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6월9일 주일설교문
[ 복음증거를 멈출 수 없습니다: 행4장13-22절 ]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세상의 불의함에 맞선 사람들
세상의 권력자들은 일반 대중들이나 지식층, 또는 반대세력들이 자신의 통치철학과 맞지 않을 때, 단호하게 대처하는 경향을 갖고 있습니다. 언론을 통제하고, 사람들의 주장을 통제합니다. 때론 윽박지르며 위협하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도 이런 통제의 시간을 참 길게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숨죽이고 있지 않았습니다. 강력한 독재정권에 항거해서 자신의 목숨까지도 불사하고 숱한 목소리를 내었던 분들이 있었습니다. 결국 진실이 거짓을 이기기 마련입니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정의가 불의를 넘어뜨리게 되어 있습니다.
요즘 뒤 늦게 중동의 여러 나라에서도 민주화를 위한 반정부시위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숱한 세월 억눌려 있던 시민들 속에 억압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싶은 간절함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조간신문에 터키의 반정부시위와 관련되어 사진 한 장이 실렸습니다. 정부의 시책에 반대하는 시위도중 빨간색 원피스를 입은 한 여인을 향해 터키 경찰이 최류탄을 분사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일상적인 모습으로 길거리에 나왔다가 자신들이 즐겨 찾던 공원을 없애고 그 자리에 회교사원을 건설한다는 터어키 정부계획에 반대해서 시위를 진압하던 경찰과 맞서다 봉변을 당하였습니다. 급기야 그 사진에 나온 빨간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터키 반정부시위의 아이콘으로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한 평범한 여인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 일에 의연하게 맛서는 모습이 사진 속에서 보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여인이 복면 쓰고 몽둥이 휘둘러대는 전문 시위 꾼이었다면 그렇게까지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탄압
이와 같은 권력과 시민들과 대치 상황은 인류의 역사 속에 이런 모양 저런 모양으로 끊임없이 이어왔습니다.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무력으로 인해 희생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목숨을 불사하고 그 불의함에 맞서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이미 예루살렘에서도 한 차례 광풍이 지나갔습니다.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은 갈릴리로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추종했던 세력을 그들의 지도자였던 나사렛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함으로 다 끝장냈다고 생각했습니다. 더 이상 그들의 기득권을 향해 비판의 소리를 낼 사람들이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순절 날 갑자기 나타난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3000명이 부활하신 예수를 믿고, 평생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고침을 받아 일어나는 사건을 통해 사람들이 술렁거리는 것을 보고 유대의 당국자들은 긴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부활에 대한 사도들의 증거로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곧 자기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행동에 들어갔습니다.
이 날도 성전 문에서 구걸하던 거지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친 후 성전으로 가서 사도들은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사도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들은 자들을 감동시키시고 기성종교의 중심부에서 남자만 오천 명 예수님을 믿는 일이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겐 기겁할 일입니다. 예수에 대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던 터라 초장에 사도들의 기세를 꺾어버려야겠다는 생각에 이들 권력집단은 베드로와 요한을 긴급체포하여 옥에 가두었습니다.
성령충만하여
다음 날 종교지도자들이 총출동하여 두 사도를 심문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체포하여 심문했던 것처럼 두 사도에게 똑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지난번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 예수님이 어떻게 되실지 염려스러워 뒤 따라갔다가 한 여종이 베드로에게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다.”고 말했을 때 베드로는 황급히 “내가 그를 알지 못한다”고 부인했었습니다. 그렇게 세 번씩이나 비참하게 예수를 부인했던 베드로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사도행전4장8절에서 달라진 베드로의 모습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예수님을 부정하던 그 때에 베드로는 두려움과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어떤 해를 입지 않을까 부정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성령으로 충만하였습니다. 성령 충만한 베드로는 이제 예수님이 체포되던 당시 도망치던 비겁한 베드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공격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여기에 있습니다. 베드로가 성령 충만하여 하늘의 권세로 무장하였기에 이 땅의 권세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적할 수 있었습니다. 과거 여린 여종에게 조차 부인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성령 충만함으로 위세 등등한 종교지도자들에게 베드로는 담대하게 증거 하였습니다. 더 이상 죽음을 무기로 양심을 압박하는 종교지도자들과 정면으로 맞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였습니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거짓 세력의 위협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은 담대하게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을 보고 놀라워했습니다. 본래 어부출신으로 베드로와 요한은 학문에 능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일목요연하게 구약의 성취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을 보고 종교지도자들은 수군거렸습니다. 게다가 평생 앉은뱅이였던 거지가 멀쩡하게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더 이상 뭐라고 비난할 말이 없었습니다. 더 이상 그들을 가둘 수도 없었습니다. 많은 백성들도 그 일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종교지도자들이라고 해서 그 일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진실을 쉽게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 일을 어떻게 타개할까 고민하다가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도들의 입을 틀어막고자 했습니다. 17절“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종교지도자들이 내세운 방법은 위협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위협하며 경고하였습니다. 18절“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제자들의 입을 봉쇄해버리고자 했습니다.
종교적인 인물들과 하나님의 사람들의 차이가 여기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담대하고도 자신 있게 진리를 말합니다. 정직하고 솔직합니다. 뒤에 숨겨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떳떳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주눅 들지 않습니다. 반대로 종교적인 인물들은 고집스럽고, 변할 줄 모르고, 자기 중심적이고, 인간의 권위나 규례를 하나님 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고, 자기들의 전통을 위해 진리도 서슴없이 버립니다.
누구를 위하여 충성할 것인가?
