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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설교원고

기본을 지킵시다 : 민 6장1-12절

by 최수근 2015. 7. 20.

2015년 7 19일 주일설교문

[ 기본을 지킵시다 : 민수기 6장 1-12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민수기에 보면 두 번의 인구조사가 나옵니다. 첫 번째는 애굽에서 나온지 둘째 해되던 때 시내광야에서, 두 번째는 가나안 정복이 임박한 시점인 여리고 맞은 편 모압 평지에서 2차 인구조사를 합니다. 2차 인구조사 때에는 1차에 계수되었던 사람들 중에서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다 죽고, 그 다음 세대가 계수되었습니다. 1차 인구조사에서 계수되었던 603,550명중에서 603,548명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겁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여호와의 군대인데 도대체 누구는 들어가고, 누구는 들어가지 못한 걸까요? 26:65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반드시 광야에서 죽으리라 하셨음이라.” 603,548명은 반드시 광야에서 죽어야 했습니까?

우리가 구원받은 이후 끊임없이 우리 자신의 신앙을 경영하지 않으면, 늘 깨어 근신하여 기도하지 않으면,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지 않으면 우리 또한 광야백성들의 길을 따라가게 될 것입니다 

준비가 되었는가?

1차 인구조사 할 때 그 대상은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만한 자들이었습니다. 싸울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들을 확인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6,25전쟁 때 총 쏘는 법만 급히 배워 전선에 투입되었던 어린 학도병들이 있습니다. 애국심만 가지고 나갔다가 너무도 많은 희생을 치렀습니다. 훈련된 병사와 훈련되지 않은 병사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여러분은 이 종말의 때에 우리를 집어 삼키고자 달려드는 마귀와의 영적전쟁에 나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군대로 부르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를 여호와의 군대로 부르셨습니다. 그러기에 군사로서 싸울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하는데 사람들이 대충 넘어가려고 합니다. 그러다가는 마귀의 공격을 받아 상처를 입고 넘어집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의 군사다워 질 수 있겠습니까? 그래야 우리도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약속의 땅까지 갈 수 있지 않겠어요?

중요한 것은 능력이 아닙니다. 어차피 우리 안에 능력은 없습니다.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4:13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리스도의 군사로 살아가는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앙의 기본을 갖고 있는 가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화려한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신앙의 기본만 잘 지켜도 기뻐하십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기본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삼위 일체 하나님,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민수기 61-12에 보면 나실인에 대한 법이 나옵니다. 레위인이 아닌 경우에도 자신을 성별하여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도록 한 제도입니다. 나실인이라는 단어의 히브리어 뜻은 봉헌된혹은 성별된 자입니다. 이 나실인이야말로 오늘 이 땅에서 구별된 성도로 살아가고자 결단하고 헌신하는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나실인으로서 서원을 하면 하나님께 자신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드리기 위해서 지켜야 할 세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이 기본적인 원칙을 통해 하나님께 자신을 드린 자로서 오늘 우리가 어떻게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지 볼 수 있습니다.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라

첫 번째 지켜야 할 원칙으로서 나실인은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해야 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나실인으로 하여금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라고 하셨을까요?

레위기 10장에 보면 아론의 아들인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을 합니다. 그때 불이 하나님 앞에서 나와 두 사람을 집어 삼켜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분노하시는 하나님도 순간 우리의 마음을 두렵게 만들지만, 나답과 아비후도 왜 이런 실수를 저질러 하나님의 분노를 자초했을까요?

