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6월16일 주일설교문
[ 위선적인 헌신의 유혹 : 행5장1-11절 ]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소유욕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 서너 살배기 아이들도 자기 소유에 대한 집착이 대단합니다. 자기가 가지고 놀고 있던 장난감을 다른 아이에게 주어 놀게 하려고 할 때 보면 순순히 건네주는 경우들이 없습니다. 완강하게 저항합니다. 내거라는 소유욕은 순수한 아이들도 깨뜨리기 어려운 일 같습니다.
그러니 머리가 큰 어른들은 어떻겠습니까? 자기 것을 내려놓기란 정말 쉽지 않습니다. 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인간의 속성 때문인지 칼 막스는 인간의 거의 모든 태도와 행동은 경제적인 데에 그 근원이 있음을 추적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논쟁이 되는 일들을 보면 재정에 관련된 것들이지 신령한 문제로 논쟁이 일어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생활 속에는 일종의 경제적 결정론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문화인류 학자인 어네스트 베커는 “죽음의 부정”이라는 책에서 “우리는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객관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이 엄청난 진실을 회피하기 위해 온갖 획책을 다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죽음을 부정하기 위해 만든 “불멸 시스템” 중 가장 고상한 것이 종교라고 했고, 좀 덜 고상한 것으로 치면 “부(富)”를 통한 불멸 시스템으로,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인생의 멋진 목표를 만들어줌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인생의 마지막을 생각할 필요가 없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 세상을 보아도 돈은 불멸의 관념이고, 현대의 보증수단입니다. 내가 죽는다 할지라도 내 이름, 내 가족, 내 성공, 내 능력이 내가 간 이후에도 보증되는 수단입니다. 그 점에서 돈은 세상으로 하여금 정신 못 차리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을 지배해오는 돈의 힘을 정면으로 거부한 공동체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 성령강림을 통해 세워졌습니다.
소유권 이전
초대교회 교인들은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소유권 이전을 의미합니다. 이런 삶은 성령 충만 안에서 자기 소유권을 그리스도에게 양도할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자기 소유권을 그리스도에게 양도하지 않은 사람은 남에게 베푸는 일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날의 그리스도인들이 성공과 명예에 목숨을 걸고, 교회가 성장이나 소유에 온 힘을 쏟는 한 이런 삶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종종 초대교회 공동생활을 사람들은 오해합니다. 초대교회의 이와 같은 모습을 진정한 공산주의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유재산의 공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공평하게 나누는 방법이 아니라, 가진 자들이 없는 자들의 필요를 대신 채워준 삶의 나눔의 방법이었습니다. 누군가가 억지로 공평하게 나눈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눔의 생활은 그들이 은혜를 받으면서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 더욱 활발해졌습니다.
공동체 안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을 때, 도와주어야 할 필요를 느꼈을 때, 자기 소유를 팔아 누군가가 사도들에게 가져오면 사도들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었습니다.
순교자 저스틴 마터는 그와 같은 교회를 향하여 경탄을 했습니다. “한 때 다른 사람의 부와 재물을 게걸스럽게 탐내던 우리가, 지금은 우리가 가진 물건들을 통용하고 궁핍한 모든 이들에게 그것들을 나누어 주고 있구나!” 이것은 성령의 오심을 통해 성령 충만을 입은 초대교회 교인들이 꽉 움켜진 사유 재산을 내려놓을 수 있었기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삶을 살도록 만드셨습니다.
바나바의 헌신: 성령충만의 열매
사도행전 4장36절에선 성령 충만하여 자신의 소유를 내어놓은 대표적인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레위지파 출신으로 바나바라고 불리어지는 요셉이라는 자였습니다. 바나바라는 별명은 “위로의 아들” “격려의 아들”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가지고 있던 땅을 예루살렘 교회에 필요가 생겼을 때 팔아 그 돈을 사도들에게 주었습니다.
