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1월20일 주일설교문
[ 너희의 구원을 이루라 : 빌2장12-18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빌립보서2장6-11절을 통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우시고, 자신의 지위를 내려놓음으로써 자기를 희생하신 모범을 빌립보교인들에게 전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이 그리스도의 모범을 빌립보교인들이 실제적으로 살아야 할 모델로 제시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이 말씀에 이어지는 오늘 본문말씀인 12절 이하에서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는 공동체적인 삶이 무엇인지 전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서 자발적인 열정과 열심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빌립보에 있든지, 혹은 없든지 상관없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였던 것처럼, 그들 또한 하나님께 항상 순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그들 공동체의 온전함을 이루어갈 것을 첫째로 권면하였습니다. 12절에“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고 하였습니다.
교회들마다보면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계실 때는 봉사자들은 금요기도회에 꼭 나오라고 하는 통에 평소에 잘나오지 않던 금요기도회에 억지로 나오다가, 담임목사님이 다른 집회인도로, 또는 외국을 나가 자리를 비우면 당장에 사람들의 숫자가 줄어드는 불편한 진실을 여러분들은 아십니까? 이것은 교회가 건강하지 못한 증거입니다. 사람의 눈을 의식해서는 결코 우리의 신앙이 성장할 수도 없고, 교회공동체 또한 온전하게 세워질 수 없습니다. 우린 사람의 눈이 아니라 불꽃같은 눈동자로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의식해야 합니다. 왜 사람의 눈을 의식해야 합니까? 옆에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마십시오. 그로 인해 사람 앞에서 외식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보든 안보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고 계심이 더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니 떨리는 마음으로 나 자신을 절제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절대순종하고 있는지, 어긋난 길로 가고 있진 않는지, 순종의 길을 통해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지 자기 자신을 성찰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너희 구원을 이루라”했습니다. 여기에서 구원은 개인의 종말론적인 구원이기보다는 빌립보 교회공동체의 하나 됨과 영적인 안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금 빌립보 교회 안에 삐거덕거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바울의 소망인 것입니다. 물론 그 안에는 개인의 성화를 이루어가는 의미도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각각의 성도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성숙의 과정, 즉 성화의 과정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이루어 가느냐에 따라 하나님 나라의 기업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여기까지 말씀드린 과정을 다시 정리해보면 빌2:1-4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서로 하나 되어 협력하기를 당부하였습니다. 교회의 연합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5-1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짐과 자기 비움을 통해 그들이 따라야 할 모범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리고 12절 이하에서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함께 노력하여 다툼과 반목과 허영심을 버리고, 영적으로 온전하게 하나가 되는 공동체의 성숙함에 이르기를 당부 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12절에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은 일회적이고, 한정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구원을 이루라는 말에서 사용된 이루다의 원어는‘카테르가제스타이’입니다. 이 단어는 완성이나 강조를 나타내는 접두어가 붙어, 그 일이 종결될 때까지 계속해서 행한다는 뜻으로 목표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함의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기에 빌립보교인들은 교회의 영적인 성숙함과 연합이 이루어지기까지 이 일을 도모하되, 지속적으로, 꾸준하게 그 일을“두렵고 떨림으로”행하여야 했습니다. 이것은 성취의 전 과정에서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고 책임 있는 행동을 해야 하는 것과 함께 교인들 상호간에 서로 존중해야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체를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주 안에서 귀한 형제자매이기 때문입니다. 옆에 계신 분들이 여러분에게 귀중한 분이십니까? 그러면 고백하십시오. “당신은 귀중한 나의 지체입니다. 언제나 존중하겠습니다.”
우리는 개인적이건 공동체적이건 우리의 성화를 위해서 “두렵고 떨림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그런 성화를 위한 노력을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 은혜의 덕분이라는 것과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셔서 우리의 의지를 발동시키시고 우리에게 능력을 주심으로써만 우리가 그와 같은 두렵고 떨림으로 지속적인 노력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13절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안에서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거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실까?”의 문제는 우리의 초미의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으로 지속적으로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과 동역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의 삶 속에서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역사하실 뿐만 아니라, 언제나 교회를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보존하고 이끌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응답하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전한 성숙함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 안에서, 교회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지 않은 채 우리의 온전함을 위해, 교회공동체의 하나 됨을 위해 노력하는 일은 단지 인간적인 일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신통치 않습니다. “너희의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감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두려고 떨림으로 노력하라고 권면한 바울은 이제 그것을 위해서 빌립보교인들이 실제적으로 해야 할 일을 구체화하여 일러 주고 있습니다. 14절에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고 했습니다. 왜 바울은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고 하였을까요? 이것은 공동체 안에서 무엇보다 먼저 선행되어야 할 덕목으로 무릇 공동체 안에는 원망이나 불평이 사라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원망이란 말은 “불만스러워 수군거리기”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주특기였습니다. 그들은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어 약속의 땅으로 가는 동안, 그 길이 험하고 어렵다고 하여 매번 불만에 차 수군거리며 그들의 지도자인 모세를 원망했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구원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40년을 보내다가 다 죽어야 했습니다. 물질적으로 쪼들리거나, 핍박이 있거나 다른 어떤 어려움이 있으면, 교회 안에서 지체에 대해, 목자에 대해 마음이 상하면, 믿음 생활하다 시험에 들면, 하나님 앞에서 원망할 수도 있고, 교인 상호간에 서로 원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 일로 인해 목자에 대해 원망하고 시비 걸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 공동체는 파괴되고 맙니다. 원망과 시비야말로 공동체를 파괴하는 매우 강한 독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원망과 시비가 가득 찬 교회가 되어, 어찌 세상을 일깨워나가고, 저들에게 복음으로 나아갈 수 있고, 빛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너나 잘하세요!”라는 말이 부메랑이 되어 날아올 것입니다.
