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9일 주일예배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미 6장 6-8절]
1세기 사회에서의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심과 21세기 사회에서의 그리스도인의 부르심은 그 목적 자체가 다르지 않습니다. 지식과 경험의 총량이 늘어났을 뿐이지 사람이 사는 모습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어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할까요? 하나님은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실까요? 예수님의 신실한 제자들이 기독교적 사고 없이 기독교적 행동을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시작으로 안디옥, 빌립보, 에베소, 갈라디아, 고린도, 로마로 교회는 확장되어 갔습니다. 그냥 순조롭게 과정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로마 당국과 유대교의 박해도 극심했고, 교회 안에서도 문제들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와 교부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순교라는 위협 앞에서도 하나님께서 부르신 소명을 이루어가기를 기뻐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실제적인 것이었습니다. 형식에 사로잡혀 신앙생활을 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죽음 앞에서 절차를 따지고, 문자적으로 삶을 돌아보기에는 참으로 가벼운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신앙적 삶은 로마를 변화시켰습니다. 로마 사회 속에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의 편지로서 삶이 충족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흐름도 국가의 종교가 되며 자기의 것들로 풍성하게 채워지기 시작하면서 그치고 맙니다. 이건 광야의 시간과 가나안 정복 전쟁을 거치며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 앞에 서는 놀라운 영적이고 실제적인 경험을 했음에도 그들을 선택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우선하여 살아가는 문제에 직면했을 때 실패한 이스라엘의 모습과 겹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온전히 응답하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실패 원인은 무엇일까요? 그들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 그분의 마음을 잘못 읽어낸 것에서부터였습니다. 우리가 정확하게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해물들이 없어야 합니다. 순전한 하나님의 마음에만 집중할 수 있어야 하죠. 자기감정, 자기 생각, 자기 기호, 자기 경험이라는 필터링이 더해지는 순간 하나님의 뜻을 잘못 읽어내고 마는 겁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쉽게 범하는 실수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의 열심은 특별했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미 6: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미 6: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이스라엘이 많은 생각을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무엇을 가지고 나아가야 할지? 자신이 드리는 제물을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실지? 심지어 자신의 죄를 위해 자기 자식까지 드려야 할지? 많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이런 저들의 고민을 하나님께서 과연 마음으로 받으실까에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저들의 일방적인 열심이라는데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잘못 읽었습니다. 아니 율법도 잘못 해독해내었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그들의 예배에만 집중하고 계신 것으로 말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이 아름답게 창조하신 세상을 위탁받은 청지기로서 잘 감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가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세상에서의 삶은 도외시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만 신경을 씁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신데 교회 안에만 하나님을 가두려고 하는 신성모독의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염려처럼 하나님은 방향을 잃어버린 그들의 모든 열심을 거부하셨습니다. 그들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예배를 거절하신 것입니다.
사 1: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사 1: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하나님은 그들의 예배를 가증스럽게 여기셨습니다. 악으로 점철된 그들의 삶을 견디지 못하셨습니다. 그로 인해 그들의 절기를 싫어하셨고, 힘들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나름 지극정성으로 제사드린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에서는 황당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가장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그들의 삶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를 읽어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예배를 거부하신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들의 정체성과 그 정체성에 기반한 삶은 통째로 사라지고 그럴싸한 형식만 남아 있어서입니다. 그와 같은 형식, 예전, 결례법이 우선될 수는 없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그것들을 전부 무시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예전도 중요하지만, 그 예전을 의미 있게 만들 요소, 하나님의 마음이 기뻐하실 요소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배자로서 삶에 바탕을 둔 덕목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배자로서 우리 삶에 요구하는 덕목은 어떤 것일까요?
미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미 다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선하게 여기시는지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 눈이 가리어져서,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다 보니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점점 더 멀어질 뿐입니다.
미가 6장 8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하시는 세 가지 덕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정의입니다. “오직 정의를 행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불의를 떠나, 불의는 옛사람의 덕목입니다. 지금 새 사람으로서 우리는 오직 정의를 행하는 자여야 합니다. 우리는 단지 친절하게 행해야 할 뿐 아니라 정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인종차별, 불평등, 다문화사회, 경제적 불균형, 빈곤, 열악한 노동 현장 등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어야 할 곳이 참으로 많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정의가 이 땅에 충만하게 실현되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암 5:24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들 앞에서 공의롭게 행하셨습니다. 40년 광야 생활을 통해 그들을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공의롭게 행한 일을 이들은 기억하고 알아야만 했습니다.
미 6:5 “내 백성아 너는 모압 왕 발락이 꾀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기억하며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기억하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공의롭게 행한 일을 알리라 하실 것이니라.”
하나님은 그들의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과정에서 공의롭게 행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기반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언약을 끝까지 지키고자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얻는 것은 복잡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알고 그 길에 바로 서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에 순종하는 삶인데 삶에서 실제적인 이행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신 7:9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는 오늘날 법문만 가지고 사람들을 평가하고 처단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공의를 공의 되게 하는 것은 신적인 사랑이 더해져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정의가 세상의 정의와 차별화되는 지점입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내어주시는 희생적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둘째로 인자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를 “헷세드”라고 합니다. “긍휼”, “인애”를 의미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말씀해주셨습니다. 강도 만난 한 사람이 거의 죽게 되어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 사람을 제사장도 못 본 척 지나가고 레위인도 슬쩍 지나가고 말았지만, 사마리아인은 그에게 다가가 상처를 닦아주고, 치료를 위해 여관에 강도 만난 사람을 맡겨놓습니다. 앞에 두 사람은 소위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맡은 이들이었습니다. 위기에 처한 이웃을 외면한 이들의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을까요?
우리에게 다른 이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거기에서부터 시작되는 사랑의 행동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그러니 그런 예배자의 예배는 겉돌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채움도 어떤 위로도 어떤 회복도 있을 수가 없죠.
이렇게 이상의 두 가지는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고, 인자, 즉 헤세드이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성품이 삶으로 배어 나오게 됩니다. 그런 삶이라면 하나님이 흠향하시는 아름다운 향기가 나지 않겠어요.
셋째, 하나님은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겸손을 요청하셨습니다. 겸손은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길에서 매우 중요한 덕목이어서입니다. 겸손이 없는 동행은 결코 가능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불쑥불쑥 자기가 튀어나오는데 어떻게 성질 죽이고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동행은 곧 파탄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너무도 많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드리는 자로부터 어떤 외적인 선물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 즐겨 봉사하고 동료들에게 정의를 행하는 겸손한 자를 요구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예배자로서 서기를 원하시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왜 충족시켜드리지 못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 각성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았을 때, 그래서 자신들의 삶을 돌아보고 하나님 백성다운 삶을 살고자 할 때는 하나님께로 온전히 나아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은 그렇게 길게 가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내면을 정확하게 인지하기보다는 주변의 많은 다른 것들에게 마음을 사로잡혀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 자가 하나님의 성품으로 이 땅을 살아가게 되지 않겠습니까? 하늘로부터 흘러오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것을 세상으로 흘려보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질책 앞에 설 뿐입니다.
마 23:23 “화 일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우리의 시작이 처음부터 잘못되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 편에 설 수 없습니다. 인애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조금씩 수정하면서 가기보다는 다시 믿음의 원점이신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인애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구원의 자리로 돌아와 자신을 돌아볼 때,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다시 각성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움을 세워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그 삶으로 들여지는 온전한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흠향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그리스도인 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것입니다. 이 일에 기쁨으로 행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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