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우리 이웃과 함께!!!
주일예배설교원고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소서:엡1장15-23절

by 최수근 2013. 12. 8.

2013년12월8일 주일설교동영상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소서:엡1장15-23절]

최수근 목사(예수생명교회 담임목사)

에베소서의 수신자들의 상황

에베소서의 수신자인 에베소의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환경을 보면 그들은 그들의 신앙을 위협할 만한 여러 환경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종교 혼합주의와 우주적 신비들에 대한 지대한 관심사들이었습니다. 아직 복음의 신학적인 체계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것들은 매우 고차원적인 사상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거기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두 번째는 주변 세계의 도덕성의 타락입니다. 지금도 물론 도덕적으로 타락한 시대를 살고 있지만, 그 당시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타락상이 팽배해있어서, 끊임없이 그 저급한 환경에서 자신을 거룩하게 지키지 못하면 쉽게 죄의 유혹에 빠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하루하루가 영적 전쟁입니다. 세 번째는 그 지역의 그리스도인들 안에 싹트고 있던 패배주의였습니다. 소아시아에서 숫자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여러 종교적인 집단 중에서도 교회는 매우 미약한 공동체였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여력도 없고,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패배주의가 자리 잡았던 겁니다. 네 번째는 그들의 기독교적인 신앙 고백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와 가치들에 대해 명확한 개념들이 세워지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복음에 대해 잘 몰라, 여러 주변 사상에 쉽게 흔들렸고, 왜곡될 수 있었습니다. 막 믿음이 자라나고 있을 때, 그것을 확실하게 다질 수 있는 양육의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기에 언제고 주변에 잘못된 종교 혼합주의와 세속의 사상들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위험성은 지금도 마찬가지로 우리 주변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체계를 무력화시키려고 하는 수많은 반 기독교적인 사상들이 기독교를 향해 융단폭격을 해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지식에 대한 갈망을 갖고 있는 청년들은 이에 쉽게 넘어집니다. 복음은 왠지 고대 유물 같고, 이러한 현대적인 사상과 지식들은 고차원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신학교도 심각합니다. 복음의 원색적인 지식은 간데없고,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언어들만 충만합니다. 젊은 신학도들의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머리가 아프고, 짜증이 납니다. 게다가 여러 교회들이 스스로 만든 상황이기도 하지만 세상의 도덕적인 잣대에서 자유롭지 못하면서, 세상을 향한 거룩함의 영향력을 상실해가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 신앙인들 속에 교회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단적인 예로 그런 실망 때문에 개신교에서 카톨릭으로 이동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카톨릭이 반사이익을 챙겼습니다.

한국교회의 가장 큰 위험요소는 복음에 대한 명확한 지식이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한국교회 내에 이단이 왕성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성경이 먼저 들어와 교회가 세워지고, 선교사가 그 후에 들어온 특별한 케이스입니다. 그 옛날에는 사경회라고 해서 교회마다 모여 말씀을 주구장차 배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성경을 가르치는 것도 프로그램화되고, 단계화되면서 소위 성숙과정,고급과정을 수료하고 나면 더 이상 말씀을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신앙을 더욱 성숙함의 단계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수고하는 열정이 식어버렸습니다. 물론 여러 교회들이 지속적으로 성도들로 하여금 큐티를 하고 있지만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이들이 자막 없는 미국드라마를 보면서 상상력만 키우듯이 말씀에 대해 잘못된 이해들만 더욱 키워버린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큐티는 한다고 하지만 그로 인해 복음에 대한 바른 지식이 약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로인해 믿노라고 하면서도 전혀 구원이 뭔지 모르고,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하고, 왜곡된 신앙의 모습을 갖게 되었습니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열정을 갖고 있어서 많은 일들을 합니다. 선교도 하고, 봉사도 하고, 구제도 하고, 시국선언도 하고, 교회도 짓고, 주일마다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드립니다. 겉으론 화려해보입니다. 그런데 왠지 마음이 불안합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섰을 때 어떤 평가를 받을지? 과연 하나님이 칭찬하실지? 아니면 심판하실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의 가치들을 제대로 안다면, 그래서 그것들을 누릴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차원의 신앙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여기에 이르느냐에 따라 세상을 밝히는 건강한 신앙의 삶을 살수도 있고,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으로 살아 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일은 굉장한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이성만으로 접근하여 이해하기에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택하심과 그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을 내가 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열어주셔야만 합니다. 이와 같이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는 우리들에게 에베소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믿음을 북돋아 주고, 우리들에게 성도로서의 정체성과 이 세상에서 무력화 된 것처럼 보이는 교회를 하나님은 왜 세우셨는지. 우리들의 삶에서 진정 이루시고자 하는 부르심의 목적이 무엇인지 찾아갈 수 있는 충실한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바울의 감사와 기도

