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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한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 : 히11장8-16절

by 최수근 2013. 8. 18.

2013년8월18일 주일설교문

[ 불확실한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히11장8-16절 ]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최근 5년간 연령대별 우울증 증가율을 보면 20대 남성의 증가율이 두드러집니다. 한창 미래를 꿈꾸며 준비하고 달려가야 할 연령대가 건강함을 잃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로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인해 증가세가 가파르게 상승했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어느 순간 엄습해 오곤 합니다.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잘 가고 있는 건지? 도달하게 될 곳은 어딘지? 생각이 깊어지다 보면 머리만 더 혼란스러워집니다.

특히 21세기 세상은 우리 젊은이들에게 더욱 더 불확실해지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은 뭘 어떻게 대처해 가야할지 막연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불투명한 미래를 어떻게 하나하나 헤쳐 나가고, 그 미래에 펼쳐질 것들에 대한 기대를 어떻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성취해 갈 수 있겠습니까?

믿음의 삶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시는 때로부터 시작됩니다. 언제 자신을 드러내시는가 하면, 우리가 죄에 빠져있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그곳, 오랜 동안 익숙해 있던 삶의 자리를 떠나도록 요청하십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믿음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는 구약의 긴 기사 가운데 하나로 창세기 12장에서 25장까지 이어집니다. 구약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특별한 칭찬을 받은 첫 번째 인물입니다. 창세기 156절은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에게 로마서 411절에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라는 중요한 호칭을 부여했습니다.

그러나 처음 출발부터 그가 대단한 믿음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세속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남들처럼 우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의 믿음의 여정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에순종하여....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간데서 시작합니다. 8절에서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아브라함은 그가 가고 있는 곳이 어딘지 몰랐습니다. 창세기121-3절을 잘 살펴보면, 척 듣기에는 놀라운 약속이긴 하지만, 그는 아주 명료한 계획, 5년이나 10년 혹은 50년 후에 그가 어디에 있을 것인가를 상세히 보여주는 비전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무척 당혹스러웠을 텐데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나아갔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행동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이와 같은 부르심은 아브라함의 구원의 시작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구속사에 있어 중요한 시작이었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하여 자신의 고향을 떠났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믿음이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곳에 가기 위해 아브라함은 자기 본토와 가족과 삶에 대한 기대를 버려야 했습니다. 그 대신에 미래에 더 큰 축복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고향에 있는 것이 아브라함에게는 확실한 미래가 보장됩니다. 오히려 자신의 기반을 떠나는 것이 그의 미래를 더 불확실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상식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이것은 구원받는 사람 모두에게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단지 어떤 추상적인 것을 믿으라고 우리를 부르시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따르라고 부르십니다. 설령 나아가야 할 길이 분명하게 보이지 않아도 말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 안전하고 익숙한 환경을 기꺼이 포기하라고 요청하실 수도 있습니다. 또한 어려운 과제를 행하도록 요구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지금에 대한 아쉬움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 전체를 약속으로 받고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렇지만 거기 도착했을 때 그에겐 거주할 수 있는 집조차 없었습니다. 그가 훗날 소유한 유일한 땅은 자기 아내 사라를 장사 지낸 곳뿐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믿음의 삶이 지닌 이미 그러나 아직의 특성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이미 약속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약속은 우리의 생애 가운데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히브리서 11장이 처음부터 강조하는 겁니다. 믿음은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이며, 그것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현실과 약속 사이에 갭을 우리가 어떻게 좁혀 가느냐가 관건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보이는 것을 따라 가는 삶이어서는 결코 그 갭을 좁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과 함께 자녀에 대한 약속도 주셨습니다. 창세기12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하지만 아브라함은 99, 사라는 89세 되던 해까지 자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자녀를 주신다고 하셨지만 두 사람의 신체조건은 그것을 이룰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과 사라는 여러 우여곡절 끝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하실 수 있고 또한 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두 사람 실패도 합니다. 약속의 아들이 아닌 아들 이스마엘을 여종 하갈을 통해 얻었지만 하나님은 분명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실패 끝에 믿음으로 자식을 얻습니다. 11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우리의 환경을 둘러보면 가능성이 없고 심지어 불가능해 보인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하신 약속은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지킬 의사가 없는 약속을 하시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과 사라가 너무 노령이어서 아기를 가질 수 없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하였기에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아브라함은 그 약속에 대한 신뢰를 자신뿐만 아니라 아들과 이삭, 손자 야곱에게까지 이어지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갔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였습니다. 그렇게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도대체 이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종말론적인 신앙

10절 말씀에서 우리는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아브라함은 그 당시 갈대아 제국의 견고하고 웅장한 성들을 보았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조카 롯은 세상의 웅장함, 세상의 부요함을 쫓아갔지만 아브라함은 그보다 더 나은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세상이 주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장차 올 것을 고대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자기 소유가 아닌 땅에서 오랜 세월 동안 믿음으로 살았던 방법입니다. 이처럼 영원을 바라보는 시각이 결여되었다면 아브라함은 주저앉고 말았을 겁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믿음의 여정 가운데 있는 우리를 향해 하나님은 요청하십니다. 이 땅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에 우리의 시선이 고정되기를 요청하십니다. 이 땅의 것에 목숨 걸지 말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 등 모든 순례자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들에 대한 완전한 성취를 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목적지를 멀리서 바라볼 수 있었고, 거의 맛보기 직전까지 갔을 뿐, 도중에 모두 죽었습니다. 그러나 허무한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믿음을 따라 죽었다고 하셨습니다. 13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며라고 하였습니다.