레위기 109절에 의하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너와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 죽음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영한 규례라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

두 사람이 술에 취해 성막에 들어갔습니다. 술에 취한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께서 성소에서의 분향은 반드시 번제단의 불을 사용하도록 명하신 것을 잊고 다른 불을 사용한 겁니다. 술이 두 사람의 분별력을 흐려놓았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앞에서 구별된 삶을 살고자 하는 나실인들은 포도주와 독주를 먹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술 취하면 거룩한 것과 속된 것, 부정한 것과 정한 것, 생명 살리는 일과 죽이는 일을 분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술기운으로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구별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오늘 그리스도인으로서 술을 멀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건 건강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친교 차원의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는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성전입니다. 삶이 거룩함으로 구별되어야 합니다. 술은 틈을 만듭니다. 실수하게 하고, 죄를 짓게 만듭니다. 당대의 의인 노아도 술 취해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지 않았습니까? 종종 뉴스에 지도층 인사들의 파렴치한 행동이 보도될 때도 대부분 술에 취해 비롯된 것들입니다 

무엇에 취해 사는가?

그와 함께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라는 것은 성도로서 마음이 무엇에 사로잡혀 살아가야 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받은 이후에도 끊임없이 노예로 살았던 애굽에 대한 그리움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툭하면 애굽을 외쳐댔습니다. 앞으로 나아갈 길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생각하고, 약속의 땅을 생각하기에도 부족할 터인데 과거에 사로잡혀 있었으니 그들을 구원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그러기에 구원받은 우리들이 무엇을 바라보고, 어디에 가치를 두고, 어떤 것을 생각하며 살아가는가는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믿지 않는 친구들과 잠깐 만나보면 생각하는 것이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땅의 것밖에 없습니다. 물론 우리도 구원받기 이전에 그랬습니다. 그렇지만 구원받은 이후에는 달리 살아야 합니다.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지금 우리는 서울에 살고 있는 서울 시민이기도 하지만, 하늘나라에 시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시선이 달라져야 하고, 우리가 매일 묵상하는 것들이 달라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성막을 만드시고 그 가운데 임재하시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한 것도 그와 같은 목적에서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집중하지 못할 때는 영락없이 타락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에 집중하고 성도로서 구별되고자 한다면, 세상의 것에 취해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 충만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6: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오늘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면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에 취해 살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가라하시면 가고, 멈추라 하시면 멈출 수 있는 성령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우리의 거룩함을 이루어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순간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기 위해 내가 성령의 사람인지, 성령 충만한지 점검해야 합니다. 더 이상 세상에 취해 살 수 없습니다. 거기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죽습니다. 사는 길은 오직 성령에 취해 사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하나님과의 기본적인 관계입니다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두 번째의 기본 원칙으로 나실인은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아야 했습니다. 나실인으로 서원하는 날부터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고 길러야 했습니다. 머리는 우리의 신체기능을 제어하는 통제소입니다. 그러기에 머리에 칼을 대지 말라고 하신 것은 나실인은 그 근원이 되는 것을 자신의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머리되심, 즉 주권을 인정하고 나의 삶을 내 마음대로 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만일 나실인이 머리를 밀었다면 그것은 주님의 머리되심을 거절하고 불복하는 의사표시였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의 사람에서 세상의 사람으로 전락되고 맙니다. 능력도 더 이상 공급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삼손입니다. 삼손의 마지막 모습에서 하나님과 단절된 비참함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지켜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예우하고,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것이 신앙에 매우 중요한 기본자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분 앞에 겸손하게 순종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들을 말하는 걸까요? 우리가 간혹 신앙적인 오류를 범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뭔지 아십니까? 소위 무당 신앙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조정하려고 합니다. 믿노라고 하면서, 순종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자기의 바램 속으로 몰아가려고 합니다. 그것은 결코 하나님을 높여 드리는 성도의 자세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하게 인정한 인물가운데 한 사람을 든다면 다윗을 들 수 있습니다. 시편37편에 보면 다윗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분 앞에 얼마나 겸손하게 행하였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3절 이하의 노래를 통해 다윗이 어떻게 하나님을 높였는지 보면,

