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우리 이웃과 함께!!!
주일예배설교원고

긍휼의 목자이신 예수님: 마 9장 27-38절

by 최수근 2015. 7. 12.

2015년 7월 12일 주일설교문

[긍휼의 목자이신 예수님: 마 9장 27-38]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종종 쓰레기더미로 가득 찬 집안에 방치되었다가 발견되는 아이들을 봅니다. 그 상황이 너무도 끔찍한 경우들이 많습니다. 며칠 전 뉴스에서 돼지우리에서 양육되는 아이를 보도한 적이 있습니다. 모자이크 처리가 되었지만 아이의 모습이 참으로 끔찍했습니다. 그 아이의 엄마는 아이를 제대로 돌 볼 수 없는 정신 지체자였습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돌봄을 받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돌봄은 그냥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다른 많은 요소들이 있겠지만 사랑이 없으면 그 돌봄은 지속될 수 없을 겁니다.

헌데 우리가 돌봄에 대해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그 돌봄이 눈에 보이지 않을 때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돌봄이 그랬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오랜 동안 자신들이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로 이어지는 오랜 통치로 사람들은 지칠 대로 지쳐있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백성들의 위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오랜 세월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하여 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묵묵히 그들 가운데 계셨고,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셨습니다. 우리 뒤에 계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오해합니다. 저 멀리 계신 분처럼 여깁니다. 직접 내 인생에 개입해 오시는 분으로, 그래서 내 삶을 돌보시는 분으로 믿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지켜보고 계셨고, 마침내 하나님은 그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해 친히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내려오셨습니다.

다윗의 자손

고통당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그들이 오래도록 기다려왔던 종말의 목자로서 예수님이 오셨지만, 게다가 모든 표지판들이 저 분이야 말로 다윗의 자손으로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분이라고 알려주고 있었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단지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이 누구신가 질문만 무성할 뿐이었습니다.

저가 누구인가라는 질문만 무성한 틈으로 드디어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말하는 자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소경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소경이 된다는 것은 곧 사회적으로 매장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 가운데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소경이 된다고 믿는 사람이 많았고, 그러다보니 종교적으로도 심각한 제한이 가해지곤 했습니다. 그렇게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이스라엘 사회에서 소외당하던 소경 둘이 예수님을 따라오며 소리 질렀습니다. 27b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유대인들은 종말에 다윗의 자손으로 오게 될 메시아가 그들의 모든 비참한 상황에서 건져주리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 점에서 두 소경이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이여부를 때, 예수님이야말로 약속된 메시아이시고, 저분이야말로 자신들의 눈을 뜨게 해주리라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저들은 예수님을 향해 눈을 뜨게 해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소경들은 지금까지 행하신 일들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있었던 겁니다.

긍휼의 마음으로 충만하여 사람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굶주린 백성들을 먹이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긍휼은 조건 없는 일방적인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그와 같은 긍휼의 목자이신 예수님의 긍휼에 기대어 소경들은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 만일 두 사람을 보시고 긍휼히 여겨주신다면, 그들이 겪고 있는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리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은혜를 받는 비결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예수님은 그들의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그냥 길을 가셨습니다. 내가 뭐라고 요청할 때 상대방이 그 요청을 무시해버리면 마음이 상하기 쉽습니다. 저도 그 점이 많이 약합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데, 못난 자존심 때문에 그냥 물러섭니다. 그러면 누구 손해입니까? 이렇게 예수님이 간혹 상대방을 무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소경이 그렇게 외치면서 따라오시는데도 반응을 보이지 않으셨을까요? 

나를 믿는가?

쫓아오는 저들에게 눈길을 돌리지 않으시고, 예수님께서 집으로 그냥 들어가신 것은 저들의 믿음을 검증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두 소경 또한 눈을 뜨고자 하는 간절함이 컸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무시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설령 어떤 치욕을 당하더라도 참아내자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무시하셨어도, 들어오라 하지 않고 집으로 들어가셨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집까지 따라 들어가 예수님 앞에 설 수 있었습니다.

