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14일 주일설교문
[믿음과 현실 사이에서 : 롬 4장 18-22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현실과 믿음 사이에 간극이 벌어져 있는 경우가 실은 다반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이라고 확신하는데 그 믿음이 가끔씩 자신의 감정이나 지금 펼쳐지고 있는 상황과 도무지 맞지 않을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감동도 주셨고, 말씀도 주셨는데 그렇지만 상황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그렇게 시간이 답답하게 흘러갈 때, 그래서 도무지 상황이 호전될 것 같지 않을 때 그 간극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막상 닥쳐보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것 때문에 실족하여 주저앉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드러나는 믿음과 현실 사이를 무엇으로 메워야 합니까?
여기에서 막혀 버리면 대부분 하나님을 향해 열심을 다하던 기도를 멈추어 버립니다. 예배에 참여하지 않게 됩니다. 조금씩 그러다가 아예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탓을 하나님께 돌리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이 순간 누가 환호성을 지르고, 축제를 버리겠습니까? 그 뒤에서 우리의 신앙과 감정을 갖고 요리하던 사탄입니다. 가장 바라던 결과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최악의 결과에 이르기 전 우리는 사탄이 쳐 놓은 덫에서 빠져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아브라함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어떻게 실제로 실행될 수 있었는지를 보고 그 답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희망 없는 가운데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아브라함조차도, 그의 믿음이 그가 처해 있던 지상의 현실과 하나님의 약속 사이에 긴장 관계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미미한 긴장관계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멋지게 부르셨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나왔지만 인간의 보편적인 상식을 뛰어넘는 간극이 그의 앞에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다른 것들은 시간이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 해도 자녀의 약속은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식에 대한 약속을 주셨지만 실은 아브라함 자신의 몸 상태로 보거나 아내의 몸 상태로 볼 때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자신도 두 사람이 애를 가질 수 있는 처지가 분명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19a절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보통 이정도 되면 포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냥 좋은 의미 정도로 받아들이고 말입니다. 분명 자기와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18a절에서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인간적으로 볼 때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아 보였지만, 비록 모든 보이는 현실이 그런 믿음을 어리석게 보이게 할지라도 그 믿음이 작아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은 그 어떤 가능성도 열려 있지 않은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그 자신의 삶에서 역사하시도록 하나님의 공간을 열어둔 것입니다.
또한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장차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시는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그의 믿음을 지켜주셨다는 점입니다.
18b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 점에서 분명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우리의 삶에서 드러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믿음으로 인해 아브라함은 당장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믿음이 인생 전반에 대한 순진한 낙관주의도 아니고 자기 자신을 믿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믿음이란 우리의 연약함이나 감정 인식에도 불구하고 그 무엇인가에 근거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사실 아브라함도 일순간의 의심을 가질 수 있었겠지만 그것은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흔들림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그것들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자신을 내 맡겼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약해지지 않은 것은 그가 남달리 강한 인간이어서가 아닙니다. 그의 삶을 보면 그렇게 강한 남자가 아닙니다. 치졸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약해지지 않은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약속 이외에 다른 기댈 곳이 없던 약한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약속에 기댐으로써 오히려 약함은 믿음으로 견고하여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가 됩니다.
20절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인간적인 눈으로는 약속이 이행될 수 없다는 것이 빤히 보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부정적인 상황들을 봅니다. 100세라고 하는 아브라함의 나이는 자식을 낳는 데에 장애물입니다. 그것들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다보면 의심하게 되고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불신하고 의심하기 보다는 약속을 이루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깊이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후손을 약속한 하나님이 로마서 4장 17절의 말씀처럼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여러 약속을 하셨습니다. 개인의 복, 땅과 자손의 복, 장차 오실 구속자가 약속에 포함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까지 안달복달하거나 조바심 속에 전전긍긍하기보다 느긋하게 기다렸습니다. 그의 일상은 하나님을 향한 경배와 영광 돌리기라는 평상의 신실함으로 채워졌습니다.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오랜 기다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느긋하게 할 수 있었던 동력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바를 능히 성취하리라는 전적인 확신에 있었던 것입니다. 21절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에 관해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감정과 평판, 그리고 환경이 하나님의 약속과 상반되어서 앞으로 나아갈 만한 어떤 근거도 없을 때조차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붙잡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물리적인 증거가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을 때조차라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이루신다는 확신입니다. 그 점에서 믿음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바라보면서 그것이 우리 자신을 위한 진실이 되게 하는 힘입니다.