이처럼 바나바는 재산과 관해서도 그랬지만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위험을 무릅쓰고 돕는 면에서도 자신의 별명에 걸맞게 살았습니다. 사도행전11장24절에서 하나님은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처음부터 그의 헌신에는 그 어떤 사심도 없었습니다. 성령 충만해서, 말씀에 은혜를 받아서 이루어진 거듭난 성도로서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고 새로운 존재로서 살아가는 성도이기에 가능했던 삶이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헌신: 위선적인 헌신
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초대교회의 모습에서 급격하게 전환되어 사도행전5장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죽음이야기를 전개합니다.
이 부부는 바나바가 헌금하는 것을 보고 자극을 받아 땅을 팔아 하나님께 드리기로 작정하고, 그 일을 서로 의논하고 실행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을 보면 은혜를 받고 다른 것이 개입될 틈 없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진 바나바의 경우와 달리 뭔가 어두운 그늘이 덮여 있는 느낌을 줍니다.
두 사람이 어떤 일을 의논했겠습니까? 2절 말씀을 보면 아나니아가 사도들의 발 앞에 그 돈 전체를 가져가지 않고 그 중 얼마를 감추고 가져갔다고 했고, 그 일을 아내도 안다고 했습니다. 그 점에서 두 사람은 서로 입을 맞추어, 일부를 감추어 놓고, 나머지를 사도들 앞에 놓으면서 전부를 가져왔다고 했습니다. 두 사람은 일부를 내놓고 전부를 바친 것처럼 인정받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은 위선입니다,
그들은 위선을 통하여 자기들의 믿음을 인정받고 바나바와 동일한 칭찬을 받으려고 시도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소유를 내려놓지 않음으로 자신들의 안전을 확보하려고 했습니다. 아나니아는 다른 사람 뒤에 가려져 있는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자기가 신앙과 사랑에서 부족하고 발판을 버릴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이 부부는 희생 없는 갈채와 헌신 없는 안락을 원했습니다. 이와 같은 상반되는 욕망이 서로 동요하면서 그는 분명한 결의로 그 일을 단행할 수 없었고, 곧지 못하고 정직하지 못한 어정쩡한 길을 걸었습니다.
이런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거짓된 행동은 우리들이 종종 받게 되는 유혹입니다. 온전한 헌신이 아니면서도 그런 것처럼 과대 포장하는, 그로 인해 자기를 들어내고 싶은, 하지만 절대로 자신의 생활과 안전은 놓지 않겠다는 유혹입니다. 다분히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생각에서 나오는 행동입니다.
이것은 소유의 영역뿐만 아니라 우리의 시간, 우리의 재능, 우리의 건강, 우리의 열정, 우리의 수면, 우리의 휴식을 주님께 드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만 주님께 나의 것을 아낌없이, 기쁨으로 드리지 못합니다. 좀 더 자신을 위한 시간을 확보하고 싶고, 좀 더 자고 쉬고 싶고, 무리하기보다는 자신의 건강을 지키고 싶고, 자신의 생활이 믿음으로 인해 침해당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우리들은 이 정도면 최선을 다해 드린 거라는 생각을 갖고 그 또한 최고로 인정받으려고 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자신의 헌신이 인정되지 않으면 상처까지 받습니다. 심하면 교회를 떠나기까지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믿음 보다는 우리의 기지로 살아가면서 적절하지 않은 방법으로 자신의 안전을 먼저 구하고 생활을 안정시키려고 하는 나약한 존재들입니다. 이와 같은 자기 안전 정신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 실패한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런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가증스러운 위선은 하나님 앞에서 결코 숨길 수 없었습니다. 그 즉시 들통이 나고 말았습니다.