여호와를 의뢰하라. 여호와를 기뻐하라. 여호와께 맡기라. 여호와를 기다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려고 하면 먼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인생의 키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고, 나의 가장 값진 것들을 드릴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신뢰하였기에 이삭을 바치라 했을 때 바칠 수 있었습니다. 무슨 특별한 뜻이 있겠지, 이삭을 제단에 바친다고 하더라도 후손을 약속하셨으니까 다시 살려주시겠지 하는 무한 신뢰가 있었기에 아들을 바치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신뢰하면 하나님이 이끌어 가시는 모든 일에 기뻐할 수 있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뻐함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맡기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맡겼을 때는 결과에 대해 초조해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실 일의 결과를 기다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분을 높여드리고자 할 때 하나님께 내 인생에서 최고의 것들로 드릴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32절에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너의 첫 것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내 물질, 내 시간, 내 건강, 내 지식 등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들을 구별하여 첫 것, 가장 가치 있는 것들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최선이 아닌 차선으로 하나님을 대하게 될 뿐입니다.

내 인생 최고의 것으로 하나님을 높여드리기를 주저하면서 어떻게 하나님께 많은 것들을 기대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결국 우리가 심은 대로 거두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높이고, 주님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순종하고, 주님께 최고의 것을 드리고, 헌신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대우해주시겠습니까?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라

세 번째 행동원칙으로 나실인은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시체를 부정하게 여겼습니다. 그것을 죄의 결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체를 멀리하라는 말씀은 죄를 멀리하라는 요구입니다. 나실인은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되어 드려진 자입니다. 그러기에 철저하게 성별되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은 유월절을 제정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무교병을 먹게 하셨고 이어서 일주일간 무교절을 지키면서 누룩을 각 가정에서 다 제거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누룩을 제하지 않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어진다고 하였습니다. 누룩은 급속하게 퍼지는 죄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 점에서 누룩을 제거하라고 하신 명령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속받은 백성으로서 죄를 떠나 거룩하게 구별된 삶을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로서 여전히 죄 가운데 살아가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설령 산다고 해도 그것은 위선일 뿐입니다.

죄는 분명 끊어내야 합니다. 멀리해야 합니다. 적당히 타협하고 물러서다보면 우리는 죄의 지배를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가나안 정복전쟁에서 헤렘, 즉 성전을 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헤렘은 전쟁에서 상대방을 진멸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남녀노소, 가축까지 다 죽이고, 그 땅에 모든 집 또한 다 헐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정한 것들의 위력을 아셨습니다. 죄의 씨앗을 남겨둔다면 결국 오염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정복전쟁을 통해 가나안의 부족들을 진멸하지 못하고, 그 죄악 된 영향이 이스라엘을 타락하게 만들었습니다. 우상을 섬기고, 음란함 가운데 빠져들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다가 약속의 땅에서 남과 북이 차례대로 멸망했습니다.

요즘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세상의 죄 된 자리에 자신을 노출시켜야 함을 의미합니다. 바이러스에 노출되면 병에 걸리듯이 죄의 바이러스도 우리를 오염시켜 영적으로 죽게 만듭니다. 결코 쉽지 않은 영적 전쟁터입니다. 그 전쟁에서 영적인 면역력을 높여야 하고, 정말 타협할 수 없는, 물러설 수 없는 저지선 또한 구축해야 합니다.

우리의 저지선은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세 가지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허물어지면 모든 것이 허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화려한 세상 뒤에 숨어 사탄은 우리의 기본인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의 신뢰의 관계를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이 기본이 무너지면 다른 것은 쉽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기본을 지켜낼 수 있는 힘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나옵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영적 기본을 갖추었을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나라를 위해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무 인간을 들어 그냥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참으로 준비된 자들을 사용하십니다. 모세도 40년 왕궁에서, 40년 광야학교에서 훈련시키시고 불붙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80년입니다. 자기를 내려놓을 때까지 하나님은 연단하셨습니다. 기본이 되는 하나님의 일군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입니다. 기본이 되어도 한 순간 실수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기본이 없으면 정말 뻔 한 것입니다.

그러나 넘어지더라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모든 기회가 차단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돌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다시 출발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는데, 감히 우리가 포기하기를 너무 쉽게 합니다. 우리의 구별됨이 무너지더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시켜주시고, 새로운 기회를 주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이루면서 신앙의 기본을 구축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기본을 갖추고 끝까지 가는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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