우리 자신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솔직히 우리는 아브라함의 상황보다 더 좋습니다. 아브라함보다 하나님에 관한 훨씬 더 많은 사실들과 그 분의 사랑과 능력에 관한 더 위대한 증거들을 갖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 보다 잃은 것도, 앞으로 잃을 것도 별로 없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 깊이 생각한다면 우리는 아브라함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근거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당장에 불편한 것들에 집중하여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관해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들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대해 자신이 아는 것을 토대로 자신의 연약한 감각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함으로써 이 믿음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도무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우리와 하나님은 멀어져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 쪽으로 우리의 모든 시선을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분을 좀 묵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대하여 참으로 신실하신 분 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것을 그의 의로 여겨주셨습니다. 22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믿음의 삶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하시겠다고 한 말씀을 붙잡고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가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인생의 분투와 기쁨과 실패를 맛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저앉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함으로 고군분투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은 어여삐 보시고 그런 우리의 믿음을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실은 여전히 자격미달인데도 하나님의 은혜로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여기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자신의 의를 추구했다면 약속된 유업을 받지 못했을 것이고, 이삭과 후손에 대한 약속을 믿지 못했다면 자신의 행위나 가능성을 의지하여 결국 언약의 후사가 되는 데 실패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에 우리의 믿음이 견고하여 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람으로써 의롭다 여김을 받았다면,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구원받는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단순한 열정과 열심일까요? 그것은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으며 아들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가 범죄 한 것 때문에...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한 후손에 대한 약속에 있었고, 우리의 믿음은 그의 자손 가운데 한 사람이 그것을 성취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누구인지를 정의하고 우리의 삶을 분명하게 해주는 약속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의롭게 될 수 있다는 하나님의 약속 외에는 영생에 대한 어떠한 희망도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비록 살아가면서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을 잃을 수도 있고, 사랑하는 것을 빼앗겨서 슬픔에 빠질 수도 있지만 이와 같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약속 안에 있다면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없다고 희망을 잃거나 절망하지는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무엇에든 맛서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남아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렇게 믿음이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믿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 자신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아브라함이 발견했던 겸손과 확신을 가지고 나갈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볼 때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반 한 것이지 우리 감정에 따른 증거에 기반 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아내가 자녀를 가질 수 있는 육체적인 능력이 없음을 온전히 직면했으나 그 이유가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이 행하실 것을 믿지 못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아들이 그에게 태어나고 그 아이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조차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그 자녀를 통해서 이루실 그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서가 말한 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죽인 자를 살리실 수 있음”(11:9)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경험의 열쇠는 궁극적인 실재가 우리가 주변에서 보는 것에 있지 않고 볼 수 없는 것에 있음을 날마다 믿고 살아가는 능력입니다.
아브라함은 임의적으로 어떤 기반도 없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 믿음을 두거나 그가 사라를 통해서 아들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고, 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브라함의 신앙의 기반이었습니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도 똑같은 원리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 믿음이 성경 속에서 우리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쓰인 말씀과 우리의 마음을 붙잡으시는 살아있는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굳건한 실재에 기반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으로서 분발하는 감정을 믿음으로 간주한다는 것입니다. 주변에 보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건강이나 부 또는 특별한 직업, 결혼할 남녀 등을 약속하셨다고 확신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매우 고귀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기반하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그들의 믿음은 이기적인 행동의 결과로 실패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믿음이 잘못 인도되지 않도록 세심하게 성경을 읽고 이 세상에서 성령의 역사를 이해하기를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말씀에 의해서 우리의 믿음이 인도될 때, 무엇보다도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분과 연합하여 살아갈 때, 그래서 그 분을 통해 우리 믿음이 지지를 얻을 때 우리는 믿음과 현실 사이에서 건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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