위선적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사도 베드로는 그와 같은 아나니아를 심하게 꾸짖었습니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여기에서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점은 그들이 얼마를 내었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땅 값 얼마를 감추었다는 데 있습니다. 아니면서 그런 것처럼 인정을 받으려는 마음은 성령을 속이고, 교회공동체를 속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에게 이와 같은 일이 왜 벌어졌습니까? 그들은 성령으로 충만하기 보다는 사탄이 그들 속에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두 사람은 자기중심의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바나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결코 두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그들의 모든 소유권을 이전할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의 말을 듣고 아나니아가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었습니다. 그에겐 어떤 뉘우칠 기회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 시간이 지나 그의 아내가 남편이 죽은 것도 모르고 사도들에게 나왔을 땐 그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베드로는 삽비라에게 물었습니다. “그대들이 판 땅 값이 이것뿐이오?”베드로의 물음은 삽비라로 하여금 내적 결단에 서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거짓을 깨뜨리려는 의지가 없었습니다. 삽비라는 주저함 없이 이것뿐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결국 그녀도 남편의 시체를 장사하고 오는 이들이 도착하자마자 베드로 앞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 그녀를 사람들이 메어다가 남편 곁에 장사하였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은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다 크게 두려워하게 하였습니다. 순수한 믿음의 공동체에 위선적 믿음을 심게 될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단호한 처벌이라고 그들이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언약공동체를 세워 가시면서 그들에게서 거룩과 순결, 그리고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하지만 사탄은 일선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왜곡시키어 그와 같은 하나님의 기대에 반대편에 서도록 만들고, 그로 인해 거룩한 공동체를 훼손시키려고 합니다. 마음도 별로 없으면서 그런 척 하는 위선은 교회 안에서 모든 성도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죄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워하면서 얼마 되지 않는 돈, 두 렙돈을 드리는 과부의 헌신을 기뻐하셨지, 온갖 위선을 떨며 모든 것 다 드리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서 있던 바리새인들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기에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달라야 하는 것은 외적인 데 있지 않습니다. 내적인 진심에 있습니다. 정직하고 순결한 그리스도인과 교회 공동체로 세상에 투영되어야 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거짓말과 속임수, 탐욕과 이기적인 행위에 대응하지 않으면 교회는 죽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오늘 날 초기 예루살렘 교회에서 하신 것처럼 역사하신다면 장의사들이 할 일이 보다 많아질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씁쓸한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깨닫습니다. 이 일이 두 사람의 영적인 타락 때문에 벌 받았다 혹은 하나님께 드릴 것을 안 드리면 죽는다는 교훈을 보여줌으로 겁을 주려는 것은 아닙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은 교회가 새롭게 시작하는 과정 속에서 반드시 척결되어야 하는 교회 내의 영적 불순물이 제거됨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교회가 사탄으로부터 시작된 하나의 위기를 넘어서고, 자기가 아닌 하나님께로 집중한 결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아졌습니다. 정화된 교회 안에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복음의 능력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내 것에 집착하는 교회공동체라면 그 공동체는 결코 건강한 교회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도태됩니다. 성령이 도래했어도 그리스도인들은 사단의 유혹으로부터 면제되지 않았습니다. 비록 사탄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패했지만, 오늘도 여전히 그리스도인들을 넘어뜨리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위선과 탐욕, 자기 안위, 자기 인정 등의 문제로 사람들의 마음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충만한 교회마저도 사탄의 도전과 도발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깨어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더 근본적으로 인간의 마음이 사탄의 처소가 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더욱 두려운 일입니다. 이렇게 사탄에게 마음을 빼앗기자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신의 실제 모습보다 더 의롭고 희생적이고 착한 사람처럼, 실제 모습보다 더 믿음이 좋은 사람처럼 가장한 죄를 범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결코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은혜의 하나님이시만 우리의 위선과 기만을 눈감아주시지 않습니다. 분명하게 우리에게서 그 죄를 물으십니다. 하나님은 복음전파와 교회의 확장을 방해하는 것은 어떤 것도 허락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헌신은 정직과 진실 됨이 그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크기가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들 마음의 크기를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하나님! 우리를 구별된 자리로 부르시고,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의 몸 된 교회에 한 지체로 자리매김하게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한 섬김의 삶이 우선되게 하시고, 자신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으로 살고자 하는 마음을 주옵소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희생 없는 갈채와 헌신 없는 안락의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정직함으로 주님께 나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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