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는 종교계에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들이 더 이상 보이질 않습니다. 종교계가 세상 판과 비슷하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각박하게 살아가고 있는 자신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하니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 없습니다.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보는 시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판국이다 보니 향후 종교를 갖겠다고 답한 비 종교인의 비율이 계속 줄어들고 있는 추세입니다. 며칠 전 조선일보 종교란에 작은 기사가 게재되었습니다.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가 ‘글로벌리서치’에 의뢰해 5000여명 국민을 대상으로 조사한 ‘2012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의식조사결과’를 지난 31일 발표한 기사가 실린 것입니다. 작년 기준으로 비종교인 537명 중 “향후 종교를 가질 의향이 있다” 고 답한 비율은 9.3%(53명)이었습니다. 1998년 32.9%, 2004년 23%와 비교할 때 크게 줄어든 수치입니다. 왜 그 수치가 계속 줄어들고 있을까요? 그만큼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존경받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의 부정적인 반응에 넋 놓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다시 교회와 교계의 지도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그들과는 차원이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겠습니까? 물론 우리가 인간적으로 노력한다고 해서 될 일은 아니지만 최소한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행동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울지마 톤즈에서 보여주는 고 이태석 신부같이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을 세상은 바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오늘 성경은 에바브로디도라는 한 인물을 통해서, 그리고 그를 대하는 사도 바울을 통해서 그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난 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른 한 모델로 말씀드린 디모데는 바울이 아들이라고 부를 정도로 매우 특별한 관계로 옥에 갇혀 있는 바울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에바브로디도는 바울과 그런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지 않던 사람입니다. 성경에서도 특별하게 언급되고 있거나, 그의 사역이 들어나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평범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바울이 그런 에바브로디도를 만나게 된 것은 로마의 옥에서였습니다. 바울이 옥에 갇히게 되자 빌립보 교회는 교인들 가운데 에바브로디도를 뽑아 그곳에 파견하여 바울을 돕도록 하면서 두 사람의 만남이 시작되었습니다. 빌립보 교회의 파송을 받은 에바브로디도는 가족과 교인들을 떠나 홀로 긴 여정을 거쳐 옥에 구금되어있는 바울에게 갔습니다. 사도 바울을 섬기는 일은 에바브로디도에게는 굉장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기대하는 마음으로 갔습니다.
바울이 구금되어 있는 로마의 감옥에 도착한 에바브로디도는 영치금도 넣어주고, 사식도 넣어 주면서 바울을 열심히 섬겼습니다. 바울과 제한적인 장소와 시간이지만 나누는 교제는 그를 신나게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정확히 알 순 없지만 그가 병이 들고 말았습니다. 먼 길을 달려 온데다가 열심히 바울을 섬기면서 몸도 지쳤고, 더군다나 빌립보에 두고 온 가족들과 교인들에 대한 향수가 깊어지면서 결국 병이 들어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옥에 갇혀 있는 바울을 섬기도록 파송을 받아 왔는데, 오히려 바울에게 짐이 되고 말았으니 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 보통 사람 같으면 짜증날 일입니다. 자기를 돕기 위해 왔는데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어버렸으니 말입니다. 그렇지만 오늘의 편지내용을 보면 그런 감정들은 전혀 들어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로에 대한 좋은 감정만이 나타납니다. 이것을 통해 볼 때,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 두 사람 사이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매우 놀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지만 쉽게 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에바브로디도를 긍휼히 여겨주셔서 목숨을 잃지 않고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병이 호전되자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급히 빌립보로 돌려보내고자 했습니다. 여기에서부터 바울의 배려가 들어납니다. 처음 파송 받을 때 부여받은 임무를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빌립보교회가 하지 못한 섬김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떠나는 에바브로디도임을 빌립보교회에 알린 것입니다. 이처럼 에바브로디도를 바라보는 바울의 마음은 아낌없이 칭찬하고 그에게 참된 관심을 보이는 따뜻한 애정으로 가득 차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25절에서 바울이 말하기를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에바브로디도가 어떤 자인지를 함축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먼저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그는 나의 형제”라고 부릅니다. 바울이 살던 당시 형제관계라는 개념은 매우 새로운 것이고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세계는 자유민과 노예, 헬라인과 로마인, 유대인과 이방인, 귀족과 평민, 시민과 군인들 사이가 날카롭게 대립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처럼 크게 양극화된 사회의 모든 가지들을 진실하게 결합시킬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바로 이런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왔고, 그와 함께 그리스도인의 형제관계라는 개념이 들어왔습니다. 이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 민족적, 종교적 배경들은 서로 달랐지만 그것들은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간단히 무시되어버렸습니다. 그러기에 바울과 이방인이었던 에바브로디도는 한 형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요즘 교회 안에서도 형제님, 자매님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형제애가 거기에 흐르고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 즉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눈 한 지체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일이 우선되지 못하고 자기 일이 우선됨으로써 그 연합이 깨어지는 일이 교회 안에서 비일비재합니다. 그리고 그런 가슴 아픈 일들을 세상은 똑똑히 바라보고 개탄해하고 있습니다. 물론 세상의 형제들도 보면 돈 때문에 서로 싸우고, 자신의 이익 때문에 칼부림을 하는 세상이지만, 오늘 복음 안에서 한 형제가 된다는 것은 혈연적인 관계를 뛰어넘는 관계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족과 형제관계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말로서 못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나 마지막 순간, 행동으로 그 사랑을 보여주어야 할 땐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어놓을 수 있는 형제애를 보여주었습니다. 게다가 바울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가 아닌 그 이상으로 평가해서 자기의 형제로 인정하고 빌립보 교회에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형제라는 칭호에 이어서 바울은 그를“함께 수고한”동역자라고 소개합니다. 그는 바울과 함께 하는 동안 그의 그리스도를 위한 충실한 동료가 되었고, 복음을 위해 수고하였습니다. 