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6월23일 주일설교문
[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공동체 : 행5장33-42절 ]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교회가 이 땅 위에 세워진 이래로 교회는 어느 때는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기도 했지만, 교회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던 때도 상당부분 있었습니다. 그런 역사를 볼 때 진정한 교회는 무엇인지, 과연 이 땅에 그런 나약하고 변질된 모습으로라도 존재해야 하는 것인지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교회는 무엇입니까? 사도행전에 나타나고 있는 초대교회의 모습을 볼 때 참 교회의 모형을 봅니다. 날마다 모여 말씀을 배우고, 서로 교제하고, 필요를 따라 나누고, 떡을 떼며, 기도에 힘썼습니다. 성령 충만하였습니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여러 지역에서 선교의 결과 교회들이 생기면서 인간의 죄악 된 모습들이 교회 안에서 드러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시대가 흐르면서 부패하는 교회들, 세상권력과 결탁하여 자신의 부만을 챙기던 교회들, 그러나 교회는 소멸되지 않고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르렀습니다. 물론 오늘날에도 교회는 여전히 세상으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아닌 개혁의 대상처럼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지난 2000년이 넘는 시간을 교회로 하여금, 여러 부정적인 요소들이 분명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불길이 꺼지지 않고 끊임없이 이어져 전 세계의 수많은 교회들로 확산된 것은 교회의 근원이 타락한 사람에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근본이 어디인지, 어디로부터 나왔는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새로운 라이프스타일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위기를 넘긴 예루살렘 교회는 더욱 부흥을 하였습니다.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났고,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병든 사람들, 귀신 들린 자들을 데리고 와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임재를 통해 하나님 치유의 능력이 흘러가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사도들과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하는 일은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함께 가족으로 살았습니다. 재산에 대해 새로운 태도를 가졌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재산권을 이양하고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시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모일 때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기억하며 성찬의 떡을 떼고, 잔을 나누며, 기도에 전념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능력이 저들의 삶을 새롭게 하였습니다. 생명의 힘이 절대적인 죽음의 장벽을 뚫고 부패하고 타락한 현 세계 안으로 들어와 새로운 원칙, 새로운 가능성, 새로운 힘이 되었습니다. 마치 강한 바람이 돛단배를 거친 바다로 내모는 것처럼 바로 이 생명이 사도들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사도들로 하여금 담대하게 장벽을 뚫고 어디라도 갈 수 있도록 하는 이 생명의 힘이 오늘도 여러분을 붙잡아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이것은 하늘로부터 임한 힘입니다.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은 소멸되는 힘이지만 하늘로부터 오는 성령의 힘은 영원무궁한 힘입니다. 에너지 공급처를 분명하게 확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생명의 말씀을 말하라!
이미 베드로와 요한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경고했던 대제사장과 사두개파 사람들은 초대교회가 조금씩 세를 불려가는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그들은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습니다. 사도들은 생명의 말씀을 사람들이 물리적으로 막아서도 아랑곳 하지 않고 가르쳤고,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유대교의 구조를 침해하는 것이 걱정되어 일을 더 벌이지 못하게 막느라 필사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열정은 왜곡되었고, 자신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지만 하나님께 맞서 싸우는 셈이 될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세상은 교회가 부흥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새로운 힘을 결코 반가워하지 않습니다. 그로 인해 자기들 영역이 침범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힘은 교회의 뻗어나가는 힘을 결코 막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생명은 사도들과 초대교회 교인들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말해야 했고,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갇혀 있던 사도들을 옥에서 나오도록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감옥으로 보내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사도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자 다시 성전에 들어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백성들에게 가르쳤습니다. 다시 잡히면 또 감옥을 가게 됩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불이익 앞에서 결코 작아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사도들의 담대함을 보면서 왜 우리는 이 담대함으로 무장하고 나아가지 못하는 걸까 생각을 해봅니다, 혹시나 우리는 어떤 사회적인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직장에서, 모임에서 소극적인 신앙생활을 하곤 합니다. 그러다보니 우리에게서 어떤 생명의 힘도 들어나지 않고, 오히려 세상 공동체의 세속적인 영향에 침해를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이 생명의 힘을 소유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거룩한 영향력이 흘러가는 통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거침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을 때, 대제사장과 그 추종세력들은 사도들이 여전히 감옥에 있는 줄 알고, 부하들로 하여금 감옥에서 사도들을 데려오라고 하였습니다. 옥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사도들은 온데간데없고, 놀란 부하들이 대제사장에게로 가서 이 사실을 보고하였습니다.