15절 이하를 보면 사도 바울이 빌립보교인들에게 왜 원망과 시비가 교회 안에 없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빛으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15절에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순전한 하나님의 자녀로 세움 받기 위해선 흠이 없어야 합니다. 요즘 새로운 정부가 구성되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고, 그 자리에 앉아야 할 사람들의 하마평이 무성합니다. 인사가 만사라고 했는데, 인사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 무엇입니까? 흠이 없어야 합니다. “다운계약서를 썼다. 위장전입이다. 탈세다. 논문을 표절했다. 전과가 있다.” 등등 흠이 발견되면 반드시 낙마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일도 이런데 하물며 하나님의 일에 흠이 있다면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와 반드시 구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 이 같은 높은 구별된 삶의 수준이 요구되는 것입니까? 하나의 이유는“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로, 여전히 어둠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흠 없고 순전한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세상을 밝히는 빛으로 파송하고자 하심입니다. 흠이 있고 순전하지 못한데 어찌 세상의 빛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가 오히려 어둠인데 어둠이 어찌 밝힐 수 있습니까? 교회가 점점 힘을 잃어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성도 개인의 영적인 권세가 무뎌짐도 이 문제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이 되고, 하나님의 대행자가 될 수 있는 높은 영적 수준이어야 세상을 밝힐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 세상을 밝히 비추는 빛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른 하나의 이유는 빌립보 교인들로 하여금 흔들리지 않고 복음에 굳게 서서 믿음의 경주를 다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16절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생명의 말씀을 밝혀”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생명의 말씀인 복음을 굳게 잡으라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굳게 잡음으로써 그리스도의 날에, 즉 종말의 날에 심판대 앞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빌립보 교인들의 신실함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말씀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의 성품은 개발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요15:5에서“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고, 그 능력 안에서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를 밝혀 저들을 변혁시켜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빌립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 일을 경기장에서 운동선수가 달음박질하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이 바울에게서 전해 받은 복음을 굳게 잡고 그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갈 때 복음을 전한 자신의 달음질이 헛되지 않은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아름다운 결말을 “나의 자랑”이란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들의 성숙함이 목회자의 자랑이 된다는 것은 나아가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셨고, 우리 안에서 오늘도 행하시는 하나님의 자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자랑으로만 그치는, 결코 인간적인 기쁨으로 그쳐지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하나님의 자랑이 되고, 기쁨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렇게 성숙한 빌립보 교인들의 믿음과 섬김에 대한 기대는 바울로 하여금 흐뭇하게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아직 완성되지 못한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자신을 전제로 드릴지라도 바울은 기뻐한다고 저들에게 고백합니다. 17절“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전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목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번제로 드리는 어린 양과 함께 제단에 포도주 잔으로 부어서 드리던 제사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믿음의 제물과 섬김이라는 번제 위에 자신이 뿌려지는 또 하나의 제물이 되어 그 헌신을 온전하게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기뻐하고 또 기뻐한다고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번제와 전제라는 희생 제사를 예로 들어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면서, 그 죽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열정으로 기꺼이 자신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을 빌립보 교인들에게 밝힌 것입니다. 설령 자신이 여기에서 죽는다고 해도, 그 순교의 피로 빌립보 교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전제가 될 수 있다면, 그래서 그들의 믿음의 성숙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을 전적인 기쁨으로 수용하겠다는 의지인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신앙을 강화시키고, 그들의 목회자인 바울의 죽음마저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굳건한 신앙인이 되도록 요청하였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1장에서도 자신의 희생을 오히려 복음의 진보로, 긍정적으로 해석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서1장27절부터 권면해 온대로 빌립보 교인들이 복음에 입각한 올바른 삶, 곧 하나님께 순종하고 교회를 세워 올리는 삶을 사는데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자기희생을 통해 모범을 보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신을 전제로 드리는 바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사도 바울의 희생을 본받아 빌립보 교인들에게 교회 공동체의 구원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빌립보 교인들을 향한 목회자로서, 영적인 아비로서의 바울의 마음입니다.
이렇게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 하이라이트는 자기희생조차도 그것을 기쁨으로 승화시키는 바울의 권면에 있습니다. 바울은 18절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리스도를 본받아 이루어지는 자기희생을 힘들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동일한 기쁨으로 그 일에 동참할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18절에“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바울의 수감은 그들에게 오히려 충격이 되었을 것이고, 닥쳐올 그의 죽음은 그들로 하여금 멘탈 붕괴를 가져올 수도 있는 어마어마한 사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죽음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기쁨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복음 안에서만 통용되는 역설적인 말입니다.
우리는 어려움과 고난 앞에서 슬퍼하거나 두려워하거나 원망하거나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그것을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격려와 지지 속에서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이것이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굳게 붙어 서서 신앙 생활하는 성도입니다. 세상을 밝힐 수 있는 원동력이 바로 이와 같은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인 권세 앞에서 세상이 어찌 감히 함부로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의 구원을 이루라!” 그리고 그것을 이루어갈 수 있도록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뜻을 두고 행하시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힘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빌립보교인들의 믿음제물 위에 전제로 부어진 바울의 희생을 본받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간다면 하나님 부어주시는 기쁨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행복해질 것입니다. 교회가 평안해질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하나 됨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이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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