전 두 사람의 모습에서 살아있는 믿음을 봅니다. 저들이 정말 예수님을 믿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믿지만 긍휼의 목자이신 예수님, 나의 구원자로서, 나의 인도자로서 예수님의 인격을 믿지 못하면, 만일 이런 경우를 당하게 될 때 다 기분나빠하며 떠나버릴 것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두 번 의례적으로 외쳐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간절함으로 끝까지 기도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우리가 조정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단지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크고 놀라운 일로 응답하리라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기 때문에 끝까지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따라붙은 두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28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예수님은 두 사람의 믿음에 대해 질문을 하셨습니다. 이 믿음은 예수님께서 고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을 믿는 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너희를 고칠 수 있는 존재로서 나를 인정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예언자들의 예언대로 예수님이 메시아 되심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적을 믿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메시아가 되시고, 구원자가 되시기에 예수님을 믿고, 우리의 목자이심을 믿기에 양으로서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두 소경은 대답하였습니다. “주여 그러하오이다.” 그들은 무조건적으로 예수님께 동의를 표하였습니다. “맞습니다. 주님이야말로 소경을 눈 뜨게 하시는 메시아이십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목자이십니다.” 

믿음대로 되라

예수님께서는 소경들의 믿음을 확인하시고, 그들의 눈을 만져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29너희 믿음대로 되라.” 믿음대로라는 말은 그들의 믿음의 질과 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존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일하시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움직일 수 있다 하셨습니다.

믿음대로 되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눈을 떴습니다. 마태는 앞에 다른 치유의 기적들처럼 예수님께서 소경들의 믿음을 보시고 또한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눈이 뜨게 되었음을 강조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예수님의 긍휼하심을 누리는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 소경은 예수님이야말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약속된 메시아임을 믿었고, 그 믿음대로 눈을 떴습니다. 하지만 눈이 성한 자들은 오히려 깨닫지 못했습니다. 두 눈을 부릅뜨고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자들이 왜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깨닫지 못한 걸까요?

그것은 기대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메시아로 오실 강력한 다윗의 자손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긍휼의 목자로 오셔서 소외된 자들을 치료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그들이 기대하고 있던 메시아의 모습을 볼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잘못된 기대에 포커스를 마치고 있으면 당연히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대가 아닌 타락한 인간들의 기대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때 나타나는 문제입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 편이 아닌 반대편에 서서 하나님의 구속사를 방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면 우리가 열심을 다해 달려간다고 무슨 유익함이 있겠습니까? 그 당시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이런 우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영적인 어리석음이 우리 가운데 자리 잡고 있지 않는지 스스로를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메시아를 부정하는 사람들

소경들이 예수님의 긍휼하심으로 눈이 회복되어 나가자 바로 사람들이 귀신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또 데리고 왔습니다. 귀신에 사로잡혀 있는 불쌍한 영혼을 보신 예수님께서 바로 귀신을 쫓아내시고 그로 하여금 굳었던 혀가 풀어져 말하게 하셨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무리들이 이 일을 놀랍게 여겼습니다. 33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예언자들을 통해 메시아가 와서 어떤 일들을 행할지 예언되었지만 예수님 이전까지 그런 일들이 사람들 앞에서 일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무리들이 직접 예수님에게서 메시아 시대에 일어나게 될 놀라운 기적들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사야 34:5-6의 말씀을 떠 올리며 소경들처럼 저분이야말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아라고 외쳐야 했습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소경과 벙어리의 치유는 메시아의 구속이 임했다는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그렇지만 성경의 예언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고 그로 인해 감동하면서도 아직 무리들에게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고백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저들이야말로 영적인 곰탱이들입니다. 성경에서 보여주는 이스라엘의 영적인 행보를 보면 답답할 때가 참 많습니다. 하지만 사돈 남 말하지 마십시오. 이게 타락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감동받고 있지만 지금 그들 앞에 선 분이 메시아이심을 깨닫지 못하는 무리들에 반해 바리새인들은 매우 확실하게 예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34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바리새인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임을 믿을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결코 예수님이 행한 방식으로선 역사하지 않는다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그토록 탁월한 이유에 대해 그들이 생각해 낼 수 있는 유일한 설명은 하나님 반대편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의 근원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것은 바로 마귀인 것입니다. 그런 억지논리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인 마귀의 힘을 밀려 귀신들을 내쫓고 있다고 비난하였습니다.

이처럼 예수님 앞에는 늘 세 부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대로 병도 낳고, 귀신도 떠난 사람들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그렇게 말려도 나아가 자기들이 예수님을 통해 어떻게 나았는지, 예수님이야말로 메시아이심을 간증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지금까지 이스라엘에서 이런 일이 없었다고, 저가 누구 길래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가 감동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냥 감동만 하다가 흩어질 뿐입니다. 이렇게 감정에 휩쓸렸던 자들이 예수님을 못 박는 일에서도 부화뇌동합니다.