산헤드린의 재판
이 일이 어떻게 될까 걱정하고 있던 차에 사도들이 도망가지 않고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소식을 들려왔습니다. 즉시 사람을 보내 사도들을 다시 불러들여 대제사장이 심문을 하였습니다. “너희는 여러 차례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했건만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는구나!”
우리는 대제사장의 질문에서 지금 오순절 성령강림이후 예루살렘에 어느 정도의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는구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예루살렘을 사도들이 온통 도배질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을 불과 얼마 전까지 어떻게 상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을 입 밖에 내놓을 수 없었는데, 예루살렘에 가득했다니?
대제사장의 질문에 맞서는 베드로의 대답은 대제사장과 공회의 지도자들을 화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베드로는 4장19절에서처럼 자신들은 하나님께 복종할 것인가 아니면 당국에 복종할 것인가 하는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복종해야 하는가 아니면 사람의 권위에 복종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오늘 예수님께서 믿음 안에 있는 사람과 믿음 안에 있지 않은 사람 모두에게 던지시는 질문입니다.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은 “복음을 거스르는 인간의 지시를 따름으로써 그 분에 대한 충성을 타협할 것인가, 아니면 시민의 불복종에 따르는 여러 가지 위험을 무릅쓰고도 그 분께 충성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믿음 안에 있지 않은 사람은 “예수는 하나님에게서 온 사람인가 아니면 정신 나간 광신자였는가?: 라는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이 질문이 사도들이 잡혀 온 산헤드린 공회의 소위원회 자리에서 다시 한 번 던져졌습니다.
베드로는 재판정 앞에서 자신이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임을 분명히 하면서 주제넘게도 성전의 집권층을 향하여 그들에게 회개와 용서가 필요하고, 예수님이 그것을 주실 거라고 전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이 말은 할 수만 있다면 그 자리에서 죽이고 싶을 만큼 집권층을 자극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들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악한 모습입니다. 자신의 죄가 들어나면 그것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면 되는 데 오히려 자신의 허물을 들쳐 낸 사람을 미워하고 결국 해까지 입히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자신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 살인까지 저지르는 일이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 붙잡힌바 된 사람은 그 즉시 하나님 앞에 회개의 무릎을 꿇습니다.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얻기 위해 강직한 신하 우리야를 죽였던 다윗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의 집권층과 부딪친 이래로 저들은 자신들의 기득권과 자신들만의 종교를 지키기 위해 무력으로 대처했지만 새로운 생명의 물꼬를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어도, 죽음으로부터 살아나셨고, 제자들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지우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 이름은 더욱 번져갔습니다.
제자들을 협박하고 감옥에 가두어도 하나님은 굳게 닫힌 감옥문을 열어주셨고, 사도들은 또 성전으로 가 백성들에게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 땅의 문으로 잠글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면
베드로의 말을 듣고 여러 사람들이 분기탱천해서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 때 그 당시 위대한 랍비 중 한 사람이었던 가말리엘이 조용히 일어섰습니다. 그는 소란스러움을 정리하고자 사도들을 잠시 밖에 내보내고 산헤드린공회 소위원회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그는 무엇을 조심하라고 말하고 있는 걸까요? 이 일이 어디에서 왔느냐 분명 확인할 수 있어야지, 그렇지 않고 감정적으로 대한다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임을 경고한 것입니다.
