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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동영상

네 믿음이 크도다: 마태복음 15장 21-28절

by 최수근 2023. 7. 3.

2023년 7월 2일 주일예배

[네 믿음이 크도다: 마태복음 15장 21-28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누군가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여겨질 때 믿음이 좋다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 믿음은 보여지는 것으로 평가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 점에서 당시 유대인들에 눈에 비쳐지는 바리새인들은 믿음이 특별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대중의 시선과는 달리 오히려 그들을 향해 위선자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단지 행동으로 평가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무엇을 보시는 걸까요? 사람들이 예상치 못했던 한 인물을 통해 그 믿음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시는지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장로들의 전통으로 인한 정결법 논쟁 이후 예수님은 다시 한번 이방 지역인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15: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두로와 시돈은 오늘날 레바논에 있는 도시들입니다. 예수님이 이방 지역으로 가실 때는 분명한 목적을 갖고 가셨습니다. 거라사 지방에 가셨을 때도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을 만나셨고 그에게서 군대 귀신을 쫓아내시고 그 사람을 치유하고 바로 돌아오셨습니다. 당신의 사역이 지금 유대인에게 집중하고 있으면서도 결국은 확장될 구원의 역사를 위해 이방인을 향한 마음을 드러내신 겁니다.

두로와 시돈, 이 이방인 지역에서 예수님이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가나안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지역으로 들어가셨을 때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께 달려 나와 소리 질러 간청하였습니다. 15: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쳤습니다. 이교도로서 비유대인인데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부름으로써 여인은 놀랍게도 예수님이 약속된 메시아이심을 고백한 겁니다. 이 여인에게는 흉악하게 귀신 들린 딸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자기 딸을 고치기 위해 많이 노력했을 겁니다. 그 지역에는 치유의 신인 에쉬문에게 헌정한 신전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곳에 가서 수없이 빌기도 했을 겁니다. 하지만 딸의 상황은 여전했습니다.

그러던 중 여인은 많은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통해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그녀는 인지했고,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랬을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 지역으로 오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달려 나와 예수님께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쳤던 겁니다. 여인은 세 번씩이나 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예수님에 대한 최대한의 예우를 갖추면서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질병이나 귀신 들린 문제로 예수님께 나와 간청할 때 예수님은 분명히 귀를 기울이셨고, 그들의 소원대로 고쳐주셨습니다. 이번에도 제자들이나 주변의 사람들은 여인의 딸을 고쳐줄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을 지켜보던 제자들은 도움을 구하는 여인의 외침에 응답하지 않으시니까 답답한 나머지 예수님께 청하였습니다.

15: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제자들이 소리 지르는 여인이 시끄러우니까 여인을 그냥 쫓아내자는 말이었을까요?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결코 그게 아닙니다. 이런 의미입니다. “선생님, 계속 여인이 소리를 지르며 청하니 듣기 민망합니다. 가만히 계시지 말고 빨리 딸을 치료해주셔서 여인이 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는 간청입니다. 여인의 간청에 반응하지 않는 예수님을 볼 때 제자들도 답답했던 겁니다.

그렇게 보채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참 어이없는 답변을 하셨습니다.

15: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지금 두로와 시돈에 분명히 목적이 있어서 오신 것인데, 더군다나 주변엔 이방인들만 득실거릴 텐데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에 오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가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실 건데 바리새인들과 논쟁했으니 힘도 빠졌겠다 단지 쉬러 가셨다고 하기엔 좀 그렇습니다. 굳이 이방인 지역이 아니어도 가실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지금 뭔가 다른 것을 기대하고 계신 겁니다. 바로 가나안 여인을 시험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방인은 내 관심사가 아니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뜻밖의 태도 앞에서도 여인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15: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예수님의 반응에 상관없이 이제 여인은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하며 대놓고 도와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간청을 들어주시지 않는 한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이와 같은 여인의 간청에 예수님은 정말 예수님답지 않은 말로 여인의 간청을 한 번 더 거절하셨습니다. 실은 충격적인 발언입니다. 15:26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이 말씀 그대로 해석하면 이방 여인과 딸은 개라는 것 아닙니까? 여기에서 비유로서 말씀하신 는 이스라엘의 언약공동체와 분리되어있는 이방인이거나 대적자에 대한 비천함의 딱지입니다. 반면에 자녀는 이스라엘 언약공동체입니다.

물론 문자 그대로 본다면 요즘 상황에서는 이 말씀이 맞지는 않습니다. 개를 키우는 사람들을 보면 심한 사람은 입에 들어갔던 것까지 주기도 하고, 주인도 잘 먹지 않는 맛있는 음식을 주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개 취급당하는 여인, 다른 것도 아니고 귀신 들린 딸을 고쳐 달라고 간청하는 것뿐인데, 매몰차게 개 취급까지 하며 거절하니 여인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매몰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인은 예수님의 말을 대 받아쳤습니다. 15: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게 뭐라고 하는 겁니까? “저를 개라고 해도 괜찮습니다. 말씀처럼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던져주지는 않겠지만 개들도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그러니 개라고 해서 먹을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개로 여기시는 저에게 부스러기 은혜라도 주십시오.”