구약에서 신앙으로 산 사람들의 신앙의 통로를 보면 이미 이 땅에서 누리게 될 넓고 쉬운 완전한 성취의 길을 이루어가도록 넓게 트이지는 않았습니다. 좁고 험난했습니다. 결국 이들은 지금 이곳이 아닌 무덤 건너편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물려받을 것을 알고서 끝까지 소망가운데서 인내해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선조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것들을 다 받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들은 하늘에 대한 비전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참되고 영원한 본향으로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신분으로서 하나님을 계속해서 신뢰하였습니다. 이렇게 믿음은 환경에 얽매임 없이 언제나 결단성 있는 행동을 요구하고, 언제나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과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그리스도를 믿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필요와 욕구와 기대가 즉각적으로 충족되지 않기 때문에 좌절감과 패배감을 갖게 됩니다. 그들은 조바심이 나서 결국 포기하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은 멀리 있는 응답이 아니라 즉각적인 응답을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눈길이 이 땅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종말론적인 신앙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지금이 아닌 하나님의 언약의 궁극적인 성취가 이루어질 그날을 보았기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습니다. 그들은 이 땅의 순례자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이 아니라 다른 세상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사도바울의 입을 통해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음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320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세상에서 나그네가 된다는 것은 이 세상의 것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선은 늘 이 땅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위를 바라봅니다. 그러기에 내 마음이 세상의 것을 얼마나 단단히 움켜쥐고 있는지 매 순간 점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갈수록 더 많은 소유를 갖고 싶어 하고, 이 세상에 진짜로 뿌리내리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믿음의 여정의 피곤함은 많은 사람들을 영적인 어려움에 처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도 약속을 따라 살며 그 약속으로 우리의 믿음을 북돋아주어야 합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기뻐하고, 이 세상의 종말과는 전혀 다른 우리의 종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후회함 없는 믿음의 사람들

이와 같은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신 이후 다시금 옛 보금자리로 돌아갈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돌아가지 않았다는데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15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유혹 앞에서 당당히 넘어설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엉겁결에 따라왔든 어떤 결단에 의해 따라왔든 믿음의 경주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이 길에 들어선 것을 후회하십니까? 끊임없이 그 후회함이 여러분의 목덜미를 붙잡고 있진 않습니까? 후회함 없이, 가는 길을 지속적으로 달려갈 수 있겠습니까?

후회함 없이 불확실한 미래를 뚫고 달려가는 여러분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선물도 주실 것입니다.

 믿음을 보상하시는 하나님

16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이 사람들이 자신들의 새로운 고향을 고대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음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찮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게 하시려고, 우리를 결핍의 상황에 내버려 두시며 또한 우리가 상상할 수조차 없이 큰 복을 우리에게 약속하십니다. 이와 함께 약속을 바라보면서 계속해서 믿음의 여정을 위해 걸음을 떼게 하십니다. 그렇지만 그 길은 그렇게 쉬운 길만은 아닙니다. 만일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 길의 불투명함으로 인해 우리는 이생에, 이 세상에, 육신의 생활에 안주하려 하는 고민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불가능 해 보이는 일에 대해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방법과 책략으로 뭔가를 해보려는 꼼수를 부리게 될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아브라함과 사라, 두 사람 사이에 그런 꼼수가 길목마다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일을 행하려는 열심은 있지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려 하지 않기에 인간의 방법으로 열심히 일을 합니다. 결국 그 끝은 실패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결핍과 약속의 적절한 배합을 통하여 우리가 일어나서 길을 따라 뒤돌아보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움직이도록 하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 즉 이전에 충성하던 장소를 실제로 떠났는가 여부는 우리의 말이 아니라 생활방식이 결정합니다. 아브라함은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언제 해야 하는지 모를 때에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로 하여금 고향을 떠나게 했던 것, 순례자로 살게 했던 것, 하나님이 명하신 곳이면 어디든지 가게 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지성을 갖춘 한 인간이 그런 불확실한 환경 속에서 살 수 있었던 것은 믿음으로 그렇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여러분의 삶을 지배하고, 그래서 미래의 불확실함 속에서도 여러분이 길을 잃지 않고 나아가는 등불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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