바울은 에베소서13-14절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신령한 복을 노래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신 위대한 구원에 대해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신령한 축복의 열매로 에베소의 성도들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사랑으로 다가오셨던 것처럼 서로 사랑하며 믿음의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바울도 이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지니고 있는 믿음과 사랑의 소식을 접하고, 이들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그와 함께 바울은 중보 기도로 에베소의 교인들을 품었습니다. 바울은 저들로 인해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하였지만 저들의 신앙의 위치에 대해 아직 안심할 수 없었습니다. 주변 상황이 그들을 넘어뜨릴 만한 위험성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자녀들을 바라보는 영적인 아비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이미 받은 은혜도 크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영적인 성장을 위한 간구함이 우리에게도 그래서 필요합니다.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세상의 수많은 도전들을 넘어설 수 있도록 우리의 성숙을 위한 기도는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

바울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17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에베소서18절에서 보면 하나님은 이미 모든 지혜와 총명을 그분의 은혜로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비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17절에서 이미 그들의 것이 된 것을 성령님에 의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계속해서 전해주시도록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그들 속에서 역사하여 믿음의 통찰력을 주시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목적의 여러 측면들을 저들에게 드러내시도록 간구한 것입니다. 17b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바울은 에베소의 성도들이 진정하고도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알기를 소망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살아 있고 순종적인 관계로 나아가기 위해선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믿음을 갖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우리는 보다 풍성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 우리 하나님을 아는 일에 자라가야 합니다. 골로새서110절에서 바울은 골로새의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가게 하시고하였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가고 계십니까? 이 일에 결코 그냥 되는 것이 없습니다. 은혜는 값없이 받았지만 그 이후에 성장의 과정에서 희생과 헌신과 노력이 없으면 하나님이 마련해놓으신 복음의 가치와 능력을 제대로 누릴 수 없습니다. 맛보기정도만 누린다고 할까요?

참으로 불행하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아는 일에 멈춰 섰습니다. 얼마 전 한 포털사이트에 31세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세 살 적에 갑상선의 문제로 성장이 멈춘 한 여자의 소식이 올라왔었습니다. 나이는 31살인데 몸과 인지능력은 세 살, 걷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고, 보니까 얼굴만 나이가 들뿐이었습니다. 부모가 평생 돌보면서 얼마나 그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우리도 하나님을 아는 일에 성장하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기 시작할 때, 여전히 젖 먹는 유아에 불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에 머물 수 없게 되고,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 설 수 없습니다. 도저히 성숙한 빛의 자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특히 이런 이들이 믿어보니 별것 없다고 투덜거립니다. 별것 없이 신앙 생활했으니 별것 없을 수밖에요. 우리가 거룩함의 능력을 누리고, 하늘의 가치들로 채워지려면 신령한 지식에서 자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지식은 계시가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신앙서적 몇 번 들추어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그냥 지식일 뿐입니다. 머리만 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 위에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이 넘칠 때,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는 것입니다. 나의 구세주로 말입니다.

마음의 눈을 밝히사

바울은 이처럼 지혜와 계시의 영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를 기도하며, 또 저들을 위해 18a“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조명을 통해 성도들의 내적인 눈이 밝아지기를 중보 한 것입니다. 불이 좀 어두운데서 한참 책을 보다보면 눈이 침침해집니다. 며칠 전 교회 실내에 형광등을 모두 바꾸었더니 책을 보는데 눈이 편해졌습니다. 성령께서 마음의 눈을 밝혀주실 때 우리 앞에 침침했던 것들, 뿌연 것들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확실해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우리 안에 성령의 불을 밝히지 않으면 우리는 참으로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의 눈을 가리고 있는 세상의 많은 거짓된 것들이 우리 안과 밖에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조명이 없이는 그것들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죄 가운데 빠져 있던 우리들의 마음은 그와 같은 것들에 더 마음이 끌리는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빛으로 그것들을 차단해야 합니다. 끊어내야 합니다. 주변의 모든 불들이 꺼지고 성령의 스포트라이트를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집중과 몰입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그것을 누릴 수 있도록 그리스도 안에서 초청받은 우리가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순간 내 존재감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영적인 자존감이 팍팍 올라가게 됩니다.

 부르심의 소망

바울은 성령님의 내적 조명을 통해, 제일 먼저 성도들이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18b에서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되는 대로, 혹은 아무 목적 없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은 우리를 부르실 때 어떤 목적을 염두에 두고 계셨습니다. 오늘 여러분을 하나님께서 성도로서 왜 부르셨습니까? 이 부르심에 응답한 여러분 안에 어떤 소망이 자리 잡고 있습니까? 그 소망의 힘이 오늘도 여러분을 붙잡아 주고 있습니까?

성도로서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선택하시고, 부르셨는지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가는 그 길은 그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의 내용인 소망을 펼쳐 볼 수 있다는 것은 강력한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전 인생을 이끌고 가는 에너지가 되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열 명의 황제가 기독교인들을 박해할 때 성도들 속에 부르심의 소망이 너무도 강렬하였기에 그들은 불구덩이도, 사자입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핍박하던 권력을 마침내 이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함으로, 자유와 평강으로, 고난과 영광으로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삶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고, 섬기며,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서로서로 교제를 나누고 현재 당하는 고난을 넘어 나타나게 될 영광을 바라보는 종말론적인 삶으로의 부르심입니다. 바울은 우리의 눈이 열려 이와 같은 부르심의 소망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

부르심의 소망과 함께 바울은 성도들이 누리게 될 기업의 영광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성령의 조명을 통해 깨달을 수 있기를 기도하였습니다. 18c“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바울은 에베소의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자신의 소유로 만드신 일의 영광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또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교회가 누리게 될 무한한 특권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알기를 소망했습니다.

