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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동영상

예수님, 당신은 누구이십니까? 마 16장 13-20절

by 최수근 2023. 7. 23.

2023년 7월 23일 주일예배

[예수님, 당신은 누구이십니까? 마 16장 13-20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안면 실인증, 안면인식장애라고 합니다. 눈이나 코 등 얼굴 부위는 인식할 수 있지만, 뇌 장애 등으로 얼굴 전체를 보고 개인을 구분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보통 그런 경험이 있을 겁니다. 처음 본 사람의 얼굴을 나중에 기억하지 못하거나, 2번째 봤을 때 누군지 헷갈렸던 그런 경험 말입니다. 이건 기억력의 문제이죠. 반면에 안면인식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매일 보는 친숙한 사람들의 얼굴도 잊어버립니다. 특히 매일 보는 배우자나 자녀들의 얼굴을 못 알아보거나, 심지어 거울 속 자기 얼굴을 보고 놀란다고 해요. 이 장애의 원인은 사물 인식을 담당하는 뇌 부분이 손상돼 발생하는 게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그로 인해 인식의 장애가 생겨 부분적으로 눈, , 입 등은 볼 수 있는데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전인적으로 알아볼 수 없는 겁니다.

긴 시간 함께 하였음에도 상대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힘들고 불행한 일입니다. 미국의 배우 브래드 피트는 그런 심적 부담을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관계가 평탄할 수 없어서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시간이 지났음에도 신앙의 대상이 분명하지 않은 경우입니다. 뭔가 보이기는 하는데,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겁니다.

이런 안면인식장애와 같은 영적 장애를 이스라엘 백성들, 그중에서도 종교 지도자들에게서 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인식의 과정에서 심각한 오류가 발생한 겁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드러내고자 하시는 참모습을 그들이 수용할 수 없도록 만드는 다른 전제들이 그들의 사고를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색안경을 끼고 있으니 올바르게 인식할 수 없었던 겁니다.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주변 열강의 식민 지배하에 신음하고 있을 때, 매우 비범하고 탁월한 인물, 그들을 구원해 줄 메시아가 올 것이라는 약속을 여러 예언자를 통해 받았습니다. 그런데 약속된 메시아의 모습은 하나가 아니었어요. 강함과 온유함, 희생양의 모습 등으로 예언되었습니다. 하지만 긴 고통의 시간이 이어져 오면서 백성들이 고대하던 메시아는 오직 강력한 해방자의 모습으로만 인식되었습니다. 그들이 희망하는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그 긴 기다림에 지쳐가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때 가장 먼저 예수님을 보고 알아본 자는 세례 요한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세례 요한이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보면서 이야기합니다. 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그와 함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옥에 갇히게 되죠. 그렇게 한동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어느 날 그는 예수님에게 두 제자를 보내어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이 우리가 그렇게 오랫동안 고대해왔던 그 메시아이십니까? 아니면 그렇게 생각하는 우리가 틀린 것입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다른 메시아를 찾아보아야 하는 것인지요? 혹은 아직 오지 않았다면 앞으로 오실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분명하게 예수님을 인지했던 세례 요한이었지만 억압된 환경이 그의 시선을 다시 흐리게 만들었습니다. 연약한 우리가 반복적으로 겪는 심각한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마 11:4-5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메시아 예언에서 메시아가 와서 행할 일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본대로 나는 바로 그 메시아라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서 하시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11:6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그때도 마찬가지이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인식하고 그분께로 나아가는 자도 있지만, 여러 장애로 인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여 그분께로 나아가지 못하는 자가 더 많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의심하거나 다른 여러 이유로 인해 넘어지지 않고 마침내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이 사실이라면 그분을 믿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긴급한 문제이고, 그로 인해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결정하는 중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 16:17에서도 시몬아 내가 복이 있도다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직접 주목하기보다는 자기의 생각, 자기의 분석을 우선시하고, 자기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때 걸려 넘어져 실족하곤 합니다. 이스라엘은 결국 그렇게 실족하여 예수님을 끝내 믿지 않았습니다. 메시아이시라고 분명하게 선포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생각했던 메시아의 틀에 맞지 않는다는 판단의 결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제자들의 대답을 통해 사람들이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 않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선지자 중의 하나일 거라고 본 겁니다. 소위 안면인식장애인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메시아로 볼 수 없었던 거죠. 이건 이들이 하나님과 단절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오늘도 교회에 오가지만 여전히 예수님을 영적으로 온전히 인식하지 못하면, 구원자로 볼 수 없고, 그분에 대한 바른 신앙의 고백이 없다면 단지 좋은 영향과 교훈을 주시는 윤리 교사로 대하게 될 것입니다.