이에 맞서 꿈쩍하지 않고 베드로와 요한은 많은 종교지도자들 앞에서 담대하게 말하였습니다. 19절“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어느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지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도들은 유대종교지도자들의 권세보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권세를 더욱 두려워했습니다. 20절“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말씀합니다. 베드로는 더 이상 거짓 증인이 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들이 충성해야 할 분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하면서 세상 권력에 당당하게 맞섰습니다. 베드로와 같은 이가 이처럼 거대한 권력 집단 앞에서 항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오직 성령에 의함이었습니다. 하늘의 힘이 우리를 이끌어갈 때 우리의 신앙을 위축시키고, 차단하려고 하는 이 땅의 힘에 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승리
종교지도자들이 오히려 어려운 문제에 부딪쳤습니다. 그들은 두 사람의 교육받지 못한 사도들에 의하여 구석으로 몰렸습니다. 앉은뱅이가 기적적으로 치유되었고, 이 두 명의 성가신 보통 사람들을 압박한다면 군중 사이에서 문제가 생겨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베드로가 주눅 들지 않고 끝까지 복음을 증거 하리라 천명하였을 때 유대 종교자들이 고작 할 수 있었던 것은 두 사도를 더 이상 예수에 대하여 말하지 말라고 위협하며 풀어주는 일뿐이었습니다. 권력자들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출판금지, 보도매체 억제, 서책 판매금지 등 사람들이 그 실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특히 기독교가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교묘하게 법을 제정하여 그 길을 막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소수 인권 운운하면서 성경의 말씀을 전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유럽과 미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무장해제 당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스피릿과는 반대방향으로 흘러가는 시대의 정신과도 싸워야 합니다. 또 기호에 맞는 것들은 말하고 행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것들은 단호히 말하지 않거나 행하지 않는 조직이나 가족이나 단체의 암묵적인 분위기와도 싸워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해, 십자가에 대해, 부활에 대해, 새 생명에 대해 말하고자 할 때 그 하는 일을 막으려는 거짓된 세력들이 이 땅에 있음을 우리는 분명히 인지해야 합니다.
그와 같은 어둠의 힘을 인식하지 못하고 예수님 앞에서 자신만만해하다가 주님을 향한 충성이 여지없이 무너졌었던 베드로였지만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이루어진 성령 충만으로 인해 다시금 그와 같은 상황이 벌어졌을 때, 베드로는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주님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승리의 비결이 있습니다. 나약하게 뒤로 물러서면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세상과 타협하면 결코 우리의 신앙을 지킬 수 없습니다. 더 이상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할 수 없게 됩니다.
끊임없는 영적 싸움이 우리 가운데 벌어지고 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 중 립적이거나 호의적인 무지 상태에 있지 않고 적대적인 대치 상황에 있습니다. 더욱이 세상은 성령을 알지도 못하고 받지도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요구에 저항하고 적대합니다. 그 상황 속에서 우리는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때그때 펼쳐질 상황에 따라 움직일 것인지, 아니면 분명한 믿음의 원칙을 놓지 않고, 우리를 부르신 목적을 이루어가고자 하나님께 보다 분명한 충성을 행할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누구를 위해 충성해야 하는지 분명히 할 때 우리는 오늘도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활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증거 할 수 있습니다.
보고 들은 것
그러나 여기에 앞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에게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기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보았습니다. 들었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보고 들었습니다. 더욱이 그들 속에는 세상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보석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습니다. 더욱이 성령의 임재로 그들 속에 그로 인한 감격이 밀려왔습니다. 그러니 속에서부터 치밀어오는 기쁨을 나누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설령 거대한 힘이 그 분출을 억누른다고 해도 소용없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들으셨습니까? 무엇이 여러분 가운데 자리 잡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이 주저앉아 있는 세상 사람들을 향해 “은과 금 나없지만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당당하게 선언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자리를 피하지 않기 바라십니다. 우리는 멈출 수 없습니다. 세상 그 어떤 방해가 있어도 우리는 복음증거의 발걸음을 멈출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금 세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담대히 증언하는 데 필 요한 능력을 하나님께서 주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거대한 핍박이 공동체를 와해시키려고 위협할 때 초대교회 성도들은 언제나 하나님께로 향했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 권세 안에 두신 전능하신 하나님께로 향했습니다. 그 어떤 핍박도, 그 어떤 방해도 감히 우리를 하나님의 손밖으로 끌어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오늘도 우리를 강력하게 보호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서 보았듯이 무엇보다도 성령 충만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증거 할 수 있는 패기와 담력이 형성되지 않습니다. 성령은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할 수 있는 권세와 담대함을 공급하십니다. 그렇게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의 권능은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정치와 사회의 가장 완강한 요새마저도 진동시키고, 무력화시킬 것입니다. 이처럼 말씀의 능력이 세상에 진정한 변화, 진정한 치유, 진정한 새 생명을 가져온다면 그 일을 위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은, 그 어느 곳에서나 설령이 그 자리가 우리를 핍박하는 자리라고 할지라도, 사람들이 불편하게 느끼거나 거절하는 자리라고 할지라도 점잖게 물러나기 보다는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그 대가는 크겠지만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하기를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요청하십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이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경륜을 펼쳐보여 주셨습니다. 그 생명의 빛으로 오늘도 우리를 이끌어 가시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 가운데 저희들의 삶을 새롭게 구축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신 감동과 보여주신 많은 것들을 우리 안에 온전히 품게 하시고, 그 감동과 메시지를 주변의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따뜻함을 잃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주일예배설교원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공동체 : 행5장33-42절 (0) | 2013.06.23 |
---|---|
위선적인 헌신의 유혹 : 행5장1-11절 (0) | 2013.06.16 |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의 권세 (0) | 2013.06.02 |
건강한 교회입니까? : 행2장42-47절 (0) | 2013.05.26 |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 행2장1-13절 (0) | 2013.05.1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