우리나라 삼성전자가 대단합니다. 하지만 미국의 글로벌 기업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들 또한 복음 안에서 누리게 되는 우리 기업의 영광에 비교하면 별 것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결국 무너질 기업이기 때문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애플이 제 아무리 지금 잘 나가고 있지만 영원할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보증하신 우리의 기업은 영원합니다.

벧전14절에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 삶의 끝에 우리 기업의 영광을 풍성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걸 오늘 우리가 분명하게 볼 수 있다면, 그 풍성함을 누릴 수 있다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들의 삶은 세상의 그 어느 것도 부럽지 않습니다. 지금 작은 문제들 때문에 결코 흔들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능력

이어서 바울은 믿는 이들이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인지를 성령의 조명을 통해 알도록 기도하였습니다. 19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하나님의 부르심이 믿음의 길에 처음을 회고하고, 하나님의 기업이 그 끝을 내다보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능력은 그 사이의 기간, 지금 이 자리에서 성도들이 누릴 수 있는 실제적인 것입니다. 성도들은 구속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또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그 능력을 힘입어 권세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여러분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우리 하나님은 엘 샤다이의 하나님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은 20절 이하에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게 하시면서 21절에 보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사그리스도를 만물을 주관하시고 통치하는 분으로 세우셨습니다. .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과 승천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들과 어떤 밀접한 관계가 있을까요? 이게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 믿는 이들이 누릴 수 있는 능력의 범위는 하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일으켜서 그 분을 높이신 일에서 분명하게 보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역사가 그리스도인들의 존재를 자각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증거는 에베소서 25-6절에서 분명해집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부활과 승천은 신적인 능력을 결정적으로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죽음과 악은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언제나 그 속박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또한 사람은 타락했기에 스스로 악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둘을 모두 정복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그 둘 다에서 구해주실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 분 안에서 십자가, 부활, 승천의 혜택을 얻게 됩니다. 십자가는 죄의 문제 해결을, 부활은 사망 권세 연약함의 문제를 극복하는 힘을, 승천은 우리가 잃어버렸던 하늘의 존귀함과 후사로서의 통치권을 되돌려 받게 된다는 하나님의 능력이자 약속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승리는 싸워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누리는 영적인 승리입니다. 우리 주님이 싸워서 이미 얻은 결과를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따라가면서 주워 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걸 모르니 그 엄청난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죄 앞에 넘어지고, 사망권세 앞에 작아지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도록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아닌 자로 살아갑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더욱이 하나님은 영광과 존귀의 자리에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세워주셨습니다. 22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로 교회를 충만하게 하실 때 교회는 특별한 공동체가 되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때서야 하늘의 놀라운 능력을 이루어가는 신앙공동체가 됩니다. 이런 방식으로 교회는 우주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 가운데 특별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위대하신 구원 계획을 만물 가운데 충만히 드러내기 위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의 몸

23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하였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은 교회가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며, 또한 그리스도에게 복종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에 의해 충만하게 되고, 완성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임재와 역동적인 통치로 완전하게 충만케 하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교회를 항상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또한 그분의 임재로 교회를 충만하게 하시기 때문에 교회는 특별한 공동체입니다. 오늘 예수생명교회의 머리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그분의 통치하심 앞에 무릎 꿇어야 합니다. 무릎 꿇는 그 자리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로 채워지고, 그분의 능력으로 무장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로서 교회가 되고, 허락하신 능력으로 세상을 변혁시켜갈 수 있는 것입니다. 감히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잃어버리는 순간 교회는 능력을 상실하고 맙니다.

이렇게 에베소서115-23절의 말씀은 이 편지의 수신자들이 자기들이 받은 구원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하나님의 구원 경륜 속에 있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위치가 어떤 것인지를 알고 깨달아 믿음의 성숙에 이르도록 중보 하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과거, 현재, 미래를 포괄하며 삼중적인 내용을 갖고 있습니다.

과거적인 요소는 부르심의 소망

현재적인 요소는 하나님의 능력과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

미래적인 요소는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눈이 열리면, 하나님의 구속사를 꿰뚫어볼 수 있어, 과거, 현재, 미래에 펼쳐지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우리는 전혀 미동치 않고 믿음의 길을 올바르게 걸어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인치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보증서를 갖고 있는 자녀들입니다. 세상 앞에 결코 작은 자가 아니라 믿음의 거인이 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늘의 신령한 능력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 자녀다운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이런 우리를 바라보실 때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반면에 사탄은 얼마나 두려워하겠습니까?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며 대림절의 절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 안에 성령님의 도우심을 통해 하나님의 비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인격으로 살아가며 세상을 이기는 자녀가 되기를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요청하십니다.

댓글