이 여인은 개가 어떻게 먹고 사는지 사물을 잘 관찰하고 있었고, 이것으로 예수님의 이야기를 반박하였습니다. 이 말에서 딸의 치유를 위한 여인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고 포기할 수 없는 것인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의 태도에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감정에 휩쓸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이 감정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좋을 때는 한 없이 올라가다가, 나빠지면 바로 곤두박질치는 겁니다.

이 여인도 얼마나 감정이 많이 상했겠습니까? 그러나 여인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자기 딸을 괴롭히는 귀신을 내어쫓고 딸을 살리려고 하는 여인의 간절함은 그 어떤 말에도 물러서지 않을 기세였습니다. 게다가 이것은 예수님이 확실히 도움을 주실 수 있을 거라고 여인이 믿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태도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예수님이 이 여인을 꿰뚫어 보셨고, 예수님의 거절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갈 여인임을 아셨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여인이 상처받고 가버리면 예수님이 그곳에 가신 목적이 없어지는 겁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에 참으로 지혜롭게 대처하는 여인을 향하여 예수님은 감탄하셨습니다.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예수님은 여자를 칭찬하셨습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예수님은 여인에게서 무엇을 보시고 네 믿음이 크도다하신 걸까요?

15:24에서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여인을 시험하시는 데 목적이 있어서입니다.

그녀가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이 궁극적으로는 이 땅의 모든 백성을 치유하시고 구원하시고자 하신다는 것을 참으로 깨달아 알고 있는지를 지켜보셨던 겁니다. 이것을 모르고, 또 믿지 못한다면 예수님의 거절에 여인은 당장 마음 상해 가버렸을 겁니다. 그러나 가나안 여인은 놀랍게도 이스라엘의 메시아로서 예수님이 모든 이들의 구원자가 되시고,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모든 사람의 필요를 돌보시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주인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 개의 이야기를 통해 여인은 하나님께 그와 같은 부스러기 은혜를 간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써 개처럼 초라하게 보였던 이방 여인에게 반전이 일어납니다. 주님 앞에, 제자들 앞에 그리고 오늘 우리 앞에 영원토록 거대한 믿음의 여인으로 서게 된 것입니다. 여인은 어떤 큰 기적이나 대우, 은혜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대답처럼 부스러기라도 좋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부스러기가 아닌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예수님은 훌륭한 믿음을 가졌다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그 믿음은 바로 그 시간에 딸이 치유되는 보상을 얻었습니다. “그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로마 백부장의 믿음에서도 환자가 원거리에 있었지만, 치유 받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점에서 믿음의 역사는 시공간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믿음의 역사는 놀라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실지라도, 참된 믿음에는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그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드러나고 있는 약속에 기반한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와 함께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에게 그 마음이 열려 있어서, 예수님께서 딸을 고쳐주시는 은혜를 입을 수 있었습니다.

마태는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사람, 이스라엘과 언약 바깥에 있었던 이방인 여인이 예수님을 끝까지 신뢰함으로 딸이 치유되는 과정을 통해 위대한 믿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유대인들, 특히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결코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거부했고,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다는 결과로 나아갔습니다. 그들의 선민의식과 특권에 취해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그림을 편협하게 바라본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거절하는 이스라엘을 떠나 두로와 시돈 이방의 지역으로 나가 가나안 여인의 딸을 치유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을 넘어 모든 열방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주셨습니다.

믿음이 출중하다고 했던 유대인들은 거부하고, 가나안 여인은 이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모습에서 과연 우리의 믿음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게 됩니다. 큰 믿음은 양이 많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텍스트와 지식을 갖고 있다고 해서 뛰어난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전통에 기반한 행동이 거룩하고 출중하다고 해서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위대한 믿음은 어떤 환경과 곤란에 직면해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요동함이 없이 신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가나안 여인의 믿음은 그녀가 개 취급당하는 자신의 처지에 의한 불편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딸의 치유를 얻기 위해선 결코 간청을 멈추지 않겠다는 확고한 결심을 지녔음을 알려줍니다. 이것은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을 단순한 인물로 본 것이 아니라 자신과 딸을 구원하실 분으로 보았다는 증거이고, 이렇게 예수님을 향해 진지하게 열려 있었기에 예수님은 응답하셨고 고쳐주셨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 그분을 알고 마음과 마음으로 만났던 것지요.

이 사건을 통해 마태는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사람과 지역에서 참된 믿음의 필연성을 조명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든 세대의 사람들에게 소망을 제공합니다. 예수님은 소망의 부스러기도 없는 개와 같은 여인과 어린 딸에게 긍휼을 보이시고 반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반응은 믿음의 눈으로 보고 열린 마음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해당됩니다. 예수님의 돌보심은 그의 말씀과 뜻을 삶의 실제와 목적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이들에게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 앞에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것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대속의 피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비결은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함에 있습니다. 진정 마음과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의 특권을 부여받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참된 특권은 믿음으로 예수님께 열려 있으므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입니다. 특권은 책임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그분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갈 놀라운 역사를 기대할 때, 그와 함께 그분을 향하여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 때 우리는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에 하나님의 나라의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믿고 있다면 여전히 힘든 상황이 계속된다고 할지라도 주님을 향한 우리의 간구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가나안 여인을 대했던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은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여인처럼 예수님 앞에 간절한 마음으로 섰을 때 그런 우리를 향해 예수님은 네 믿음이 크도다말씀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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