바리새인, 서기관 같은 이들은 그 시대에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인식, 영적인 인식은 지성의 인식과는 다른 것입니다. 지적으로 똑똑할 수는 있으나 영적인 인식, 영적인 수용성의 문제에서 심각한 장애 수준이라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영적인 수용성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영적인 신호에 열려 있는 마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만, 하나님에 대하여 굳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볼 수 없습니다. 마태는 계속해서 예수님에 대한 수용성의 문제를 바리새인으로 대변되는 종교 지도자 그룹과 제자 그룹을 통해 대조하고 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표적에 대한 요구로 영적인 무지를 가리려 하면서 예수님을 거부하고 있어요.

반면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열려 있어서 배우려 합니다. 그분을 제대로 보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다 가도 흠칫 뒤로 물러서기도 하지만, 그래도 복음서는 마냥 뒤로 물러서는 제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뜻을 따라 성장해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의 인식이 아닌 제자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알고 믿고 있는지 확인하고자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때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해서 속 시원하게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대답을 제자들에게서 기대하셨을 것입니다. 이 신앙고백으로부터 우리는 진정으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뭔가 행동할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만족할 만한 해답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결단하고 실행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특히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한 문제를 끝까지 붙잡고 우리 앞에 내세우며 도전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좌표를 찍도록 요청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기독교는 윤리적 교훈이 아닙니다. 철학도 아닙니다. 어떤 새로운 생활 방식을 선포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무엇보다도 한 인격체이시며 참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기독교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메시지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합니다. 그러니 그 예수님을 어떻게 인식하고 고백하는가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 고백이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그 정체성으로부터 삶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성경은 세 가지를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이 세상의 구주이시며 세상을 구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구원도, 천국도 없습니다.”

베드로가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수많은 대중 앞에서 분명하게 선포한 것이 이 내용입니다.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그러기에 나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나의 구원자이심을 믿습니다라는 고백 없이는 실은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물론 이 고백에 이르기까지 과정이 그렇게 쉬운 길은 아닙니다. 그래서 잘 안 보인다면 우리는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죄로 인해 작동 오류 중인 눈이 열려 예수님을 온전히 인식하고 그분에 대한 신앙고백을 할 수 있기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 것이죠. 이 진리는 우리의 이성으로 우리의 지식으로 깨달아지고 이해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보여지도록 도와주셔야 합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이것은 사람에게서 배워서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가 예수님을 보게 하고, 고백하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의 고백에 복이 있도다선포해주실 것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를 받아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교회가 다른 데와 구별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 위에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기초와 목적이 다릅니다. 그리고 이것이 복된 것입니다. 삶의 근본적인 문제, 죄와 사망의 문제가 해결되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음부의 권세, 즉 허무와 파괴의 세력이 우리를 틈타지 못할 것입니다. 다른 것이 다 해결되어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그것이 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들의 현재의 생활,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이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 고백에 달려 있습니다. 실족하여 넘어지는 자가 되겠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통해 복 있는 자가 되시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구원계획의 역사에서 의미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삶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일관되게 자신을 순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초대교회에서 베드로의 역할의 위대함은 그의 개인적인 능력이나 은사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역사에서 베드로가 훌륭한 역할을 하도록 이끈 것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님에게 헌신하는 일관성을 지켜간 데에 있습니다. 그는 환경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방식,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뜻에서 일관되게 자기 자신을 드렸습니다. 물론 실수도 있었지만, 다시 그 방향을 잡아가곤 했습니다. 베드로는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의 방식의 중요한 모범입니다. 우리도 삶의 주인이신 예수님에 대한 헌신을 일관성 있게 발전시켜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일, 가정, 이웃, 교회, 세상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을 실현해갈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예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에 여러분은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아마도 이 대답은 이곳에 나와 있는 각자의 목적에 따라 다를 수도 있습니다. 분명 모든 이들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예수님께로 나오는 목적이 예수님을 찾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분에게서 나오는 다른 것들에 대해 기대하고 나온다면, 이것들이 걸림돌이 되어 우리의 눈을 가리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도록 만들고, 그분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삼지 못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자신의 기대, 자신의 목적에 미치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쉽게 예수님을 밀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께 이를 수 있도록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오직 길이요 생명이십니다. 그분을 오늘도 제대로 보고 그분과 동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령님의 도움을 요청해야만 합니다. 고전 12:3b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수많은 이들이 여전히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주님을 볼 수 있었고, 마음을 열어 주님을 영접하여 구원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복 있는 자입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에 일원이 되었고, 세상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계시 된 예수님을 믿고 고백함으로 다른 이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할 수 있는 특권 또한 누리고 있습니다. 물론 특권이면서 책임이겠지요. 이 책임을 다하기를 소망하십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천국의 열쇠를 소유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 열쇠는 나만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다른 이들을 위해 아름답게 사용할 때 베드로를 통해 모든 믿는 성도들에게 부여해주신 권세는 더욱 빛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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