그는 그 당시에 일어났었던 여러 가지 다른 종교적인 운동, 반란, 폭동을 지적하였습니다. 그것들은 하나 같이 앞장섰던 이가 죽임을 당하자 따르던 추종자들이 자연스럽게 흩어지면서 소멸되었습니다. 다 사람으로부터 났기 때문입니다.
가말리엘은 중재안을 내놓습니다.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가말리엘은 어차피 나사렛 예수의 운동이 인간에게서 유래한 운동이라면 금방 소멸될 것이라고 믿었던 겁니다. 결국 그 중재안이 채택되어 사도들을 채찍질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 하지 못하도록 하여 풀어주었습니다.
교회의 승리
하나님은 이처럼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을 통해서 교회를 지켜주셨습니다. 단단하게 닫힌 감옥 문으로부터 구해주셨고, 사람들의 편견과 오해, 그리고 공격으로부터 지켜주셨습니다. 뜻밖의 사람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교회가 존재할 권리와 예수님에 대해 가르치고 설교할 권리를 변호해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공동체, 바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5장4절에서 하나님은 사도요한을 통해 분명하게 선포하셨습니다.“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바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입니다(요일5장1절). 그러니 세상은 어떤 방법, 수단을 간구하더라도 교회를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이신,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할 일은 단순해집니다.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하게 사는 일입니다. 세속의 힘과 충돌할 때 인간의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는 일입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불편함을 겪을 수도 있고, 손해도 볼 수 있습니다. 조롱과 비웃음을 당할 수도 있고 심지어 큰 고통도 겪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우리는 즐겁게 우리의 갈 길을 가면 됩니다. 41절에서 하나님은 누가를 통해 사도들의 상황을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라는 가말리엘의 말처럼 교회는 하나님께로부터 났기에 저들이 작은 해코지는 할 수 있어도 교회를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누가는 하나님이 보증해주신 사도들의 승리를 선언합니다. 42절“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리라.”사도들은 산헤드린 재판 사건으로 더욱 대담한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채찍에 맞으면서도 자신들이 하나님께 쓰임 받고 있다는 믿음 안에서 크게 기뻐하며 공의회를 떠났습니다.
다시금 그들의 발걸음은 성전을 향하였고 그곳에서 금지당한 이름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가르치며 전도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형벌이나 재판도 복음을 전하려는 사도들의 거침없는 전진과 공세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 어떤 환경 앞에서도 오히려 그것들을 기쁘게 받아들이면서 참된 제자의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성령 충만한 공동체는 세상의 힘과 부딪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 복음을 전할 때 마다 그들의 영역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유대교와 유대 정치의 중심이었던 성전 체제도 사도들의 공세 앞에 위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도들은 그 어떤 위협과 능욕 앞에서도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한 것을 끝까지 지킴으로써 이들에게서 케이오 승을 거두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쟁취해 놓으신 승리를 확증하는 싸움에 참여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아무리 감옥에 가두어도 감옥문을 열어주는 천사가 있다면 이 세상의 부당한 공권력은 아무 소용이 없는 셈입니다.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을 품고 우리는 이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이 땅에 가득 채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이름의 능력이 사람들의 굳은 마음을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꾸시고, 그 마음속에 생명을 심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생명을 증거하는 증인들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를 우리들의 삶의 자리로 파송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나님! 사도들이 그 어떤 억압과 위협 앞에서도, 심지어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능욕을 당해도 하나님께서 명하신 증인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부활의 능력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새로운 삶을 살아감으로써 세상의 상식을 깨뜨렸던 생활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의 구별됨을 보여주는데 그치지 않고, 사도들은 입을 열어 그와 같은 삶을 살도록 하는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나님! 저희들에게도 삶과 믿음이 어긋나지 않게 하시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이 땅에 가득하게 채우기 위해 세상으로 나아가는 증인이 되게 하옵소서. 세상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외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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