세 번째는 마귀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쫓아낸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부정하고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인간적으로 구축해놓은 편협한 경험을 넘어서서 예수님을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말씀과 치유의 역사를 통해 특별한 일을 행하시고 있음에도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아임을 보지 못하고 거부했습니다.

어떤 눈으로 바라보느냐가 그래서 중요합니다.

군중심리도, 부정과 대적과 왜곡의 눈이 아닌 오직 믿음의 눈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기적도 선의와 함께 그것을 믿으려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기적을 기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또 거기에서 나의 기적으로 경험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적은 물론 인정되어야 할 표징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배격을 받을 수도 있는 표징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기적이 있다고 다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치유의 과정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서 믿음을 보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양과 질의 크기가 아닙니다. 믿음이 있는 가 없는 가의 문제입니다.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의 긍휼하심에 의지할 때 이 땅을 살아가며 그리스도의 긍휼하심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실 때 그 열매가 무엇입니까? 지쳐있던 삶이 회복될 것입니다. 병든 육체가 치유될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긍휼의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돌보실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예수님의 권능에 반응하고 믿고 나아가면 그 분의 편에 서서 제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은혜의 삶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바리새인들과 같이 예수님의 권능을 귀신의 행위로 돌리며 하나님 반대편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 끝이 어찌 되겠습니까? 심판입니다. 

긍휼의 목자이신 예수님

참으로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에 예수님은 아랑곳 하지 않으시고 그 분이 행해야 할 사역을 지속하셨습니다. 35절은 그와 같은 예수님의 사역을 함축적으로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또한 천국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와 함께 모든 질병과 모든 약한 것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것은 목자로서 예수님이 이곳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목자이신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수많은 무리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36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그들의 삶이 영적으로 인도하는 이 없이 방황하고 있었고, 회복 불가능한 절망의 자리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로마의 지배 하에서 고통당하며, 그들에게 닥치는 매일의 염려와 비통함과 고통들을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체 감내하고 있었습니다. 그 점에서 저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았습니다.

목자 없는 양이란 표현은 자신들을 돌보고 올바른 길로 인도해 줄 예언자나 왕이 없는 이스라엘의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서 구약 성경이 자주 썼던 표현입니다(27:17, 왕상 22:17, 34:5). 목자는 양을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고, 그들의 부족한 것을 돌보며, 위험으로부터 지켜주는 자입니다. 때론 치료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지도자들인 서기관, 바리새인, 제사장, 대제사장은 목자의 역할을 잘 감당하여 백성을 치료하고 목양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힘들게 하고, 각종 율법의 짐으로 괴롭히고 무기력하게 만들었습니다. 고통가운데 있는 이들을 돌보고, 외면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지도자들은 그들의 목자로서의 직무를 감당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들의 부정함과 무능함을 예수님은 신랄하게 비판하십니다. 이렇게 지도자들이 잘못 가고 있으면 힘든 것은 다른 이들이 아닙니다. 백성들입니다.

이처럼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영적인 돌봄을 받지 못하고 있는 백성들을 예수님은 측은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목자로 오신 예수님께서 그들의 고통을 해결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의 필요를 깊이 보셨고, 저들의 몸과 영혼을 치유해주셨습니다. 말씀으로 저들을 먹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긍휼의 목자로 오셨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심이 그 분의 심령 중심에 불타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주님의 돌보심과 은혜로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긍휼의 불이 교회의 중심에서도, 각각의 그리스도인들의 중심에서도 활활 타오르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경험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란 이런 주님의 긍휼의 불이 옮겨 붙은 삶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긍휼이 내 속에 차고 넘칠 때, 마태복음이 전하는 참 목자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우리들의 삶에서 드러내며 살 수 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 가운데로 파송하십니다. 긍휼의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나아가 긍휼히 여김을 받고자 하는 이들에게 긍휼을 베풀 것을 명하십니다. 그 긍휼은 그들이 할 수 없는 것을 내가 대신 해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세상으로 나아가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그 뜨거운 심장으로 살아갑시다. 그로인해 온 몸으로 긍휼의 목자이신 예수님을 증거 합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