무엇을 위해 수고했느냐가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 이용해먹는데 수고했다면, 자기 세 불리는데 수고했다면, 그 수고는 어떤 가치도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본래의 그리스도의 일에 충실하면, 복음의 일에 수고한다면 결코 세상의 지탄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로서 감당해야 할 일을 수고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 여기까지 오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이제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한국교회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는 교회로 다시 일으켜야 합니다. 헛된 것을 쫓아가는 교회가 아닌, 세상을 쫓아가기에 수고하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영혼을 살리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 수고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로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함께 군사 된”자라고 하였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바울과 함께 수고하였을 뿐만 아니라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해, 그리스도를 위해 싸운 믿음의 군사였습니다. 군인은 나라를 위해 목숨까지도 바치는 자여야 합니다. 세계 전쟁이 있는 곳마다 수많은 군인들이 나라를 위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자리를 피한다면 군인이 아닙니다. 오늘도 우리는 왜 우리가 군사가 되어야 합니까? 엡6:12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영적전쟁입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군사로서 임하지 않으면 이길 수 없습니다. 이 싸움은 오늘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전쟁에 임하는 군사로서 우리는 용기가 꺾이거나 포기하지 말며, 어떤 요구를 받고 그 어떤 대가를 치른다 할지라도 우리의 영광스런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기까지 일어나서 싸울 준비를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바울과 함께 군사가 되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서 최전선에 복음을 위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스럽게 싸웠던 것입니다.
네 번째로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의 필요를 채워주는 섬김이였습니다. 그에게 그 섬김은 개인으로서의 바울을 섬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그리스도의 일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죽기까지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땅에 하나님의 대행자로 파송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그리스도께서 섬기셨듯이 오늘도 우리는 세상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을 도와야 합니다. 세상의 필요를 채워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곳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돕는 자가 되어, 세상을 따뜻하게 할 때, 그것이 단지 이벤트가 아닌 선한 이웃으로서 그 일을 감당한다면 세상이 어찌 우리를 향해 억센 소리를 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에바브로디도는 그를 섬기는 동안 바울의 형제가 되었고, 함께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동료가 되었고, 함께 싸우는 군사가 되었고, 바울을 섬기는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바울의 마음을 얻었고, 빌립보교회 교인들을 향해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극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을 위해 수고하고, 바울을 섬기며 그리스도의 일에 전념하다가 에바브로디도가 병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바울과 에바브로디도와 빌립보교회의 교인들이 서로 염려하며 근심하게 되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를 파송하고 그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은 그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크게 근심하였습니다. 그들의 일이 망치게 되었다고 에바브로디도를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에바브로디도 병이 걸렸으면 자신의 병으로 인해 자신을 위해 근심해야 하는데, 오히려 그는 자기 소식을 듣고 걱정하고 있는 교인들을 걱정했습니다. 26절에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라고 했습니다. 바울도 그렇습니다. 자기를 돕겠다고 왔다가 자기의 짐이 되어버린 에바브로디도를 위해 기도하고, 걱정했습니다. 여기에는 자기 자신을 위해 근심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게 서로를 위해 염려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보신 하나님은 에바브로디도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어 그의 병이 나았습니다. 27절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저는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된 이들의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진정한 형제애가 깊이 자리 잡고 있는지 성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소외되는 이들이 없는지? 그래서 서로를 염려하고, 배려하고, 이기적인 생활이 아니라 이타적인 생활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모범을 보이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제자입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와 빌립보교회를 먼저 생각하면서 디모데보다도 먼저 에바브로디도를 돌려보내려고 하였습니다. 28절“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그를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라.”그와 함께 자신과 함께 복음을 위해 수고하고, 자기를 섬긴 에바브로디도를 기쁨으로 영접하고 존귀히 여기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29절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왜냐하면 그 무엇보다도 에바브로디도는 자신의 파송 받은 목적을 위해 죽기까지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30절“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그는 자기를 희생하였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이 그 안에서 빛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시고 복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계승을 따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효과적인 역사가 그를 뜻과 행동 면에서 위대한 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변화시켰습니다. 빌립보교회가 이런 에바브로디도를 존귀히 여기는 것은 당연할 일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존귀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스승이신 예수님은 존귀히 여김을 받는데, 그 제자인 우리들이 존귀히 여김을 받지 못한다면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의 문제는 아닙니다.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분의 모범을 따랐던 이들의 삶을 본받으려고 하는 마음의 부재에서 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사셨습니다.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길을 따라가며 그리스도의 향기로 우리의 삶이 충만할 때 세상은 우리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기 시작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온 인류를 위해 자기희생의 본을 보이셨던 것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삶을 살아갈 때, 그래서 그들의 선한 이웃이 되고, 그들의 삶에 도움이 되고 힘이 될 때, 더 이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아니라 박수소리가 울려 퍼질 것입니다. 다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으로 나아가 세상에 구원의 접촉점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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